영화 <원령공주>와 가스통 바슐라르 ⑤

   

5. 문명의 진보 vs 몽상의 몰락 (1)

   
 

 몽상이 우리의 휴식을 강조하러 올 때는 온 우주가 우리의 행복에 기여하러 오는 것이다. 잘 꿈꾸려는 자에겐 이렇게 말해야 한다. 우선 행복하세요. 그러면 몽상이 자기의 진정한 운명을 답파(踏破)한다. 그것은 시적 몽상이 된다. 그 시적 몽상을 통해, 그것 속에서 모든 것은 아름답게 된다. 몽상가가 ‘손재주’를 가지고 있으면 자기의 몽상으로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작품은 웅장할 것인데 왜냐하면 꿈속의 세계란 자동적으로 웅장하기 때문이다.    


 -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22쪽.

 
   

   에보시의 총탄에 맞은 들개 모로의 복수를 감행하기 위해 한밤중에 타타라 마을에 잠입한 원령공주. 에보시 일족은 모두 모여 원령공주와 들개들의 침입에 맞서고, 아시타카는 혼란에 빠진다. 적(敵)의 적(敵)은 아군이란 말인가. 그는 에보시 일족에게는 ‘정체를 확실히 밝히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난받고, 원령공주에게는 에보시의 부상자들을 도와줬다는 이유로 ‘간악한 인간의 무리’로 취급받는다. 그가 원하는 것은 모두가 서로의 가슴에 칼이나 총을 겨누지 않는 것이다. 아시타카 또한 자기 부족의 평화와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났지만, 그는 에보시에게도 원령공주에게도 아직은 마음의 거리를 둘 수 있는 위치다. 이 거리감이 그에게 상황을 ‘이익의 관점 바깥에서’ 통찰할 수 있는 여유를 준다. 그러나 원령공주가 목숨을 걸고 타타라 마을에 침입하여 에보시의 목을 노리는 상황에서 이런 ‘평화의 몽상’은 통하지 않는다. 


   “너도 원한을 갚으러 왔겠지만, 여기에도 들개한테 남편이 물려 죽고 원한을 품은 사람들이 있어.” 아시타카는 원령공주를 설득해보지만, 그녀는 아예 귀를 막아버린다. 총탄으로 무장한 수백 명의 에보시 일족과 들개 몇 마리와 어린 소녀뿐인 모로 일족의 혈투. 언뜻 봐도 이건 ‘게임’이 되지 않는다. 아시타카는 원령공주를 살리기 위해 계속 그녀를 설득하지만 소용이 없다. “원령공주, 숲으로 가! 헛되이 죽어선 안 돼. 물러서는 것도 용기라고! 돌아가!” 복수심에 불탄 원령공주는 온몸을 던져 에보시에게 돌진하여 결투를 벌이고 부족들은 에보시를 응원하며 언제라도 어린 소녀 한 명에게 무더기로 총탄을 퍼부을 기세다.
   그러나 진화된 화승총으로 무장한 그들의 눈빛은 두려움으로 가득하다. 단검 하나 손에 쥐었을 뿐인 원령공주는 무기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 생애를 걸고 에보시에게로 돌진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원령공주에게는 문명화된 인간에게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기묘한 신비의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완전한 들개도 완전한 인간도 아닌, 인간의 지혜와 들개의 속도를 겸비한 원령공주는 미묘한 반인반수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에보시와 원령공주의 싸움을 말리려는 아시타카의 팔뚝을 원령공주가 덥석 물어버리자, 헝겊으로 친친 동여맨 그의 팔뚝에서 재앙신의 저주가 그 끔찍한 위용을 드러낸다. 아시타카는 자신의 치명상을 가리키며 모두에게 말한다. “이것이 내 속의 원한과 증오의 모습입니다. 육신을 썩게 하고 죽음을 부르는 저주라고요. 더 이상 증오에 휩쓸리지 마세요.” 에보시는 들은 척도 안 하며 원령공주를 기어이 죽여버릴 태세다. 용맹과 무예와 인격을 두루 갖춘 아시타카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싶은 에보시는 아시타카의 팔을 싹둑 잘라내려 한다. 저 흉측한 상처로 뒤덮인 ‘저주받은 팔’만 잘라내 버리면 아시타카의 ‘건강한 육체’는 써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지극히 근대적인 사고방식인 것이다.  


   원령공주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아시타카는 에보시와 원령공주 모두를 잠시 기절시킨 후 원령공주를 데리고 숲으로 달아나려 한다. 이때 에보시 부족의 여성이 자신들을 배신한(?) 아시타카에게 화승총을 쏴버린다. 적을 도와줬으니 아시타카도 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이분법적 사고 속에서 아시타카의 평화의 몽상은 자리 잡을 틈이 없다. 총에 맞은 아시타카는 선혈을 뚝뚝 흘리면서도 죽을 힘을 다해 원령공주를 들쳐 매고 타타라 마을을 빠져나온다. 그러나 원령공주를 간신히 숲으로 옮겼을 땐 이미 그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태였다. 원령공주는 죽어가는 아시타카에게 심문하듯 다그친다.
    

   원령공주 : 왜 날 방해한 거야? 죽기 전에 대답해!
    아시타카 : 널, 죽게 내버려두긴 싫었어…….
    원령공주 : (잔뜩 날선 표정으로 아시타카를 경계하며) 죽는 건 두렵지 않아! 인간 만 쫓아낸다면 죽어도 상관없어!
    아시타카 : (점점 의식을 잃어가는 목소리로) 넌…… 살아야해…….
    원령공주 : 닥쳐! 인간 말은 안 들어!
    아시타카 :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의식을 점차 잃어가며) 넌…… 아름다      워…….
    원령공주 :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아름답다’는 표현에 화들짝 놀라 흠칫 뒤로 물러선다.)

   ‘목숨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원령공주에게 아시타카는 말한다. “넌 아름다워.” 원령공주는 너무 놀라 멈칫하며 물러선다. 그녀는 자신이 소년 앞에 얼굴 붉힐 줄 아는 소녀라는 것, 가면과 피 냄새에 가린 그녀의 얼굴이 누가 봐도 숨 막히게 아름답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다. 그녀는 ‘문명의 시선’으로 봤을 때 ‘들개에게 혼을 빼앗긴 불쌍한(혹은 무서운) 소녀’였을 뿐 누군가에게 관심과 애정의 눈길을 받아본 적이 없다. 인간에 대한 증오가 그녀의 삶 전체를 장악하고 있어서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자신의 또 다른 삶을 생각할 몽상의 여유가 없는 셈이다.
   그녀 또한 ‘몽상의 시간’이 없기로는 철두철미한 여전사 에보시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아시타카는 ‘너는 아름답다’고 말함으로써 그녀에게 이전에는 꿈꾸지도 못했던 사유의 여백을 선물한다. 자기를 위해서 목숨까지 건 소년이 있다는 것, 그런 그가 자신에게 아름답다고 말하며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사실에, 원령공주는 아직 감동을 느낄 여유도 없다. 늘 인간을 향한 심리적 전쟁 상태에 놓여 있는 원령공주에게는 휴식과 몽상을 위한 마음의 여백이 없다. 

   
 

심리학자들은 아주 특징적인 것에 매달리는 법이므로, 그들은 먼저 꿈, 놀라운 밤의 꿈을 연구하고, 몽상, 그들이 보기에는 구조도 없고 이야기도 없고 수수께끼도 없는, 모호한 꿈에 지나지 않는 몽상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몽상은 그때 대낮에는 기억되지 않는 약간의 밤의 물질에 지나지 않는다. (……) 무의식은 진짜 수면의 꿈속에서야 제 활동을 하게 될 것이다. 심리학은 명확한 사고와 밤의 꿈이라는 두 극점을 향해 일을 하는데 그럼으로써 인간 심리의 전 영역을 검토하게 된다.
 그러나 낮의 삶과 밤의 삶이 섞이어 있는 황혼 상태에 속하지 않는 다른 몽상이 있다. (......) 몽상은 아주 자연스러운 정신적 현상이어서, 그것을 꿈에서 파생된 것으로 취급할 수 없으며, 다짜고짜 꿈의 현상 속에 위치시킬 수는 없다. 


 -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19~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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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슨 2009-10-29 0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꿈꾸려면, 우선 행복하라! 밤에 발뻗고 잘 잠들 수 있는 능력이 최고의 철학이라던 누군가의 말이 생각나는 밤입니다. 아, 오늘밤에도 잠들기는 글렀다~~~

sotkfkd 2009-10-30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