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24시간 'ON AIR'의 세계에서 길을 잃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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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의 황색은 연금술적인 황금이며, 무수한 꽃으로부터 채취되어 햇빛에 굳어진 꿀과 같이 만들어진 황금이다. 그것은 결코 단순히 밀이나 불꽃이나 밀짚의자의 황금빛이 아니다. 천재의 한없는 꿈에 의해 영원히 개성화된 황금빛이다. 그것은 이미 이 세상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재산, 한 인간의 마음, 전 생애를 통한 응시(凝視) 속에서 발견된 근원적인 진실이다.
- 바슐라르, 김현 역, <꿈꿀 권리>, 열화당, 1995, 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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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까마귀 나는 밀밭>, 1890
그저 단순한 노란색이 아니라 반드시 ‘고흐빛 노랑’이라 불러야 할 것만 같은 빛깔 앞에서 우리는 흐뭇이 미소를 흘린다. 단지 물감이 아니라 ‘무수한 꽃으로부터 채취되어 햇빛에 굳어진 꿀’을 바른 듯한, 이 세상 하나뿐인 황금빛의 아우라 속에서 우리는 고흐의 눈이 되어, 고흐의 숨결을 느끼며 행복해 한다. 바슐라르는 고흐만이 낼 수 있는 그 선연하고도 야생적인 황색이야말로 고흐의 ‘한없는 꿈’이 만들어낸, ‘영원히 개성화된 황금빛’이라고 말했다. 고흐빛 노랑은 이 세상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전 생애를 꿰뚫는 응시 속에서 발견된, 예술가의 생애 그 자체라고.
원령공주가 자신이 인간임을 부정하고 ‘들개의 딸’이길 원했던 이유 또한 그녀가 그토록 사랑하는 ‘숲의 빛깔’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단순한 ‘초록색’이 아니라 그 수많은 동물들과 숲의 정령들을 한 아름에 품어 안는, 그녀에겐 세상에 하나뿐인 ‘원령빛 초록색’을 말이다. 그녀는 인간에게는 한없이 적대적이지만 숲의 동식물 하나하나, 깜찍한 숲의 정령 하나하나에게는 한없이 친절하다. 그녀가 밤마다 들개 모로의 등허리를 타고 몰래 인간의 마을에 잠입하여 하는 일도 단지 ‘나무를 심는 일’을 위해서다. 그녀의 초록빛, 아니 숲의 모든 생물들을 위한 초록빛을 지키기 위해, ‘시시신’의 숲을 인간의 자연개발을 위한 미끼로 던져주지 않기 위해, 그녀는 평범한 인간이 되는 길을 포기하고 ‘숲의 전사’가 되는 길을 택했다.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타타라 마을 사람들은 원령공주가 “들개들에게 혼을 빼앗긴 불쌍한 계집애”라고 말한다. 그들이 시시신의 숲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면, 원령공주도 ‘정상적인’ 인간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그들은 숲을 정복하여 마음껏 자원으로 이용하고 숲의 개발을 가로막는 들개들을 몰살하여 ‘풍요로운 국가’를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아시타카는 자신에게 치명상을 입힌 재앙신이 바로 타타라 마을의 부족장 에보시의 총에 맞아 한을 품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타타라 마을 사람들은 에보시가 가져온 풍요로운 삶에 만족하여 그녀를 향한 절대적인 응원을 보낸다. 화승총을 비롯한 무기 제작 기술에 뛰어난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불로 연마한 철’의 이미지는 오랫동안 자연의 힘에 조화롭게 순응하던 인간이 ‘자연에 대한 통제권’을 갖게 된 상징적인 이미지다. 불과 철을 마음대로 쥐락펴락할 수 있게 된 인간은 무기와 농기구를 비롯한 각종 첨단의 문명을 발전시키게 된다. 아시타카는 타타라 마을 사람들이 추앙하는 에보시의 총에 맞은 멧돼지신이 재앙신으로 변했다는 사실, 재앙신의 저주는 숲을 파괴하려는 인간 때문임을 알게 되고 절망에 빠진다. 원령공주의 최대 적수도 바로 에보시다. 에보시는 타타라 마을을 이끄는 부족장이자 걸출한 전략가로서 수많은 전쟁 경험도 갖고 있다. 에보시는 거리낌없이 숲을 파괴하며 숲을 ‘자원’으로 이용하여 인간의 재화로 편입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에보시가 타타라 마을 부족 전체에게 전폭적인 신임을 얻고 있는 까닭은 그녀가 가난한 사람들, 나병에 걸린 사람들, 사회에서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여성들까지 모두 거두어주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에보시의 선택은 ‘가장 값싼 노동력’을 얻기 위한 자본가의 합리적 선택일지도 모른다.) 나병에 걸린 노인은 에보시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아시타카에게 부디 그녀를 죽이지 말라고 애원한다. “자네의 분노와 슬픔은 잘 알겠네. 허나 저 분을 죽이진 말게. 우릴 인간 대접하는 유일한 분이라네. 우리의 병을 두려워하지 않고 썩은 살을 씻기고 붕대를 감아주셨지. 산다는 건 정말 힘들고 괴로워. 난 세상과 사람을 저주하지만 그래도 살고 싶어. 날 봐서라도 제발, 그분을 죽이지 말게.” 노인은 아시타카의 연민을 자극하지만 그의 에너지는 세상을 증오하면서도 삶에 집착하는, 더 이상 새로운 삶을 창조하지 못하는 인간의 자기연민처럼 보인다.
에보시는 ‘인간의 생존’과 ‘자연의 이용’을 등가로 판단한다. 자연을 제대로 이용할 수 있다면 자신은, 그리고 자신이 속한 부족은 번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옛 신들만 사라지면 괴물들도 보통 짐승이 되지. 숲에 인간의 빛이 들고 들개가 잠잠해지면 풍요로운 국가를 만들 수 있어. 원령공주도 인간이 될 수 있겠지. 시시신의 피는 병 치료에 유용해. 나병환자들도 고치고 자네 상처도 고칠 수 있을지 몰라.”
에보시는 카리스마 넘치는 CEO이자 용의주도한 정치가이자 주도면밀한 전쟁전문가의 원형으로 그려진다. 타타라 마을 사람들이 개발한 화승총은 그 시대 최고의 전쟁 무기였던 것이다. “이 총은 괴물이건 무사의 갑옷이건 모두 박살낸다.” 아시타카는 화승총의 위력에 놀라 타타라 마을 사람에게 말한다. “숲을 빼앗고, 산의 신들을 재앙신으로 만들고도 모자라 그 총으로 원한과 저주를 살 셈이오!” 아시타카는 아직 원령공주와 한 마디 대화조차 나눠보지 못했지만 인간이길 포기해가면서까지 들개와 동거하며 짐승처럼 살아가는 그녀의 뼈아픈 고독을 이해한다. 원령공주에게 숲의 빛깔을 잃어버리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과 정확히 등가인 것이다.
그녀는 자연을 그저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가 되어버린, 자연 속으로 저물어가기를 선택한 존재다. 만약 바슐라르가 <원령공주>를 보았다면 자신이 꿈꾸던 낙원을 가꿀 용맹스러운 전사의 이미지를 바로 여기서 찾았다며 감탄하지 않았을까. 그녀는 자신의 행복과 숲의 행복을 결코 분리하지 않는다. 숲의 수호신인 시시신의 피를 질병 치료에 이용하려는 문명인의 상상력으로는 결코 원령공주를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잃어버린 반 고흐의 황금빛을, 잃어버린 원령 공주의 초록빛을, 마르크 샤갈의 잃어버린 낙원의 빛깔을, 어떻게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샤갈의 그림은 대지와 인간이 반목하지 않았던 시대의 바로 그 원초적 낙원을, 대지의 목소리에 인간이 귀 기울일 줄 알았고 인간이 ‘땅처럼 숨쉬는 법’을 알고 있었던 시대의, ‘아름답다’라는 형용사만으로는 결코 담을 수 없는 낙원의 빛깔을 간직하고 있다.
▲ 마르크 샤갈, <낙원>,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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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한 장의 아름다운 그림이다. 낙원에 대한 모든 몽상가의 원초적 몽상에 있어서, 아름다운 색깔들이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화해시킨다. (……) 생명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생명은 되돌아오지도 않는다. 초벌그림이란 결코 있을 수 없고, 언제나 불꽃뿐이다. 샤갈이 그리는 존재들은 모두 최초의 불꽃이다. 그러므로 우주적인 정경에 있어서, 샤갈은 발랄함의 화가인 것이다. 그의 낙원은 싫증나지 않는다. 새들의 비상과 더불어 무수한 눈뜸이 하늘에 울려 퍼진다. 대기 전체에 날개가 돋쳐 있는 것이다.
-바슐라르, 이가림 역, <꿈꿀 권리>, 열화당, 2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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