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원령공주>와 가스통 바슐라르 ③

   

3. 24시간 'ON AIR'의 세계에서 길을 잃다 (1)

   
 

 나의 수줍은 램프를 격려하려고
 광대한 밤이 그 모든 별들을 켠다 


 - 타고르, <반딧불> 중에서

 
   
   
 

인공위성에서 내려다보면, 전기가 어둠을 서양의 바깥으로 몰아낸 것을 뚜렷이 감지할 수 있어. (……) 성서에는 빛이 어둠 속에서 빛난다고 묘사되었는데, 이와 반대로 여기에서는 빛이 어둠을 몰아내네. (……) 파괴된 도시들의 운명에 대한 근심으로 예언자들이 비탄에 잠겨 울부짖던 옛날과는 달리, 오늘날 우리는 숲이나 사막, 카르투지오회의 수도원과 사원, 사유하기에 좋은 정적과 고독 등의 상실과 파괴를 슬퍼하고 있어. 도시-빛은 어두움 속으로 파고들고, 떠들썩한 소란으로 고요함을 깨뜨리고, 자연의 침묵에 문자를 들러붙게 하고, 생물을 멸종시키지.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새로운 탄식을 더 이상 들을 수 없어. 절망의 아우성이 퍼지던 그 옛날의 적막한 공간을 박탈당했기 때문이야.  


 - 미셸 세르, 이규현 옮김, <천사들의 전설>, 그린비, 2008, 67~70쪽. 

 
   

 

   전기는 인류의 오랜 공포였던 어둠을 몰아내면서, 동시에 어둠에 깃드는 몽상의 시간도 함께 추방해버렸다. 촛불은 빛을 생성하면서 어둠이 거처할 여백을 남겨두지만, 형광등은 빛을 생산하는 동시에 어둠을 말끔히 삭제해버린다. 어둠과 빛을 한 공간 안에 담아내는 촛불의 너른 품 안에서 인간은 밤의 무의식과 낮의 의식을 결합시키는 몽상의 공간을 창조할 수 있었다. 바슐라르는 <촛불의 미학>에서 스위치를 올려 불을 켜는 전등으로 인해 ‘통제되고 관리되는 빛의 시대’가 열렸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기름으로 빛을 내는 저 살아있는 램프의 몽상을, 전등으로 인해 빼앗겨버렸다고. 전등 앞에서 우리는 스위치를 올리고 내리는 기계적인 주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로맨틱 가이의 프로포즈 이벤트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품, 그것은 바로 ‘촛불’이다. ‘저 남자를 사랑할까 말까’하고 고민하는 여성에게, ‘흔들리는 촛불’은, 어둠과 빛을 모순 없이 공존케 하는 촛불의 널따란 품은, 계산적 이성을 마비시키고 몽환적 감성을 일깨우는 멋진 뮤즈의 역할을 자임한다. 흔들리는 여인의 마음을 더욱 제대로 뒤흔들어 버리는 촛불의 미학을 활용할 줄 아는 남성들의 지혜. 그것은 사랑에 빠진 남성의 마음에 평등하게 내재한 본능적인 천재성(?)이 아닐까.
    이 순간 촛불은 ‘문명의 도구’가 아니라 ‘사랑의 메신저’이며, 어둠의 몽상을 빛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유혹의 주체로 거듭난다. 촛불의 빛을 굳이 없애버리지 않고 ‘가만히 남겨두는’ 어둠 너머로, 우리는 몽상의 나래를 펼친다. 촛불 너머의 세계, 무지개 저편의 세상, 합리적 이성 너머에 존재하는 세계의 꿈을. 촛불은 의식이 ‘불확실성’이라 명명하는 어둠의 공간을 꿈과 이상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 

   <원령공주>에서 평화로운 에미시족의 마을에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재앙신’은 ‘몽상의 시간을 빼앗긴 자연’의 은유처럼 보인다. 에미시족의 후계자인 아시타카는 성난 멧돼지의 모습을 한 재앙신을 설득하여 원래의 유순한 모습을 되찾아주고자 하지만 그의 분노를 가라앉힐 길이 없다. 결국 부족을 지키기 위해 아시타카는 목숨을 건 결투 끝에 재앙신을 쓰러뜨리지만, 자신도 오른 팔에 끔찍한 저주의 상처를 입고 죽어갈 운명에 처하게 된다. 결국 재앙신의 탄생 원인을 밝혀 자신에게로 옮겨온 저주를 풀기 위해 아시카타는 서쪽으로 길을 떠나게 된다. 여행 중에 ‘지코’라는 수도승을 만난 아시카타는 재앙신의 탄생이 ‘시시’신의 숲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시시’신의 숲. 그곳에서는 모든 짐승이 태곳적 모습 그대로 거대한 몸을 지니고 있다더군.”


   한편, 서쪽 끝 ‘시시’신의 숲 건너편 타타라 마을에 사는 ‘에보시’ 일행은 식량을 운반하던 도중 거대한 들개의 신 ‘모로’ 일행에게 습격을 당한다. 철로 된 각종 무기를 만들며 살아가는 에보시 일행은 강력한 총포를 쏴 들개들에게 큰 상처를 입힌다. 양쪽 모두 커다란 타격을 입지만 왠지 들개에게 거대한 총포를 쏘아대는 인간의 모습은 자연을 ‘압도’하기보다 자연에 대한 ‘공포’에 질려 있는 듯하다. 들개들의 수장 모로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은 더 많이, 더 강력한 화약으로 들개들을 위협하게 만든다. “저놈이 모로야. 놈은 불사신이다! 이 정도론 안 죽어!”

   마침 ‘시시’신이 살고 있다는 숲을 지나던 아시타카는 모로 일행에게 습격당한 에보시의 부하들을 구해낸다. 아시타카가 에보시의 부하들을 구해주는 모습을 먼발치서 지켜보는 들개의 신 ‘모로’와 원령공주 ‘산’. 모로의 곁에서 상처 입은 들개들을 치료해주는 원령공주의 모습을 처음 본 아시타카는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강인하면서도 신비로운 기운에 매혹된다. 아직 자신이 ‘원령공주의 적들’의 편으로 의심받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아시타카는 타타라 마을로 가서 귀빈 대접을 받게 된다. 에모시의 여인네들에게 아시타카는 죽을 뻔한 남편들을 구해준 영웅이 된 것이다.  
   원령공주가 들개들과 함께 사는 숲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우리는 우리 안의 잃어버린 몽상, 밤의 저편으로 추방해버린 무의식의 세계와 조우하는 듯한 환상을 느낀다. 합리적 이성의 세계, 낮의 세계에 초대받지 못한 우리의 가여운 몽상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최근 도심 곳곳에서 일어나는 ‘멧돼지 습격 사건’은 더 이상 ‘동화 속 은유’로 멈추지 않는, 문명의 세계에서 버림받은 우리 시대의 재앙신이 내뿜는 절규의 몸짓이 아닐까.


 

   
 


정신분석가는 지나치게 생각한다. 그는 충분히 꿈꾸지 않는다. 낮의 삶이 표면에 맡겨 놓은 찌꺼기들로 우리 존재의 밑바닥을 설명하려 하다가, 그는 우리 속에 있는 심연의 의미를 지워버린다. 우리의 지하실로 내려가는 걸 누가 도와줄 것인가?  (……) 몽유병 환자는 내려간다. 언제나 태고의 숙소를 찾아 내려간다. (……) 그는 자기 속으로 내려가는가? 자기 저 너머로 가는가? 


 - 가스통 바슐라르, 김현 옮김,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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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r hurts 2009-10-26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랑에 빠진 남자들의 본능적인 천재성~ㅋㅋ 그러게나 말이예요.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어쩜들 그렇게 잘 아는지^^

sotkfkd 2009-10-27 0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엔 '전기'에 더해진 탐욕이 아닐까. 충분히 꿈꿀 수 없는 것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