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원령공주>와 가스통 바슐라르 ②

   

2.  세균 없는 곳에서는 상상력이 배양되지 않는다? (2)

   
 

 객관적 인식의 측면에서는 진실한 것이 아니지만 무의식적 몽상에서는 매우 실재적이고 활발한 어떤 것이 존재한다. 꿈은 경험보다 더욱 더 강력하다.  


 - 바슐라르, <불의 정신분석> 중에서

 
   

   바슐라르는 어느 날 정원에서 둥지를 틀고 알을 품은 새를 발견한다. 알을 품고 있지만 않았다면 부리나케 도망갔겠지만, 품고 있는 알을 포기할 수 없었던 새는 인간이 바로 코앞에 있는데도 도망가지 않고 묵묵히 버틴다. 바슐라르는 그 새가 몸을 바르르 떨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차마 도망칠 순 없지만 인간에 대한 두려움까지는 숨기지 못하는 새의 마음이 고스란히 바슐라르에게 전해진다. 그는 <공간의 시학>에서 이때의 경험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 새를 그렇게 떨게 했기 때문에 이제 나 자신이 떤다. 알을 품고 있는 그 새가, 내가 사람임을, 새들의 신뢰를 잃어버린 존재임을 알게 될까 봐 나는 두려운 것이다.” 그는 자신 때문에 떨고 있는 새의 몸짓을 바라보면서 온몸으로 ‘새처럼 움직이고 새처럼 생각하는 법’을 배운 것이다.  


   추상적 개념만을 닥치는 대로 포식하며 살아 있는 이미지를 꿈꾸는 몽상에 대해서는 극심한 거식 증세를 보여 온 서양 철학의 역사를, 바슐라르는 비판한다. 바슐라르에게 몽상이란 ‘깨어서 꿈꾸는 힘’, 즉 낮의 의식 상태에서도 밤의 무의식을 체험할 수 있는 역동적 행위를 뜻했다. 그에게 몽상은 결코 ‘사유의 포기’가 아니었다. 몽상은 ‘사유의 부재’가 아니라 사유를 준비하는 활동적 에너지가 될 수 있으며, 사유에 영양분을 제공하는 마음의 토양이며, 투명한 의식으로 무의식을 관찰할 수 있는 영혼의 광학 렌즈였다. 바슐라르는 예술가의 상상력과 철학자의 사유를 연금술적으로 종합하는 힘을 자연에서 찾고자 했다. 


   바슐라르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죄책감에 호소하지 않는다. 그는 자연을 향하여 경이를 느낄 수 있는 인간의 감성, 자연의 삶에 경탄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서 희망을 찾는다. 자연의 존재가 자신을 개시하는 순간, 그 순간의 황홀경적 조우. 이 순간을 통해 인간은 우주와 대화하고 스스로의 존재가 걷잡을 수 없이 확장되는 절대적 순간을 맛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바슐라르는 자연을 ‘자원’으로밖에 계산하지 못하는 ‘의식의 무능’을 자연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는 ‘무의식의 통찰’로 구원하려 했던 것이다. 자연에 가치를 부여하는 자기중심적 주체로서의 인간을 포기하지 않는 한, 자연과의 대화는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바슐라르는 우리의 ‘언어 습관’ 자체를 뒤집는 모험을 시도한다. 그는 괴테를 ‘위대한 숨꾼’이라고 격찬하면서 ‘숨을 잘 쉬는 법’을 알고 있는 작가 괴테가 뿜어내는 창조성의 원천을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이 숨 쉬듯, 저 멀리 숨을 내뿜으며 땅도 숨 쉰다. (……) 땅이 인간처럼 숨 쉰다고 말한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땅이 숨을 쉬듯이 괴테가 숨을 쉰다고 말해야 한다. 괴테는 땅이 충만한 대기(大氣)로 숨을 쉬듯이 폐를 힘껏 넓혀 숨 쉰다. 숨 쉬는 영광에 도달한 자는 우주적으로 숨 쉰다. 


 - 바슐라르, <몽상의 시학>중에서

 
   



   바슐라르는 ‘땅이 인간처럼 숨 쉰다’고 말하지 않고 ‘인간이 땅처럼 숨 쉰다’고 말함으로써, 인간이 아닌 모든 것을 인간의 문법으로 길들이려는 언어적 습관을 의문에 부쳤다. 의인법은 인간중심적인 문법의 대표주자다. 의인법의 프리즘으로 보면 세상 모든 것이 ‘인간 따라잡기’와 ‘인간 흉내 내기’에 지내지 않는다. 새들은 사람처럼 도시를 배회하고(‘닭둘기’로 전락한 도시의 비둘기들이여!), 애완동물들은 사람처럼 옷을 입고 사람처럼 미용실을 들락거리며 사람처럼 질병을 앓고 있다. 자연을 ‘인간의 숨결에 맞게’ 길들이려는 인간의 노력은 한때 성공적으로 보였으나 지금은 그 돌이킬 수 없는 결과들로 인해 인간 스스로가 몸살을 앓고 있다.


   <원령공주>는 바로 문명을 이룩한 과학과 합리주의가 도달한 ‘사유하는 이성’과 문명에 다가갈수록 멀어져가는 ‘야생의 상상력’ 사이의 전투를 그리고 있다. 애니메이션 초반부에 등장하는 원령공주의 모습은 사람이라기보다는 늑대소녀에 가까워보인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가린 전사의 가면은 그녀가 선택한 삶의 방향성을 나타낸다. 그녀는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문명화된 인간의 삶을 거부하고 스스로 자연 속으로 저물어가는 길을 택한다. 에미시족의 마을에 살고 있던 소년 아시타카는 철기 문명으로 무장한 타타라마을과 원령공주가 지키고 있는 시시신의 숲 사이를 매개하는 메신저다.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 위에서, ‘몽상’이 숨 쉴 여백의 공간이 사라진 황폐한 세계를 벗어나는 꿈들의 궤적. 그것이 <원령공주>의 세계가 아닐까.


 

   
 

온갖 상상으로 가득한 나이일 때
 인간은 어떻게 그리고 왜 상상하는지 말할 줄 모른다
 어떻게 상상하는지를 말할 수 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상상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상상하기 위해 우리는
 철학을 폐기 처분해야 한다,
 웃자란 지성의 키 높이만을 자랑하지 말고  


 -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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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슨 2009-10-23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땅처럼 숨쉬는 인간, 나비처럼 몽상하는 인간. ㅋ....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바슐라르는 언제나 시인처럼 말합니다.

sotkfkd 2009-10-24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웃자란 지성의 키 높이를 자랑하지 말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