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원령공주>와 가스통 바슐라르 ①


   

1. 세균 없는 곳에서는 상상력이 배양되지 않는다? (1) 

   
 

 나는 바슐라르를 대할 때마다 경탄을 금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이 딛고 있는 문명을 정면으로 부인한 사람이다. 그는 서구 인식 전체를 향해 덫을 놓은 사람이다. 


 - 미셸 푸코, 바슐라르 탄생 100주년 기념 인터뷰 중에서

 
   
   
 

실용적 과학교육에서 철학교육으로 옮겨왔건만, 나는 완전히 행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불만족의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았지요. 어느 날 디종에서 한 학생이 ‘나의 살균된 세계’를 상기시켜주었습니다. 그건 하나의 계시였어요. 사람은 살균된 세계 속에서는 행복할 수 없는 법이지요. 그 세계에 생명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미생물 세균들을 들끓게 해야 했습니다. 상상력을 회복시키고, 시를 발견해야 했던 거지요.  


 - 바슐라르, 폴 지네스티에의 <바슐라르를 알기 위하여> 중에서

 
   

   


   구두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나 우체국 전신기사로, 1차 세계대전 당시 통신 중대 중대장에서 고향마을의 과학교사로, 대학에서 과학사를 강의하는 과학자에서 소르본 대학 철학교수가 되기까지. 드라마틱한 라이프스토리로 유명한, 그러나 그보다도 더 드라마틱한 글쓰기 방식으로 유명한 바슐라르. 시인보다 더욱 시적인 문체로 철학을 강의했던 바슐라르에 따르면, 상상력은 미생물 혹은 세균을 닮은 존재다. 우리에게 영혼의 질병을 선물하여 고통에 시달리게 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비로소 ‘살아 있게’하는 생명체 내부의 타자, 그것이 바로 상상력이기에. 기계와 숫자로 깔끔하게 마름질된 합리성의 세계, 즉 ‘살균된 세계’에서 인간은 행복할 수 없다.


   나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원령공주>가 개봉된 지 한참이 지나서야 봤다. 그런데 생태주의 애니메이션으로 잘 알려진 <원령공주>는 내 짐작만큼 ‘생태주의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당시 유행하기 시작했던 생태주의 너머, 그보다 훨씬 커다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원령공주>는 단지 ‘환경을 보호하자’는 김빠지는 교훈적 메시지를 담은 영화도 아니었다. 내가 보기에 <원령공주>는 우리에게 환경 파괴에 대한 윤리적 책임감을 가지라고 채찍질하는 영화가 아니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함께 보니 그런 막연한,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길 잃은 몽상이 더욱 확장되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에게는 ‘-이즘(ism)’으로 구획될 수 없는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는데 과연 그게 무엇인지 좀처럼 포착할 수 없었다. 




   <원령공주>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분명 생태주의 그 이상이다. 그런데 그 너머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몇 년 후 우연히 바슐라르를 읽다가 비로소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을 더욱 풍요롭게 향유할 수 있는 프리즘을 얻게 되었다. 원령공주는 악을 퇴치하는 정의의 사도로서의 이분법적 세계관을 대표하는 여신상이 아니다. 인간의 윤리적 책임을 강조하는 대중화된 생태주의는 인간을 ‘죄책감의 동물’로 격하시켜버린다. <원령공주>는 생태주의 그 이상의 메시지, 생태주의만으로는 담을 수 없는 엄청난 스케일의 영화로 다가왔다.

    <원령공주>는 인간의 두뇌운동의 두 경향을 강렬한 보색대비로 보여주는 영화가 아닐까. 자연을 착취 가능한 ‘자원’으로 파악하는 합리적 이성과 자연을 자신의 존재론적 태반으로 인식하는 신화적 상상력 사이의 근원적인 갈등. <원령공주>는 인간의 두뇌운동의 구조를 격렬한 갈등과 대립의 형태로 보여주는 미야자키 하야오식 철학의 클라이막스를 보여준다. 바슐라르의 프리즘으로 보면 이 애니메이션은 ‘이미지의 세계’와 ‘개념의 세계’라는 인간의 두 가지 두뇌활동의 근원적인 충돌을 보여주는 거대한 스펙터클이 아닐까. 개념의 세계가 과학주의의 산물이라면, 이미지의 세계는 상상력의 산물이다. 계몽주의의 확산 이후로 끊임없이 ‘합리적 이성의 장애물’로 인식되어왔던 이미지의 세계, 비논리적 상상의 세계, 주관적 몽상의 세계야말로 바슐라르의 필생의 연구 과제였다. 
 

   
 

이미지는 이미지에 의해서만 연구될 수 있다. 몽상 속에서 모여드는 이미지들의 모습 그대로를 꿈꾸면서 말이다. 상상력을 객관적으로 연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난센스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이미지에 대하여 경탄을 할 때만 진정으로 이미지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 이와 같이 이미지와 개념은 인간의 정신활동의 서로 대립되는 두 개의 극을 형성하는데, 그것은 바로 상상력과 이성이다. 이들 사이에는 배척하는 극성이 작용한다. 자장의 극성들과는 공통점이 없다. 그들은 서로 끌어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 밀어낸다. 


 - 바슐라르, <몽상의 시학> 중에서

 
   

 

   이미지를 설명하고 분석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진정한 이미지가 아니다. 이미지는 감성의 차원에서는 실존하지만 논리적으로 재생할 수 없는 상상력의 운동이다. 논리적 분석이나 개념적 규정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이미지를 꿈꾸는 것. 아무런 ‘언어’도 발설하지 않는 토토로에게 우리가 매혹되는 이유 또한 그것일 것이다. 개념적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불가해한 편안함, 분석할 수 없는 치유의 힘,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상상력의 자유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토템적 이미지를 구현하고 있는 토토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토토로의 장수비결은 우리 안의 원시적 야생의 꿈을 일깨우는 토템적 상상력에서 발원한 것이 아닐까. 토토로는 애니메이션 속에서 한 번도 ‘언어’를 발설하지 않는다. 토토로가 뿜어내는 그 푸근함, 그 따뜻함, 그 푹신함만으로 우리는 모든 걸 느낄 수 있다. 그저 떠올리는 것만으로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이 상상의 생명체를 향한 전 세계 팬들의 열광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바슐라르는 ‘사유하는 의식’보다 ‘꿈꾸는 의식’이 훨씬 더 어려운 지적 행위임을 통찰했다. 말하자면 합리적 이성이 ‘쓸모없다’고 몰아세우는 ‘몽상(daydream)’, 인간의 낮 꿈이야말로 의식과 무의식을 연결하는 상상력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상상력은 사유에 따르는 부차적 능력이거나 진정한 사유를 추구하다 남은 쓸모없는 잔여물 같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서구철학은 ‘몽상’ 자체를 사유하지 않음으로써, 몽상을 철학적 사유의 대상에서 배제해버림으로써, ‘사유만을 다시 사유하는’ 쳇바퀴를 돈 것이 아닐까. 사유는 창백한 개념의 시체, 물고 물리는 개념들만의 무의미한 연쇄작용으로 전락해버린 것이 아닐까. 바싹 마른 개념들의 무미건조한 사유의 퍼즐이 아니라, 생생한 촉감과 온도와 빛깔을 지닌 이미지의 세계 속에서, 바슐라르는 문명의 역사에서 배제된, ‘망각된 몽상의 가치’를 발견해냈다.  


   
 

단순한 인상주의와 몽상에 기반을 둔 주관성을 어떻게 구분하느냐 (……) 이 문제에 대한 바슐라르의 대답은 ‘자신에게 충실하기’이다. 인상주의는 사물의 겉만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바슐라르는 몽상을 통하여 사물의 내면을 들여다보기를 원한다. 인상주의는 자신에게 최초로 전달되는 정보를 중요시한다. 그것은 다음 정보를 기다리지 않고 판단을 내린다. 그러나 바슐라르는 최초의 인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최초의 인상이 사라지기를 기다린다. 혜안의 눈을 가진 몽상이 시작되는 것은 이 최초의 인상이 걷힌 다음이다. 인식의 오류를 경계하기 때문이다. 이 혜안은 사물의 깊이를 보고자 하는 눈이다. 몽상가의 혜안은 최초의 경험이 지나간 후라야만 제대로 볼 수가 있다. (……) 문학적 몽상의 활동은 텍스트를 충실하게 다시 읽을 때에만 비로소 시작되기 때문이다. 진정한 문학은 두 번째 독서에 있다고 바슐라르는 말하고 있다.  


 - 홍명희, <상상력과 가스통 바슐라르>, 살림, 2005, 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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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finder 2009-10-22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와, 모노노케 히메. 하야오 선생의 마스터피스죠, 암요~!^^

sotkfkd 2009-10-22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몽상가의 혜안은 최초의 경험이 지나간 후라야만 제대로 볼 수가 있다. 맞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올 겨울은 바쁠 것 같습니다. 영화들을 모두 다 다시 봐야 할 것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