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잃어버린 시간과 되찾은 시간 (1)
 |
|
|
| |
인류 역사에서 우연히 10세기 또는 20세기를 들어낸다 해도 우리가 인간 본성을 인식하는 감각적 방식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손실이 있다면 그것은 그 세기에 탄생하는 것을 봤던, 그러나 더는 볼 수 없는 예술 작품들의 손실이리라.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이 만든 작품에 의해서만 변화하고, 그 작품을 통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 작은 나무를 낳은 목각상처럼 작품들만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들 사이에서 실제로 무엇인가가 일어났음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레비 스트로스, 고봉만 · 유재화 옮김, <보다 듣다 읽다>, 이매진, 2005
|
|
| |
|
 |

마코토는 이모가 일하고 있는 박물관에서 불현듯 눈길을 잡아당기는 그림 한 점을 발견한다. “아! 이 그림……. 이모가 계속 복원하고 있던 거잖아.” 시간의 칼날로 여기 저기 긁히고 마모된 옛 그림을 복원하는 이모의 손길. 그것은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잃어버린 시간을 기약 없이 찾아 헤매는 사람들의 쓸쓸한 뒷모습을 닮았다. 아직 형태와 명암이 온전히 드러나지 않은 희미한 그림은 아스라이 멀어지는 연인의 뒷모습처럼 애잔한 정조를 뿜어낸다. 이모는 소식이 끊인 애인을 기다리는 사람의 표정으로 말한다.
“한참 보고 있다 보면 왠지 마음이 편해져. 작가도 모르고 미술사적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도 아직은 몰라. 하지만 이 그림을 복원하면서 알아낸 게 하나 있어. 몇 백 년 전 큰 전쟁 속에서 그려진 그림이란 거. 세상이 뒤집힐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 천방지축 마코토의 표정도 어느새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다. 영문도 모르는 아련한 그리움에 물든 마코토의 골똘한 표정. 마코토는 전쟁의 포화와 시간의 침식을 견디고 간신히 살아남은 이 그림을 보며 그녀 자신이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고 아직 찾을 생각도 못하고 있는 시간의 그림자를 만나고 있다.

이윽고 마코토는 자신이 잃어버린 시간, 그리고 자신으로 인해 시간을 잃어버릴 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한다. 타임 리프를 하기 전에는 잘 들리지 않았던,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의 잃어버린 시간의 속삭임을. 이모를 만난 다음 날 자원봉사부 학생들이라며 여자 후배들이 마코토를 불러세운다. “마코토 선배! 저희 자원봉사부인데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요즘 고스케 선배랑 늘 같이 계시던데요?” 마코토는 당황한다. 고스케랑 친한 것이 이 친구들과 무슨 관계가 있지? 그러고 보니 후배들의 무리 중에 유난히 한 소녀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다. “선배님들 사귀는 거 맞죠? 사귀시죠? 사귀는 거 맞죠?” 마코토는 어리둥절하고, 한 소녀의 얼굴은 더더욱 붉게 물든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언제부터 이 친구들은 나와 고스케를 감시하고(?) 있었던 걸까.

수줍은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소녀가 드디어 고스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마치 고스케의 마음의 문을 두드려도 되느냐는 허락(?)을 마코토에게 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제가 중학생 때였어요. 저희 할머니가 계신 양로원에 쿠라노세 고등학교 자원봉사부가 왔었는데 할머니는 그 중 한 학생이 아주 맘에 드셔서 그 사람 얘기를 많이 해주셨죠. 참 착하고 멋진 남학생이라면서, 몇 번이고 칭찬을 해주셨는데. 계속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할머니에게서 듣다 보니……. 본 적도 없는 그 사람이 점점 좋아졌어요.” 마코토는 영문도 모른 채 어느새 이 이름 모를 여학생의 사랑 이야기에 푹 빠져 감탄한다. “와, 정말 예쁜 이야기네.” 여학생은 이야기를 계속한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들어와서야 알았어요. 그 사람 이름이 츠다 고스케라는 걸.” “이야,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구나!”
고스케는 그 여학생의 수줍은 고백을 받아주지 않았고, 혹시 마코토와 사귀는 거 아니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도 ‘아니’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새 보니 고스케와 마코토가 매일 단둘이 있는 장면들이 목격되는데, 정말 둘이 사귀는 거 아니냐는, 수다쟁이 소녀들의 속사포 같은 항의가 빗발친다. “분명히 고스케 선배는 마코토 선배랑 사귀는 거 아니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요즘 하는 걸 봐요. 앞뒤가 안 맞잖아요. 딱 부러지게 설명해 보세요.” 마코토는 마치 이 모든 어색한 상황이 자신의 탓이라도 되는 듯이 무한한 사명감으로 불타는 표정이 된다. “자, 잠깐 있어봐. 그래, 무슨 말인지 알았어!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마코토는 마치 정의의 사도라도 된 양 비장한 각오로 타임 리프에 임한다. 이번에는 ‘나만의 즐거움’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에 빠진 한 소녀와 내 친구 고스케를 위한 것이니까, 좀더 멋진 타임 리프의 대의명분이라도 생긴 듯이. 마코토는 또 자신의 몸을 무작정 내던져 타임 리프를 시도한다. 그런데 우리의 마코토는 역시 그 어처구니없는 부주의함 때문에 시간에 대한 무개념을 스스로 폭로하고 만다. “고스케! 너 양로원에서 얘네 할머니를 많이 도와드렸다며? 짜식, 대단한걸!” 그녀가 기억하는 시간 속에는 존재하지만 타인이 기억하는 시간 속에서는 이미 삭제되어버린 시간 속에서 그녀는 순식간에 길을 잃어버린다. 마코토에게 ‘고백한 시간’을 깡그리 말소 당한(!) 이 소녀는 충격으로 비틀거린다. “선배가 우리 할머니를 어떻게 아세요?” “아, 그게……. 볼링장에서 만났는데…….” “우리 할머니는 거동을 전혀 못하세요!”
마코토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또 한 번 타임 리프를 시도하지만 이번에는 고스케에게 엉뚱한 실언을 해서 ‘그들의 시간’에 잘못 개입하는 화를 자초하고 만다. 몇 번이나 타임 리프를 헛되이 써버리고 고스케와 그 소녀 사이를 더욱 어색하게 만들어버린 마코토는 다시 한 번 타임 리프를 이용해 상황을 ‘전면 수정’하고자 마음먹는다. “아, 진짜! 더 근본적인 부분부터 시작해야겠어.” 그녀는 더 깊게 몸을 던져, 더 위험한 타임 리프를 시도한다. 아, 그런데 이번엔 너무 많이 앞으로 돌아와버렸다. 다시 그 전날 아침으로 돌아가버린 것이다.

마코토는 이제 시간의 무분별한 유희를 넘어 시간의 윤리적 책임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말 인간은 시간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을까. 마코토가 돌아가려는 그 시간은 정말 ‘일이 잘못되기 시작한’ 바로 그 근원적인 시작일까. 마코토는 아직 시간이라는 ‘상수’와 주체라는 ‘변수’ 사이에 어떤 일관성 있는 ‘계산 가능한 함수 관계’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아닐까. 마코토가 돌아가려고 하는 그 시간으로 정확히 타임 리프에 성공하면, 정말 ‘배배꼬인 이 모든 욕망의 사슬’을 가지런히 정돈할 수 있을까. 인간의 무한한 지성을 활용하면 정말 인간은 자신들의 손아귀에 시간을 움켜쥘 수 있는 것일까.

 |
|
|
| |
베르그송은 지성이 (마치 영사기가 돌아가기 시작할 때 이미 영화의 결말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미래를 현재 속에 말아 넣음으로써 시간과 자유를 부인했다고 비난했다. (……) 과학자들은 체험된 시간을 측정할 수 있으며, 그렇게 측정된 시간의 간격을 비교하여 변화의 법칙을 도출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틀렸다. 자신의 생을 부채처럼 펼쳐서 한눈에 다 볼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오류인 것처럼.
실제 우리의 생은 시간에 있어서 매우 상이하게 펼쳐진다. 베르그송은 이를 <창조적 진화> 도입부에서 이렇게 표현하였다. “내가 만일 설탕물 한 잔을 준비하고 싶다면 어쨌거나 설탕이 녹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사소한 사실의 중요성은 실로 엄청나다.” 내가 줄곧 기다려야 하는 그 시간은 수학적으로 측정 가능한 간격과는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그 간격은 측정이 이루어지기에 앞서 이미 완성되어 있으며 따라서 내가 살아내야 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내가 체험하는 시간은 ‘나의 마음 졸임’과 합치한다.” 그 기다림이야말로 체험된 시간의 본질을 이루고 나의 자유를 보장한다. 기다림이 없다면 미래는 기지(旣知)의 것처럼 펼쳐질 수 있고 우리는 결정론에 갇히고 만다. 과학은 법칙을 발견하고 미래를 예측하고자 하지만, 인간의 경험은 시간 속에서 사건들이 불확정적으로 연쇄되어 가는 것이다.
- 스티븐 컨, 박성관 역, <시간과 공간의 문화사>, 휴머니스트, 2004, 257~258쪽.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