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질 들뢰즈 ⑦

   

7.  기억을 지배하는 인간  vs  인간을 지배하는 기억 (2)

   
 

 내 상처는 나 이전에 존재했으며, 나는 그것을 체현하려고 태어났다.
 - 조 부스케(Joe Bousquet)

 
   

   영혼의 타임 리프는 ‘부분적으로’ 가능하다. 우리는 매일매일 ‘기억하고 싶은 것’을 더 명료하게 인지하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을 억압하거나 삭제하면서 비공인 타임 리프를 하고 있다. 어떤 시간에 분명히 그곳에 있었는데 완전히 그 시간을 건너뛰어 버린 듯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을 때도 있다. A와 B가 함께 있었는데, A는 그 시간을 생생히 기억하고 B는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 B는 일종의 타임 리프를 한 셈이다. A에게는 분명히 일어났던 사건이 B에게는 전혀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은 것이다. 소개팅에서 만난 상대방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함께 했던 추억을 기억하지 못하는 옛사랑, 함께 나눈 우정의 순간을 깡그리 잊어버린 친구들, 자신이 분명 저지른 일을 기억하지 못하여 타인을 상처 입히는 그 수많은 순간. 
    

   문제는 타임 리프의 가능성 자체가 아니라 기억의 삭제나 리와인드, 리플레이가 아무리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 기억을 ‘편집’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의도만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기억은 매 순간 우리의 의도를 뛰어넘는 곳에서 주체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발적인 운동을 하고 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완전히 잊은 줄만 알고 있었던 기억이 불현듯 떠올라 당황하기도 하고, 그토록 기억이 나지 않던 무언가를 엉뚱한 계기로 갑자기 기억해내기도 한다. 우리 의식에 완전히 기입되지 않은 기억들은 무의식에 슬며시 기록되어 언젠가 도래할 ‘비자발적 기억’을 기다린다.
    이 비자발적 기억이 뒤통수를 치는 바람에 지금까지 순차적으로 진행된 연대기적 시간의 믿음이 깨지기도 하며, 무엇보다도 ‘기억의 재구성’을 통해 ‘사건의 재해석’이 가능해진다. 한때는 그토록 부끄러웠던 기억이 시간이 지나면 아름다운 추억이 되기도 하는 것은 바로 이 비자발적 기억이 꿈틀대는 무의식의 카오스에서 진행된다. 즉 영혼의 타임 리프는 우리 명료한 의식의 등 뒤에서, 즉 무의식의 그림자 위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프루스트는 신발과 할머니에 대한 추억의 경우를 이야기한다. (……) 그러나 이 추억은 우리에게 되찾는 시간의 풍족함을 주는 대신에 고통스러운 소멸을 느끼게 하고, 영원히 잃어버린 시간의 기호를 이룬다. 자기의 신발 쪽으로 몸을 굽혔다가 주인공은 무엇인가 성스러운 것을 느낀다. 그런데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오며, 비자발적인 기억이 죽은 자기 할머니에 대한 비통한 추억을 불러온다. (……) 할머니를 묻은 후 일 년 이상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할머니가 죽었다는 것을…… 할머니를 영원히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 들뢰즈, 서동욱 · 이충민 역, <프루스트와 기호들>, 민음사, 2004, 45쪽.

 
   



   프루스트는 ‘감정의 달력’과 ‘시간의 달력’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응시한다. 상실에 직면하고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상실을 깨닫는 인간의 ‘비자발적 기억’이 가져다주는 치명적인 고통. 마코토 또한 치아키를 잃고 나서야 치아키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두려움에 빠진 스스로를 응시한다. 마코토는 유리와 데이트 중인 치아키로 인해 마음이 복잡해져 멍한 표정으로 기계적인 캐치볼을 하고, 도무지 어떤 일에도 집중을 하지 못한다. 마코토가 그토록 유지하고 싶었던 우정의 삼각형은 흔들리고 있다. 고스케는 치아키 없이 마코토와 둘이서 심드렁하게 캐치볼을 하며 불쑥 마코토의 허를 찌른다. “치아키, 너한테 차여서 유리랑 사귀는 거 아냐?” 고스케는 목격하지도 않은 사건을, 게다가 이미 ‘일어나지 않은 일’로 만들어버린 ‘사라진 사건’을 귀신같이 포착해낸다. 어쩌면 고스케의 무의식에도 마코토를 향한 치아키의 마음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전달되었을지도 모른다. 아직 ‘사건화’되지 않는 우리의 욕망이 너의 무의식, 나의 무의식 안에서 꿈틀거리며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이모는 마코토의 외로움을 걱정해주는 고스케의 마음을 알아채고 이젠 고스케와 사귀지 그러냐고 너스레를 떤다. “마코토 넌 고스케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어려울 때 도와주는 건 늘 고스케였잖아. 사귀지 그래?” 마코토는 어이없다는 듯 이모를 빤히 쳐다본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이모는 빙그레 웃으며 마코토의 ‘시간 놀이’를 살짝 풍자한다. “어차피 아니다 싶으면 시간을 돌려버리면 되니까!” 마코토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든다. “그런 짓은 절대 안 해. 사람 마음을 갖고 노는 거잖아.”
   이모는 마코토에게 질문한다. “그런 나쁜 일은 못하겠니? 일이 잘 안 풀리면 과거를 되돌려버릴 생각으로 지금까지 신나게 놀았잖아.”  마코토는 허를 찔린 듯 깜짝 놀라 이모를 노려본다. “날 그런 눈으로 보고 있었어? 이모는 마녀가 확실해. 우리 이모는 진짜 마녀야.” 이모는 깔깔 웃고 마코토는 상처 입은 듯 씩씩거리며 이모를 흘겨보지만 두 사람 모두 알고 있다. 이제 ‘타임 리프로 인해 매일매일 행복한’ 철없는 마코토 또한 ‘기억 속의 마코토’로 사라져가고 있음을. 더 이상 마코토에게 타임 리프는 매력만점의 놀이기구가 아님을.

 

   
 

모든 사건은 나를 기다린다! (……) 도덕이란 결코 ‘무엇을 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게 아니라, 좋던 싫던 네게 도래하는 것을 네가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시인 조 부스케는 가장 위대한 모럴리스트의 한 사람이다. 부스케는 끔찍한 부상을 입어 몸을 움직일 수 없었던 사람이다. 무엇보다도 그가 말하고 설명하려 한 것은, “이 사건, 나는 그것을 체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의 문제는 말하자면, 사건에 걸맞게 존재하는 것, 그것이었다.  


 - 들뢰즈, 조 부스케의 <달몰이>에 대한 추천사

 
   


댓글(3) 먼댓글(0) 좋아요(4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메로나 2009-10-15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는 내게 일어난 사건에 어울리는 사람일까...가끔 어떤 사건은 내게 일어나기엔 너무 커다란 사건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상처에 걸맞게 존재하기, 흐흠....그것이 존재의 윤리라는?^^

맨손체조 2009-10-15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프루스트, 마들렌, 기억. 타임 리프를 한다고 그 나른한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마들렌을 먹던 느낌을 복원할 수는 없겠죠^^*

sotkfkd 2009-10-16 0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그것을 체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내 전생이 궁금해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