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질 들뢰즈 ⑤

  

4.  크로노스의 시간과 아이온의 시간 (2)

   
 

 신들은 시간을 구별하는 법을 처음 알아낸 사람을 저주한다.
 또한 이곳에 해시계를 세운 사람도 저주한다.
 나의 하루를 마구 깎고 쪼개어
 작은 조각들로 만들었다고!
 어렸을 때 나의 배는 나의 해시계였다.
 어느 누구의 배보다 확실하고 올바르고 정확한 시계였다.
 이 시계는 내게
 밥 먹을 때를 말해줬다.
 하지만 지금은 태양이 허락하지 않으면
 왜, 언제 밥을 먹어야 할지 알 수 없다.
 시내에는 이런 저주스런 해시계들이 가득하다. 


 - 기원전 3세기 후반 로마의 희극작가 플라우투스, 스튜어트 매크리디 엮음, 남경태 역, <시간의 발견>, 휴머니스트, 2002, 145~146쪽.

 
   

   시간이 ‘의식’되는 순간, 시간을 ‘훈련’해야 한다고 느끼는 순간, 인간은 ‘내 몸이 느끼는 시간’의 고유성이 파괴되는 경험을 했다. 인간은 시계를 발명하여 시간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지만 거꾸로 그 ‘발명된 시간’으로 인해 시간에 지배당하는 존재가 되었다. ‘시간표를 지켜야 하니까’ 하고 싶은 일을 억지로 끝내야 하는 모든 순간, 우리는 ‘크로노스의 시간’을 경험하는 셈이다.
   아이온의 시간에서 ‘고정된 현재’란 존재할 수 없다. 현재를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를 줄 세우는 일도 불가능하다. 아이온의 시간은 ‘상태(being)’가 아니라 ‘과정(becoming)’, 고정된 상황이 아니라 끊임없이 사건의 생성 속에서 꿈틀대는 존재의 운동을 가정한다. 시간이 ‘고정된 현재’로 얼어붙는 것을 끊임없이 경계하면서, 시간의 흐름을 과거와 미래로 무한히 열어놓는 시간. 그것이 아이온의 시간이다. 

   근대적 시간관은 개개인의 이질적이고 상이한 시간을 국가의 시간, 학교의 시간, 군대의 시간, 교회의 시간, 회사의 시간, 병원의 시간 등 무수한 ‘집단의 시간’으로 포획하려 한다. 그러나 이 크로노스적 시간에 자신의 신체를 완전히 길들이지 못하는 인간은 매 순간 ‘집단의 시간’과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생체 시간을, 심리적 시간을 느낀다. 우리는 권태를 느낄수록,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할수록, 참을 수 없이 더디게 흘러가는 시간을 느낀다. 직선적 시간의 중력으로 인간을 빨아들이려는 모든 권력, 그것이 바로 크로노스의 시간을 구성한다.
   반대로 영원히 이 순간에 빠져들고 싶은 희열의 시간, 예를 들면 연인과 키스할 때, 우리는 이 순간이 곧 영원으로, 무한한 시간으로 확장되는 듯한 열락에 들뜬다. 굳이 무한을 가정할 필요도 없이 지금 이 순간만으로도 충만한 시간. 지금이 몇 시인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완전히 잊어버리는 망아(忘我)의 상태. 그럴 때 우리의 삶에는 아이온의 시간이 깃든다. 죽음의 위협에 직면했을 때, 인생의 모든 필름이 한꺼번에 돌아가는 듯한 느낌 또한 마찬가지다. 과거-현재-미래를 가르는 인위적 ․ 관습적 경계가 사라지고, 우리가 걸어온 그 모든 불가해한 시간이 이제야 알아볼 수 있을 것만 같은 ‘성좌’를 그릴 때. 우리는 아이온의 시간에 진입한다. 

  

   
 

무한일 필요가 없는 이 시간, 단지 “무한히 분할될 수만” 있으면 되는 이 시간은 어떤 시간일까? 그것은 바로 아이온이다. (……) 과거, 현재, 미래는 하나의 동일한 시간성의 세 부분이 아니다. 그들은 각자가 완전하고 독자적인, 또 시간에서 읽어낼 수 있는 두 측면이다. 한편으로 언제나 한계 지어지는, 원인들로서의 물체들의 활동과 이들의 혼합 상태를 측정하는 현재(크로노스)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결코 한계지어지지 않으며, 효과들로서의 비물체적 사건들을 표면에 모으는 과거와 미래(아이온)가 존재하는 것이다. 


- 들뢰즈, 이정우 역, <의미의 논리>, 한길사, 1999, 136쪽. 

 
   

   타임 리프가 마코토의 삶에 던져준 메시지는 ‘네 맘대로 시간을 요리해보라!’는 단순명료한 계시가 아니라, 시간 자체를 한없이 낯설게 만들어 ‘시간 속의 나’를 사유해보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마코토가 그토록 엄청난 타임 리프 능력을 저토록 ‘사소한 곳’에 써먹는 이유는 그녀의 천진무구한 캐릭터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녀가 그만큼 시간에 대한 ‘무개념’ 상태에 처해 있음을 암시한다.
   태어나서부터 정해진 인종, 국가, 성별 따위의 기계적 정체성처럼 ‘시간’ 또한 그녀 자신에게 당연하고도 선험적인 ‘초기 조건’으로 세팅되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마코토는 자신의 타임 리프로 인해 온통 ‘똘똘 말리는’ 주변 인물들의 상황을 바라보며 그제야 시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은 어떻게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가에 대한 진지한 사유를 난생처음 시도하게 된다. 시간이 단지 조건이나 전제가 아닌 일종의 난해한 기호처럼 사유의 재료로서 마코토 앞에 내던져진 것이다. 

   
 

심리적으로 중요한 감흥을 불러일으키고 중대한 의미를 갖는 시간, 이런 시간들을 현상학적 시간, 또는 아이온(Aion)의 시간이라고 한다. 이러한 시간 안에서 시간 단위들의 선적인 연결은 중요하지 않으며, 사건의 의미들은 항상 잠재적으로 존재한다.
 느림이나 한가로움, 느긋함 등은 이제 낭비와 게으름, 무능력과 동일한 것으로 비난받고 있다. ‘시간은 돈이다’라는 말은 이제 ‘속도는 돈이다’라는 말로 변형되어 우리들의 발걸음과 손놀림, 눈의 움직임과 마음의 움직임을 미덕이 된 속도를 향해 몰아붙이고 있다. (……) 뭔가를 기다리며 하늘 가운데 멈추어 서 있는 매를 본 적이 있는가? (……) 날아보려 한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그것이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것보다 훨씬 힘든 ‘내공’을 요한다는 것을. 떨어지는 것은 속도가 없으며, 단지 중력에 끌려갈 뿐이다. 반면 이렇게 멈추어선 매의 느림은 중력을 이기고, 관성을 이기는 어떤 절대적인 속도를 갖고 있는 것이다.
 (……) 노동이나 이동, 소비, 생활 등의 모든 영역에서 절대적 속도를 갖는 것, 속도의 중력에서 벗어난 외부를 창조하는 것, 강요된 속도나 시간에 벗어난 자율적인 속도와 리듬을 갖는 것, 그리하여 자율주의적인 삶의 리듬, 일의 리듬, 사유의 리듬을 창조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낡은 시간적 형식을 변형시키는 일이며, 자율주의적인 방식으로 새로운 형식의 시간, 새로운 리듬의 시간을 창안하는 것이 될 것이다.  


 - 이진경,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푸른숲, 2002, 76~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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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슨 2009-10-13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배꼽시계만큼 정확한 시계도 없죠~ㅋㅋ 우리 몸속에 저마다 저장되어 있는 멋진 시계들의 입을 틀어막는 못된 자본의 시계들!

sotkfkd 2009-10-13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형식 속으로 잠식되어지는 우리네의 삶! 참 안쓰럽지요. 다만 자, 이제부터라도 최소한의 잠식에 그칠 수 있기에 최선을 다할 것. 즉 나름대로 살아낼 것. 남을 의식하지 말 것, 남에게 보이는 나를 의식하지 말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