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뷰티풀 마인드>와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⑧

 

8. 무의식을 제압하려는 의식 vs 의식의 보호관찰을 거부하는 무의식 (1)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들여다봤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볼 것이기 때문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을 넘어서> 중에서

 정말 참다운 진실은 우리가 악의 상상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악의 상상이 우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 칼 융, <기억, 꿈, 사상> 중에서

 
   

   어쩌면 해답은 존 내쉬가 ‘움켜쥔’ 것이 아니라 그가 ‘버린’ 것들에 있었다. 영화에서는 그가 정신분열증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지나치게 과감히 생략되어 있다. 2시간여의 러닝타임 안에 한 인간의 모든 것을 구겨 넣을 순 없겠지만, 이 ‘생략’에는 어떤 의도적 배제와 은폐의 냄새가 난다. 헐리우드식 감동의 영웅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서 삭제된 부분들은 존 내쉬의 인생을 뒤흔든 치명적인 대목들이다.
    영화에서 생략된 존 내쉬의 결정적인 라이프 스토리는 그가 자신의 첫번째 아들을 사생아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 동성애가 발각되어 랜드 코퍼레이션에서 추방되었다는 것(당시 미국 사회에서 동성애는 심각한 금기사항이었다), 아버지께 사생아의 존재를 숨기다 발각되어 ‘당장 그 여자와 결혼하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무시하고 지내다가 아버지의 임종마저 지키지 못했다는 것, 미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은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수많은 동료가 몰락하는 것을 지켜봤다는 것, 한국전쟁 당시 징병을 피하기 위해 갖은 술수를 동원했다는 것 등이다. 이 모든 일련의 사건들은 존 내쉬의 인생을 뒤흔든 중요한 사실들이었으며, 동시에 존 내쉬가 철저히 ‘외면한’ 삶의 진실들이었다. 

   젊은 시절 내쉬는 자신이 ‘천재’라는 점만으로 스스로의 모든 결점을 보상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기이한 행동과 무책임한 태도가 스스로의 천재성을 미학적으로 완성해준다고 믿었다. 천재에게는 지극히 유연한 ‘똘레랑스’를 발휘하던 미국대학의 상아탑 속에서 그의 믿음은 더욱 강화되었다. 특히 그의 천재성으로 인해 모든 괴상한 행동이 용납되던 랜드 코퍼레이션에서 해고된 사건은 그에게 지울 수 없는 충격을 안겨주었다. 랜드에서 내쉬는 미 공군 비밀취급 인가를 받았고 군사기밀을 쥐락펴락할 수 있다는 사실은 내쉬에게 엄청난 자부심의 근거가 되고 있었다.
   어이없게도 당시 미국 사회에서는 동성애 혐의자(?)의 비밀취급 인가를 금지하고 있었다. ‘각종 범죄행위’와 ‘동성애’는 동급으로 취급되었고 동성애자를 색출(!)하기 위해 산타모니카 경찰서는 은밀히 함정 단속을 할 정도였다. ‘유인책 경찰’을 써서 공중 화장실로 들어가는 남자를 쫓아가 유혹한 후 그 남자가 응낙하면 두번째 경찰이 들이닥쳐 그를 체포하는 식이었다. 내쉬는 바로 그 산타모니카 경찰들에게 동성애성향을 발각당한다. 그는 ‘공개적 외설죄’로 기소되었다. 내쉬에게 그 ‘발각’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해고’였다. 그는 인생 전체를 통틀어 그 누구에게도 ‘배제’되거나 ‘외면’당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남성들과의 친밀한 유대를 중시했고 우정과 사랑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는 모호한 상태를 즐긴 적도 많았다. 그러한 개인적 취향 때문에 자신의 일자리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그의 ‘작고 완전하고 그리하여 안전하던 세계’가 파열되는 첫번째 징후였다. 그는 부모님께 이 사실을 숨겼고 매카시즘의 광풍에 희생당한 MIT 동료의 핑계를 대며 모두가 그 친구 탓이며 자신은 아무런 죄가 없다고 둘러댔다. 내쉬의 체포 소식은 프린스턴과 MIT를 비롯해 수학계 전체의 이슈가 되었고, 동성애에 대한 정부의 가혹한 처사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없었다. 매카시즘의 열풍으로 이미 수많은 사람이 희생당한 직후이기에 ‘호모 공포증’ 또한 널리 퍼져 있었다. ‘정상적인’ 사회의 협박에 불응하는 순간 곧바로 사회적 삶이 끝장난다는 사실을 잔인하게 가르쳐준 것이 바로 매카시즘이었던 것이다. 이 체포와 해고의 충격은 시간이 가면서 점점 치명적인 ‘증상’으로 나타나 내쉬의 인생에 심각한 균열을 일으키게 된다. 체포와 해고라는 인생 초유의 사건은 내쉬가 발병하기 4년 전에 일어났다. 

   
 

내쉬가 겉보기에는 상처받지 않은 것 같지만, 체포 건은 인생의 한 전환점이 되었다. 내쉬는 흔히 초연하고, 야심만만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주 무관심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외톨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관용적인 상아탑 속에서 살면서, 그는 원하는 대로 뭐든 할 수 있다고 믿도록 길들어져 왔다. 그러나 이제 그는 아주 가혹한 방식으로 한 가지 교훈을 얻게 되었다. 그가 추구한 정서적 유대 관계는 그가 소중하게 여긴 다른 모든 것을 파괴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 그의 자유, 그의 경력, 그의 명성, 사회적 성공 등 모든 것을. (……) 단 한 차례의 트라우마보다, 유년과 청소년 시절을 거치며 누적된 사건들이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속담처럼 커다란 긴장을 낳는다. (……) 내쉬가 유년과 청소년 시절에 당했던 괴롭힘과 놀림이 그러했듯, 그 체포의 상처도 시간이 가면서 점점 뚜렷하게 드러났다. 


 - 실비아 네이사, <뷰티풀 마인드>, 승산, 2002, 341쪽. 

 
   

   그의 천재성은 그의 모든 인간적 결점을 은폐하고 사회의 질책으로부터 그의 존재를 보호해주는 심리적 쿠션이었다. 그러나 그가 추구했던 남성들과의 ‘특별한 친밀감’은 그가 지금까지 일구어온 모든 업적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매카시즘과 호모포비아가 결합한 미국 사회의 폐쇄성은 ‘천재를 향한 무한한 관용’조차 무너뜨리는 치명적인 배제의 논리를 구성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가 오랫동안 숨겨오던 내연 관계가 가족들에게 들통나고 그의 연인 엘리너가 낳은 아들 존 데이빗 스티어의 존재가 부모님에게 발각된다. 스캔들을 병적으로 싫어했던 존 내쉬의 아버지는 엘리너와의 결혼을 명령했고 내쉬는 그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그에겐 이미 또 다른 연인 앨리샤가 생겼고 은밀하게 만나는 ‘남자 친구’ 브리커도 있었다. 두 여자와 한 남자 사이를 오가던 내쉬는, 아들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아들의 양육비는 지급할 수 없다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엘리너는 양육비만이라도 지급할 것을 요구했지만, 내쉬는 결혼은 못하겠으니 자기 아들을 ‘입양하자’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여 엘리너를 기함시켰다. 급기야 엘리너가 앨리샤와 함께 있는 내쉬의 모습을 발견하여 ‘엘리너 vs 엘리샤’의 대격돌이 벌어지자 내쉬는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완벽한 내 작은 세계가 파괴됐어. 완벽한 내 작은 세계가 파괴됐어.” 

   그 와중에 내쉬의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전화가 없는 내쉬는 그 소식을 뒤늦게야 접하고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 드리지 못한다. 아들이 아버지가 될 준비가 되었을 때 떠나는 아버지는 없다. 모든 아버지들은 그렇게 불현듯 아들을 떠난다. 남겨진 아들에게 가족들을 떠맡긴 채, 아들에게 제2의 아버지가 될 것을 말없이 요구하며. 그의 작고 안전한 세계가 파열되는 순간 ‘아버지’라는 존재의 토대마저 사라지자 그는 급격한 공포와 불안을 경험한다. 영화는 존 내쉬의 인생을 미화하기 위해 그의 고뇌와 분열의 계기를 첨삭하거나 윤색했다. 그러나 영화가 삭제해버린 내쉬의 각종 실패와 실수야말로 내쉬의 분열증을 격화시킨 것이었고 내쉬의 내쉬다움을 만들어간 것이었으며 ‘작고 완벽한 나만의 세계’가 감당할 수 없는 ‘파도와 해일이 몰아치는 진짜 세상’을 깨닫게 한 사건들이었다. 
 

   게다가 랜드에서 해고된 이후 격추된 그의 사회적 위상은 그에게 심각한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원했던, 이미 따 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던 ‘필즈 상(수학계의 노벨상)’을 받지 못하자 그의 좌절감은 더욱 깊어진다. 그는 너무 빨리 성공했기에 가장 시간에 쫓기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그토록 원했던 모든 것을 이루지 못했다. 하버드나 프린스턴의 교수직도 얻지 못했고 MIT에서도 평판이 안 좋았기 때문에 종신 교수직을 얻지 못했으며 주식투자에서까지 참담한 실패를 맛본다. 서른 살이 되면서 내쉬는 심각한 인지적 불협화음을 겪게 된다. 당시 그의 행동들은 마치 ‘내가 하나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없는 이 세계는 거짓 세계다. 나는 당신들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위대한 미션을 떠맡은 신의 사도다’라고 외치는 것만 같았다.  

   
 

그는 <뉴욕타임즈> 1면 왼쪽 상단의 기사를 가리키며, 말하기 시작했다. 외계에서 온 불가사의한 권력자들이 <뉴욕타임즈>를 통해 자기와 교신을 하고 있다. 그 메시지는 오로지 자기만 보라는 것이기 때문에 암호화되어 있으며, 다른 사람들은 그 메시지를 해독할 수 없다. 오직 자기만이 이 세계의 비밀을 공유하도록 허락되었다.  (……) 내쉬는 MIT 캠퍼스에서 빨간 넥타이를 맨 남자들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 남자들은 자기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 빨간 넥타이를 맨 남자들은 모두 일정한 패턴을 지녔으며, 또한 비밀 공산당과도 관련이 있다.
 (……) 수학과 우편함에는 이상한 편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 그것은 각국 대사들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발신인은 존 내쉬였다. (……) 편지 가운데 주소가 적히지 않은 것도 있었고, 대부분 우표가 붙어 있지 않았다. (……) 내쉬가 세계 정부를 구성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세계정부 구성위원회는 내쉬를 비롯해 수학과의 동료들과 여러 학생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 앨버트는 내쉬에게서 아주 이상한 편지를 받았다. 시카고 대학의 교수직 제의를 거부한다며, 친절한 제의는 고맙지만, 곧 남극의 황제로 부임할 예정이기 때문에 사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 실비아 네이사, <뷰티풀 마인드>, 승산, 2002, 448~4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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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9-30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세계가 깨어지는 순간이 있죠ㅋ 자신의 세계가 깨어져야 진짜 세계를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이제 내쉬는 한층 성숙해지겠군요

eva 2009-10-01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너무 빨리 성공한 사람이 가장 시간에 쫓긴다, 정말 맞는 말인 듯. 매번 자기 자신을 넘어서야 한다는 부담때문에 그렇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