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조셉 캠벨(Joseph Campbell) ⑩

   

 10. 하찮은 흔적에서 빛나는 상징을 읽어내는 자, 그는 승리할지니……

   
 

캠벨: 우리의 진정한 입문의례는, “산타클로스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힌두의 구루의 가르침 속에 있습니다. 산타클로스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이어주는 은유이지요. 관계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체험이 가능하지요. 그러나 산타클로스는 없습니다. 산타클로스는 관계를 인식하는 길로 아이들을 인도하는 하나의 방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본질적으로, 그리고 속성상, 인생은 죽이고 먹음을 통해야 살아지는 무서운 신비의 덩어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 없이 인생을 살겠다고 하는 것, 인생이 원래는 이런 것이 아니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유치한 발상이라고 볼 수 있지요. 
 

모이어스: 조르바는 인생에 대하여, “말썽? 인생이라는 게 어차피 말썽 아닌가”하고 있습니다.  

 -조셉 캠벨, 이윤기 역, <신화의 힘>, 이끌리오, 2002, 132~133쪽.

 
   

   돌아올 기차표가 없는 머나먼 길을 떠나온 센에게, 용으로 변신한 하쿠는 자신의 등을 내어준다. 하쿠의 듬직한 등 위에 올라 하늘로 날아오르는 센. 그녀는 창공을 가르며 날아가는 하쿠의 등허리 위로 펼쳐진 아름다운 밤하늘을 보며 강력한 기시감을 느낀다. 인간의 언어로는 감히 표현할 수 없는 이 황홀한 느낌, 이토록 행복한 느낌을, 어디선가 느껴본 적이 있는 것만 같다. 밤하늘은 거대한 강처럼 느껴지고 나를 등에 태운 하쿠의 이 체온은 내가 분명 느껴본 적이 있는 따스함이다. 아, 그래, 그거였어……. 센은 마음속 깊숙이 둥지를 튼 하쿠의 기억을 드디어 발견해내고 눈물이 그렁해져 고백한다. “하쿠, 엄마한테 들은 얘기야. 기억은 흐리지만. 내가 어렸을 때 강물에 빠졌는데, 그 터에 아파트가 들어섰대. 문득 생각이 났어……. 그 강의 이름이 코하쿠였어……. 네 본명은 코하쿠야…….” 그 순간 하쿠의 몸을 둘러싼 수백만 개의 용의 비늘이 밤하늘을 수놓은 은하수처럼 화르르 흩어지며 하쿠는 소년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하쿠를 겹겹이 옭아매던 가혹한 운명의 사슬이 이제야 벗겨진 것이다. 손을 맞잡고 볼을 비비는 두 사람의 얼굴 위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흩어진다. 

   “치히로! 고마워! 내 진짜 이름은 니기하야미 코하쿠누시야.” 센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온몸으로 웃음 짓는다. “니기하야미 코하쿠누시! 신의 이름처럼 멋져!” 하쿠는 자신도 센의 진짜 이름 치히로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었는지를 생각해낸다. “나도 생각났어. 네가 내 안에 빠진 신발을 주우려고 했었지?” 거대한 아파트가 들어서자 강의 신이었던 ‘하쿠’는 인간 세계에서 퇴출당해야 했고, 하쿠는 자신의 이름도 존재도 잊은 채 마녀의 부하가 되어 살아가야 했던 것이다. 하쿠는 문명이 삼켜버린 자연이었고, 도시가 짓밟은 생명의 입김이었다. 치히로도 기억나기 시작한다. 그녀가 강물에 빠져 죽을 뻔 했을 때, 하쿠는 그녀를 집어삼키지 않고 얕은 곳으로 옮겨 살려주었다는 것을. “맞아, 네가 나를 얕은 곳으로 옮겨줬지.” 내가 누구인지 몰라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었던 하쿠가, 연약한 소녀 센의 목숨을 건 투쟁으로, 자신의 이름을, 자신의 운명을 되찾게 된다.  

   이제 봉인은 풀렸다. 두 사람의 운명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던 운명의 봉인은 센-치히로, 그리고 하쿠의 ‘너와 나를 구분하지 않는’ 운명의 전투로 풀린 것이다. 너를 찾아 떠나는 머나먼 길이 곧 나를 찾는 유일한 열쇠였다. 너를 찾지 못했다면, 너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면, 나는 나의 존재 또한 잃어버렸을 것이다. 센의 영웅적인 면모는 그녀가 헤라클레스처럼 대단한 힘을 가지거나 아테나처럼 출중한 지혜를 가져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개인적인 욕망을 잊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고통과 임무를 피하지 않았다. 마치 ‘자아’라는 정해진 실체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며, 주어진 모든 상황에 자신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내 것을 지켜야 한다’는 애착을 어느새 끊어버린 그녀에게는 이미 두려울 것이 없었다. 센은 강력하고 적극적이며 투사적인 영웅의 전형이 아니라 지극히 내향적이고 수동적으로 보이는 사람의 내면에 숨겨진 엄청난 폭발력, 에너지를 끊임없이 자기 안에 가두어 놓는 내성적 캐릭터 속에 잠재된 정화와 재생, 치유와 배려의 에너지를 보여준다. 심드렁하고 무표정하며 몰개성적으로 보였던 치히로의 얼굴이 어느새 총명하고 매력적인 센의 이미지로 바뀌게 되는 것도, 그녀가 지닌 내면의 폭발력이 ‘육화’된 결과가 아닐까.      

   
 

개인적인 야망을 무화시킨 개인은 살려고 버둥거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닥치건 거기에 몸을 맡겨버린다. 말하자면 익명의 인간,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 무대의상을 입고 있든, 벗고 있든, 배우는 이전의 그 자신이듯이. 


 -조셉 캠벨, 이윤기 역, <세계의 영웅신화>, 대원사, 1996, 234쪽.

 
   

   하쿠와 센은 부푼 가슴을 안고 유바바 온천으로 돌아온다. 유바바는 도끼눈을 뜨고 벼르고 있는 중이다. “아기는 데려왔겠지?” 유바바는 늘 아기방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기만 하던 수퍼베이비가 어느새 씩씩하게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다. “혼자 서다니? 언제부터?” 하쿠는 아기를 무사히 데려왔으니 센을 인간 세계로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간단하게는 안돼. 세상엔 룰이 있는 법!” 유바바는 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지만 수퍼베이비가 엄마를 제지한다. “엄마! 치사한 짓 그만해! 난 무지무지 재미있었어!” 유바바는 자신에게 저항하는 아들의 모습을 처음 보는지라 당혹스럽다. “규칙은 규칙인데……. 안 그러면 저주가 안 풀려!” 수퍼베이비는 단호한 표정으로 엄마를 협박한다. “센을 울리면 엄마를 싫어할 거야!” 유바바는 휘청거린다. “그런 심한 말을!” 그러나 센은 이제 유바바를 겁내지 않는다. 수퍼베이비 ‘보’의 ‘연줄’에 호소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임무를 끝까지 수행하겠다는 표정으로 오히려 아기를 달랜다. “괜찮을 거야. 걱정 마.” 

   유바바는 센의 계약서를 돌려주며 미리 소집해 놓은 수많은 돼지들을 가리킨다. “이 안에서 네 부모를 찾아! 기회는 딱 한 번! 맞히면 너희는 자유야!” 센은 아무리 봐도 똑같이 생긴 돼지들을 유심히 바라보며 엄마, 아빠를 찾아본다. “여기에는…… 엄마, 아빠가 없는 걸요?” 유바바는 흠칫 놀란다. “없어? 그게 대답이냐?” 센은 다시 한 번 결연하게 대답한다. “네!” 유바바는 하는 수 없이 인정한다. “딩동댕! 정답! 성공이야! 정답이야!” 센은 이제 누구의 조언 없이도 주어진 미션을 성공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모두들 고마워요.” 유바바 온천 식구들이 모두 모여 센의 해방을 뛸 듯이 기뻐해준다.
    마녀 유바바의 지휘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굴러가던 군대식 분위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유바바 온천에는 전에 없이 신명나고 활기찬 축제 분위기가 감돈다. 머쓱해진 유바바는 센에게 새침하게 말한다. “네가 이겼어! 빨리 가버려!” 센은 아무런 원망도 남아 있지 않은 얼굴로 오히려 유바바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남긴다. “고맙습니다. 신세 많이 졌어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센의 깊이와 넓이 앞에 유바바의 얼굴에도 어느새 사악한 기운이 사라졌다. 신화적 내러티브의 궁극에서는 결국 ‘적들’의 존재조차 사라지거나 무의미해진다. 적들이야말로 장애물과 싸우는 주인공의 내공 지수를 높이는 최고의 스승이기 때문이다. 원수는 우리의 운명을 조각하는 가장 예리한 칼날이다.

   “모두들 안녕! 고마워요!” 어느새 정든 유바바 온천 사람들과 작별한 센은 하쿠와 함께 엄마, 아빠를 찾으러 간다. 어느덧 하쿠와 헤어질 시간. “난 더 이상 못 가. 온 길로만 쭉 따라가면 돼. 터널을 나갈 때까지 뒤를 돌아보면 안돼.” 하쿠는 센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말한다. “난 유바바의 제자를 그만 둘 거야. 진짜 이름도 되찾았으니까. 나도 원래 세계로 돌아갈 거야.” 둘은 이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자마자 헤어져야 하는 아픔을 견뎌야 한다. “또 만날 수 있지?” “그럼!” “꼭이야!” “뒤돌아보지 말고 얼른 가!” 센은 하쿠와 헤어질 순간이 되자 그토록 탈출하고 싶었던 이곳이 벌써부터 그리워지기 시작한다. 꼭 저 세상으로 돌아가야 할까. 이제야 이곳에 익숙해졌는데, 이제야 내 영혼의 짝을 만났는데. 하지만 뒤돌아보지 않고 떠나라는 메시지를 거절하면, 오르페우스처럼 간신히 구한 아내 에우리디케를 잃게 될 것이고, 소돔을 탈출하던 롯의 아내처럼 소금 기둥이 될지도 모른다. 영웅의 ‘귀환’, 그 마지막 관문은 ‘내가 겪은 이 모든 모험의 희로애락’에 미련을 갖지 않는 것이며,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왔다면 그 뗏목을 불살라버리는 용기다. 
 
   “치히로! 뭐 하는 거니? 어서 와.” 엄마, 아빠의 부름으로 센(신화적 자아)은 어느새 치히로(일상적 자아)로 돌아온다.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 아빠는 철없고 나약하기만 하던 센이 자신들을 구원해준 ‘여신 포스’를 장착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어서 집으로 가자고 야단법석이다. 하쿠의 말대로 뒤돌아보지 않고 걷던 치히로는 터널을 다 통과하고 나서야 터널 저편의 세계, 자신을 삼켰다가 다시 토해낸 저 어두운 심연의 세계를 바라본다. 어떤 언어로도 정리할 수 없는 치히로의 마음을 아름다운 주제가가 대신해주는 듯하다.  

   
 

슬픔은 셀 수 없이 많지만 그 너머에서 분명히 당신과 만날 수 있어. (……) 살아  있는 신비함. 죽어가는 신비함. 꽃도 바람도 도시도 모두 같아. (……) 산산조각으로 깨져 버린 거울 위에도 새로운 풍경이 비춰져 (……) 바다의 저편에서는 이제 찾을 수 없어. 빛나는 것은 언제나 여기에, 내 안에서 찾을 수 있었으니까.

 
   

   저 아련한 노랫말처럼, 우리가 가장 원했던 것은 우리 안에 있다. 천복을 따르는 것은 자기 내부의 소명을 ‘발견’하는 것이지 외부 세계의 ‘정복’이나 외계 생명체의 ‘구원’이 아니다. 조셉 캠벨은 영웅의 마지막 임무는 하계에서 얻은 깨달음을 ‘원래의 세상’ 속에서 ‘재통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센이 된 치히로, 하쿠를 품어 안은 센을 통해 우리 가슴에 스며들어온 신화를 살아내는 것, 그것이 우리의 새로운 미션이 아닐까. 

   미야자키 하야오의 신화적 상상력은 현실을 거부하는 가상현실이 아니라, 현실의 중요성을 박탈하여 현실에서 멀어지는 대체 현실이 아니라, 현실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고, 현실을 더욱 살 만한 것으로 만드는 능동적인 판타지다. 그가 느낀 문명에 대한 절망, 인간에 대한 비애가 아무리 깊고 어두울지라도 그가 허무주의나 패배주의에 결코 길을 내주지 않는 이유도 이 능동적 판타지에 기반한, 지극히 명랑하고 낙천적인 신화적 상상력에 있다. 그는 인간과 자연, 주체와 타자, 죽음과 삶 사이에 놓인 거대한 장벽의 틈새를 포착해낼 힘이 아직 우리 문명사회에 가녀리게, 그러나 분명하게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아티스트다. 그가 창조한 인물들로 인해 우리는 신화로 들어가는, 아직 닫히지 않은 입구가 조금은 남아 있음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아직 완전히 밀폐되지는 않은, 그 가느다란 신화의 입구에서 흘러나오는 실오라기 같은 생명의 햇살을, 미야자키 하야오는 거대한 예술의 마그마로 폭발시킨다.
   우리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인물들이 아직 완전히 ‘통합’하지 못한, 신화와 현실 사이에 놓인 거대한 간극을 메우는 저마다의 ‘비법’을 탐색해야 하지 않을까. 그 ‘비법’은 물론 하루아침에 전수될 수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과학적으로 해명할 수도 없다. 하지만 먼저 간 어진 친구들의 발자국을 따라 우리는 그 비법의 조각난 흔적들을 탐험해볼 수는 있다.

   캠벨은 이 비법을, 신화가 풀어내는 무의식의 비밀을 통해 발견해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세계 각지에 흩어진 신화적 상징과 서사를 수집하고 연구하며 신화에 숨겨진 삶의 비의를 추출했다. 캠벨은 속삭인다. 모든 곳에서 상징을 보라. 죽음을 딛고야 일어서는 삶의 비애를 긍정하라. 삶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이미 주어진 삶의 고통을 부정하지 말라. 타자를 죽이고 그 시체를 먹어야만 살아지는 무서운 신비, 그것이 삶임을 인정하라고. 그리고 타인의 고통에 기쁘게 참여하는 희열, 그것이 신화 속 영웅의 가장 아름다운 본성이라고. 비논리적이라고, 비과학적이라고, 난센스라고 비웃지 말고, 신화를 통해 인류의 잊힌 기억을 하나하나 되짚어보라고.
    괴물을 죽인답시고, 미신을 타파한답시고, 우리 안에 은거하던 소중한 신들까지 죽이지는 말라고. 운명의 미로에서 좌충우돌하며 삶의 신비를 하나씩 걸음마 하며 배웠던 영웅들의 숨 가쁜 호흡을 들어보라고. 신화의 첫번째 기능은, 지금 여기 바로 우리가 존재하는 이곳을 성소(聖所)로 만드는 것이라고. ‘덧없는’ 신화의 ‘명징한’ 물질성을 눈치 챈 사람은, 어디서나 신의 광휘를 보고, 어디서나 신의 축복을 읽어낸다. 우리가 가장 원하는 꿈, 누구에게도 말해보지 못한 수줍은 꿈을, 밤새워 공들여 또박또박 종이 위에 적어보자. 그것이 바로 우리 안의 신화다.  

   
 

어떤 것도, 신(神)조차 우리의 자아보다 더 크지는 않다.
 (……) 한 푼도 없는 나나 당신도 이 땅의 알짜를 구입할 수 있다.
 (……) 어떤 미약한 물건도 우주의 수레바퀴의 중심이 될 수 있다.
 (……) 나는 만물에서 신을 보고 듣지만 조금도 신을 이해하진 못한다.
 (……) 나는 거리에 떨어진 신의 편지들을 본다. 그 하나하나에 신의 서명이 있다.
 나는 그 자리에 놓아둔다. 어디로 가든
 또 다른 편지가 틀림없이 영원토록 올 것을 아는 까닭에. 

- 월트 휘트먼의 詩, <풀잎>(1855)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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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로우북 2009-09-04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문학의 흥미진진한 묘미, 또 그런 인문학을 공부하는 분의 자부심이 느껴지는 멋진 글이네요. 주말을 여는 감동적인 글에 힘을 얻고 갑니다 :)

깃털하나 2009-09-04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센과 하쿠가 부둥켜 안고 우는 장면, 정말 어여뻤지요....마지막 월트 휘트먼의 시가 오랫동안 마음에 여운을 남기네요.

쾌몽 2009-09-04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한 편의 애니메이션에 이렇게 방대한 의미가 담길 수가 있군요. 잘 읽었습니다.

sotkfkd 2009-09-20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조차 우리의 자아보다 크지 않다.

you & I 2009-11-04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거리에 떨어진 신의 편지들을 곳곳에서 보다니, 게다가 어차피 또 올 것이니 집었다가 도로 내려놓다니, 캬~ 멋지구리 합니다그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