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조셉 캠벨(Joseph Campbell) ⑧

   

 8. 원웨이 티켓(one-way ticket)
: 당신은 돌아올 수 없다. 그래도 떠나겠는가? 

   
 

 나를 지나면 슬픔의 도시로 가는 길,
 나를 지나면 영원한 슬픔에 이르는 길,
 나를 지나면 길 잃은 무리 속으로 들어가는 길.
  

- 단테, <지옥편> 중에서

 

 

   
   원웨이 티켓(편도승차권)이라는 말에는 ‘피할 길을 주지 않는 확실한 방법’이라는 뜻이 있다. '원웨이 티켓'의 지배적인 뉘앙스는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떠나야 하는 절박함’이다. 이 단어가 전해주는 피할 수 없는 절박한 느낌과 함께 떠오르는 것은 영웅의 비장미이기도 하다. 영웅의 영웅다움이 완성되는 순간, 그 순간은 그의 능력이 출중해서도 아니고 그의 명예가 하늘을 찔러서도 아니다.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야만 그의 여정이 완성될 때, 뒤돌아보지 않고 떠날 수 있는 결연함, 아무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죽음의 길을 떠나는 초연함. 그것은 언제나 영웅 서사의 비극적 숭고미를 장식하는 화룡점정의 모티브였다. 오물신이 되어버린 강의 신을 ‘정화’시켜 그의 상처를 치유하고, 자신의 이름을 잊어 존재의 의미조차 상실한 하쿠(용)의 운명을 바꾸기까지 한, 10살 소녀 센. 그녀의 신화적 통과의례의 클라이막스도 바로 이 ‘원웨이 티켓’의 운명에 가로놓여 있다. 

   하쿠는 일단 진정이 되었지만 좀처럼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다. 가마 할아범은 “마법의 상처는 방심해선 안돼.”라고 귀띔해준다. 잠든 하쿠를 바라보며 할아범은 하쿠의 과거를 회상한다. 베일에 가려졌던 신비의 소년 하쿠의 과거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하쿠도 센처럼 불쑥 나타나선 마법사가 되고 싶댔어. 난 반대했어. 마녀의 제자가 되어봤자 별수 없다고 말이야. 하지만 소용이 없었어. 돌아갈 곳이 없다며 유바바의 제자가 되어버렸어.” 하쿠는 길 잃은 영웅의 위기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존재다. 비범한 능력과 선한 심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나침반을 찾지 못해 존재 자체가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는 하쿠. “하쿠는 그러던 중 점점 창백해지고 눈매가 사나워졌어.” 센은 다급하다. 하쿠가 훔쳤다는 이 도장만 돌려주면 하쿠를 살릴 수 있지 않을까. “이거 돌려주고 올게요. 사과하고 하쿠를 살려달라고 할래요. 제니바가 있는 곳을 가르쳐줘요.”

    가마 할아범은 불면 날아갈 것 같았던 센의 엄청난 저돌성에 또 한 번 놀란다. 그곳은 사람이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고, 제니바는 무서운 마녀라고, 그곳과의 왕복 교통이 끊긴 지가 오래라고 설명해준다. 그래도 하쿠를 구해야 한다는 센의 흔들림 없는 눈빛에 가마 할아범은 할 수 없이 주섬주섬 기차표를 찾는다. “가는 건 갈 수 있다만 돌아오는 길이 없….” 이때 린이 들어와 유바바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유바바가 길길이 날뛰면서 널 찾아. 그 통 큰 손님은 알고 보니 요괴였어. 유바바는 네가 그를 끌어들였대. 벌써 세 명이나 집어 삼켜버렸어.” 

   사람이든 물건이든 닥치는 대로 탐욕스레 폭식하던 가오나시는 마침내 거대한 괴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때 가마 할아범은 드디어 제니바의 집 쪽으로 가는 열차표를 찾았다고 전해준다. “40년 전에 쓰고 남은 거야. 늪의 바닥이란 역이야. 여섯 번째 역이야. 예전엔 돌아오는 기차도 있었지만 지금은 가는 기차만 있어. 그래도 가겠느냐?”

    이것은 신화 속 영웅에게만 해당되는 순간이 아니다. 인생에서 가장 힘겨운 선택을 해야 할 때 우리 안의 잠재된 힘이 자신도 모르게 솟아오르는 순간, 인생에서 치밀하게 계획되지 않았던 거대한 우연에 봉착하는 순간, 한 번도 예상하지 못했던 두려움과 만나는 순간. 그때가 우리의 영혼이 변신의 문턱을 넘는 순간이다. 
   
 

“우리 안의 더 깊은 힘을 찾아내는 기회는 삶이 가장 힘겹게 느껴질 때 비로소 찾아온다. 삶의 고통과 잔인함에 대한 부정은 결국 삶에 대한 부정이다. 그 모든 것에 ‘예’라고 말할 수 있게 된 후에 우리는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조셉 캠벨, <신화와 인생>, 27쪽

 
   
   센에게도 그 순간이 찾아왔다. 그녀는 굳이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어려운 길을 택한다. 그 길을 가면 엄청난 영광이나 성공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친구 하나를 구할 수 있을 뿐이다. 보장할 수 없는 이익이 전혀 없는데도, 다치거나 죽거나 돌아오지 못할 위험을 무릅쓰고, 그녀는 떠나기로 한다. 떠나기 전 마지막 해야할 일, 그것은 괴물이 된 가오나시를 만나는 것이다. 

   거대한 이빨을 가진 집채만한 괴물로 변해버린 가오나시는 센을 내놓으라며 난동을 부린다. “어딨어? 센을 내놔!” 유바바는 모든 것을 센의 탓으로 돌린다. “왜 이렇게 꾸물거렸어? 손해가 막심하잖아. 기분 좋게 만들어서 금을 짜내.” 욕심쟁이 유바바는 잡아먹힌 사람들의 생사는 안중에도 없고 가오나시에게서 금을 더 뜯어낼 궁리만 한다. 이때 생쥐로 변한 수퍼 베이비가 엄마를 알아보며 눈을 깜빡거리자 유바바는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심술궂게 투덜거린다. “그 더러운 생쥐는 뭐야?” 센은 천하의 유바바가 설마 자기 아들을 못 알아볼까 의심한다. “모르시겠어요?” 유바바는 손사레를 친다. “알 턱이 있나! 징그러워!” 자신의 몸뚱이 하나 건사하지 못했던 여린 소녀 치히로는 어느새 ‘적의 아들’까지 건사해야 할 판이다. 아무도 돌보지 못했던 그녀가 누군가를 돌보고 살리고 치유하는 존재가 된다. 가오나시를 방 안에 가둔 유바바는 센을 혼자 들여보내 독대시킨다. 

   가오나시의 풍채와 비교하면 백분의 일도 안 될 것 같은 센은 주눅들지 않고 조용히 묻는다. “말해 봐. 넌 어디서 왔어? 난 가야할 데가 있어.” 가오나시는 무조건 센이 좋다고, 센을 갖고 싶다고 중얼거릴 뿐이다. “네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 너한텐 내가 원하는 게 없어. 집은 어디야? 아빠, 엄마는 있지?” 커다란 가오나시는 어울리지 않는 투정을 부린다. “싫어, 싫어! 난 외로워!” “집을 모르는 거야?” “센을 갖고 싶어” 가오나시의 욕구는 지극히 단순하다. “갖고 싶다. 갖고 싶다. 센, 갖고 싶다. 먹고 싶다. 먹고 싶다. 센, 먹고 싶다.” 센은 하쿠를 먹이고 남은 경단을 떠올린다. “나를 먹을 거면 먼저 이걸 먹어. 부모님께 드릴 건데 너 줄게.” 사랑하지 않는 대상에게도, 자신을 괴롭히는 대상에게까지도, 센은 부모님을 살릴 수 있는 경단을 준다. 경단을 먹은 순간 가오나시의 입에서는 그동안 게걸스레 먹어치운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튀어나온다.

    모두가 기피하는 더러움을 껴안고 그 존재로부터 더러움을 토해내게 하는, ‘구토와 정화’의 모티브는 어느새 센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그리고 이 구토와 정화야말로 ‘800만 신들이 모여 목욕을 하는 유바바 온천’ 본연의 소명에 가장 어울리는 행위가 아닐까. 가오나시와 오물신으로 대변되는 과잉과 폭식, 더러움과 그로테스크함은 단지 그들 개인의 ‘오명’이 아니라 인간이 저버린 자연의 은유이면서 동시에 토해내야 할 만큼 폭식하고 소비하고 낭비해온 자본주의사회의 인간 자신의 은유이기도 하다. 우리의 가오나시는 다시 ‘슬림한’ 옛 모습을 찾고 소리 없이 센을 따르는 조용한 오타쿠적 면모(?)를 되찾게 되었다. 센은 비로소 마음 편하게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부모님을 구할 수 있는 경단은 없어졌고, 센은 삶을 위해 죽음의 영토를 통과하는 영웅의 마지막 문턱을 넘어야 한다. 작은 생쥐가 되어버린 수퍼베이비와 얼굴 없는 귀신 가오나시를 여행의 동반자로 삼아. 

   에로스의 사랑과 아프로디테의 허락을 얻기 위해 페르세포네가 살고 있는 하데스로 떠나는 프시케처럼,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살려내기 위해 하데스로 내려간 오르페우스처럼,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죽음 저편의 세계로 센은 기약 없는 여행을 떠난다. 그곳으로 떠나가는 기차표는 오직 원웨이 티켓일 뿐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돌아오는 길이 없을 것을 겁내지 않는다. 하쿠를 친친 동여매고 있는 가혹한 운명의 사슬을 풀어주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 그 공포가 그녀를 사로잡은 나머지 그녀는 괴물이 된 가오나시도, 자신을 협박하는 유바바도, 돌아올 길이 없는 원웨이 티켓도 두렵지 않다. 자신을 괴롭힌 수퍼베이비와 자신을 스토킹한 가오나시까지 여행의 동반자로 삼은 센의 따스함, 그것은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전혀 알지 못하는 자가 자신도 모르게 실현하는 우정이다. 그녀의 적들은 어느새 그녀의 친구가 된다. 그리스 신화의 스틱스 강처럼 되돌릴 수 없는 운명의 짐을 짊어지고, 저기 길 떠나는 소녀의 처연한 뒷모습은 시리도록 아름답다.

   
 

추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신을 발견할 것이고, 남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일 것이며,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던 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외로우리라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세계와 함께 하게 될 것이다.  


- 조셉 캠벨, 이윤기 역, <세계의 영웅신화>, 1996, 대원사, 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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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체조 2009-09-02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센의 처연한 뒷모습만 시리도록 아름다운 게 아니라, 여울님의 글도 그래요. 마지막 문장과 이미지를 보며, 울, 컥,,,,,

도란도란 2009-09-02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센과 치히로 내용에 집중해서 읽고 있었는데, 이제는 조셉 캠벨의 책이 읽고 싶어집니다. "우리안의 더 깊은 힘을 찾아내는 기회는 삶이 가장 힘겹게 느껴질 때 찾아온다."

doingnow12 2009-09-10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마할아범한테 줄 수 있는 목욕패(?)가 저한테도 몇개있음 얼마나 좋을까요?ㅋㅋ 영화를 보면서 저도 저렇게 속시원하게 씻었으면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나요..ㅋㅋ멋진글 잘 읽었습니당

sotkfkd 2009-09-13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센이 곧 영웅! 센에게는 추호도 영웅이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으므로 그래서 곧 영웅! 잘 읽엇습니다.
조셉 켐밸을 다시 공부하고 싶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