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굿 윌 헌팅>과 수전 손택 - ⑩

 

10. 네 잘못이 아니야(It’s not your fault)……  

 

   이제 윌과 숀의 심리 상담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스물한 살이 된 윌은 아직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했다. 그러나 평생 그의 인생을 밝혀줄 소중한 멘토를 얻었다. 숀으로 인해 윌은 자신의 빛을 가리고 있던 어둠의 실체와 대면했다. 윌의 고통은 단지 과거의 상처들만이 아니었다. 윌의 미래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바로 ‘내가 고통의 근원이다’라는 죄책감이었다. 그는 자신이 가는 곳마다 잇따라 일어나는 불행의 씨앗이 바로 자신의 존재 자체에서 우러나오는 어둠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자신의 인생을 내팽개치고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자신을 떠나도록 방치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불행의 원인을 설명할 수 없는 무력감, 그것은 ‘모든 게 내 탓이다’ 혹은 ‘나는 저주받은 존재다’라는 치명적인 죄책감을 낳았다. 숀은 그런 윌의 자책감을 알고 있다. 숀은 자신의 과거 또한 윌과 비슷한 상처로 얼룩져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윌도 처음으로 스스로의 상처를 담담하게 고백하기 시작한다. 

 

   숀 : 아버지가 알코올중독이셨다. 늘 고주망태였지. 완전히 술에 찌들어서, 두들겨 팰 사람을 찾곤 했지. 난 엄마와 동생이 맞지 않게 하려고 먼저 덤볐지. 반지를 끼고 계신 날이면 더 볼만했어.
   윌 : 그 남자는…… 늘 탁자에 렌치와 각목과 혁대를 늘어놓고는, 절더러 선택하라고 했죠.
   숀 : 나 같으면…… 혁대로 하겠다.
   윌 : 전 렌치를 택하곤 했어요.
   숀 : 왜?
   윌 :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심정이었죠.
   숀 : 네 양부였니?
   윌 : 네……. 제 평가 결과는 어때요? 애정 결핍 같은 건가요?
   숀 : 이 기록들…… 모두 다 헛소리야. 네 잘못이 아냐.
   윌 : 알아요.
   숀 :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봐. 네 잘못이 아니야.
   윌 : 알아요.
   숀 : (숀은 윌의 내장기관까지 다 뚫어버릴 듯한 깊은 눈빛으로 윌을 바라보며 다시금 힘주어 말한다) 네 잘못이 아냐.
   윌 : 안다고요!
   숀 : (숀은 점점 윌을 벽 쪽으로 몰아세운다) 아냐, 넌 몰라. 네 잘못이 아니다.
   윌 : (윌은 숀의 집요한 반복에 분노와 공포를 동시에 느낀다) 안다니까요!
   숀 : (다시금 소름끼치도록 차분한 목소리로, 같은 문장이지만 매번 다른 울림으로 윌에게 다가간다) 네 잘못이 아냐.
   윌 : (감정이 폭발하며) 알았으니까 성질나게 하지 말라구요!
   숀 : 네 잘못이 아니야.
   윌 : (이제는 절규하는 윌) 제발, 성질나게 하지 말란 말이에요. 선생님만이라도!  

   숀 : (숀은 여전히 놀라우리만큼 차분한 목소리로 같지만 다른 이야기를 한다. 네가 죄책감에서 빠져나오지 않으면 평생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을, 숀은 이 짧은 문장으로 대신하는 듯하다) 네 잘못이 아니었어. 네 잘못이 아냐.
   윌 : (윌은 그제야 숀의 메시지를 알아듣고, 처음으로 울어버린다. 그리고 숀에게 안겨서 마음껏 운다) 젠장, 정말 죄송해요.
   윌 : (윌을 힘껏 품에 안으며) 다 잊어버려.

   내가 나를 해치지 않는 한 아무도 나를 해칠 수 없다. 인간을 분석하는 그 어떤 이론도 살아 있는 인간의 상처에 완전히 다다를 수는 없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성실한 ‘개입’은 연민이나 분석, 해부나 비판이 아니라 다만 가만히 서로의 존재에 스미고 번지는 ‘행위’를 통해 천천히 일어난다. 겹겹이 쌓인 위악의 제스처들, 그 두터운 연기력의 각질을 벗겨내면, 윌의  상처의 뿌리, ‘죄책감’이 놓여 있다. 나는 재수 없는 아이, 내가 닿는 모든 것은 다치고 상하고 무너질 것이라는 불안. 어쩌면 처음부터 모든 것이 내 탓일지도 모른다는 근원적인 죄의식. 그곳을 향해 숀은 매번 다른 울림으로 번지는 주술적 언어, ‘네 잘못이 아니야!’로 다가갔다. 그 뿌리 깊은 죄의식을 떨쳐버리는 순간, 윌은 자유가 된다. 더 이상 심리 상담 같은 건 필요 없어진다. 상담 마지막 날, 윌은 자신이 ‘치료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배우려 하지 않던 이 오만한 청년은, 태어나 처음으로 선생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게다가 그토록 윌의 취직을 바라던 램보 교수가 소개해준 굴지의 회사 ‘맥닐 사’에 입사하기로 결정한다. 드디어 윌은 자신의 천재적 재능을 발휘할 멋진 직장을 찾은 것이다.     

   윌 : 이걸로 끝인가요? 치료는 끝난 거예요?
   숀 : 그래. 넌 완치됐어. 이제 자유야.  
   윌 : 저기, 선생님께 정말…….
   숀 : 말 안 해도 알아. 네 마음을 따라 가렴. 그럼 괜찮을 거야. 
    

   윌은 부모도 형제도 없지만 그 어떤 부모 형제와도 바꿀 수 없는 친구 처키가 있음을 깨달았다. 사랑이라는 사슬로 자식을 옥죄는 부모가 아니라, 우정이라는 빛으로 친구의 어둠을 밝히는 처키와 그 일당들. 그들은 윌의 스물한 살 생일 선물로 자동차를 선물해준다. “축하한다, 짜샤!” 돈 없는 친구들이 여기저기 버려진 부속품들을 모아 뚝딱뚝딱 정성 들여 만든, ‘빈티지’형 자동차를 보며 윌은 자신이 이토록 큰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돈으로 살 수도 다시 기억하여 만들 수도 없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윌 헌팅 표 DIY 자동차. “나하고 빌리하고 부속을 모으고 모건이 매일 구걸을 좀 했지. 빌리하고 내가 엔진을 새로 만들었어. 스물한 살 생일 축하한다.” 태어나서 이렇게 못생긴 차는 처음 본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윌의 얼굴에 문신처럼 새겨져 있던 덧없는 우울의 표정이 어느덧 완전히 걷혀 있다.  

   다음 날 아침, 처키는 여느 때처럼 어슬렁거리며 고물 자동차를 끌고 윌의 집으로 간다. 헤이, 윌, 어서 나와! 쿵쿵쿵!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늘 졸린 눈을 비비며 건들건들 처키를 향해 다가오던 윌이 보이지 않는다. 처키는 놀라움과 상실감이 복잡하게 얽힌 얼굴로 윌의 텅 빈 방을 바라본다. 이제 정말 내 소원이 이루어졌구나. 윌은 기별도 예고도 없이 떠났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던 윌이 드디어 내 소원을 들어주었다. 이제 윌을 볼 수 없지만 행복하다. 처키는 만족스러운 듯, 슬픔 따위는 이미 날려버린 듯, 여유롭게 웃으며 차에 탄다.

   한편, 골치 아픈 제자와의 아름다운 만남을 뒤로 하고 오랜만에 여행을 떠나려던 숀은 우편함에 꽂혀 있는 쪽지를 발견한다.

 “선생님. 램보 교수님이 제 일자리 때문에 전화하시면, 죄송하다고 전해주세요. 꼭 잡아야 할 여자가 있거든요!”

   윌은 젊은 시절의 숀을 제법 그럴 듯하게 흉내낸 것이다. 첫눈에 반한 여자를 잡기 위해 역사상 최고의 야구 시합 입장권을 날려버린 숀의 로맨틱한 정신을 계승한 윌의 편지를 보며, 숀은 투덜거린다. “망할 자식, 감히 내 흉내를 내다니!” 숀은 그제야 모든 걱정을 덜어놓은 듯 행복한 표정이다. 윌은 멋진 직장으로의 취직을 포기하고, 스카일라를 찾아 떠난다. 취직은 언제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에 치명상을 입고 홀로 떠난 연인 스카일라는 다시는 잡을 수 없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스스로 자폐를 선택한 천재 소년 윌 헌팅은 이제야 가장 중요한 것을 발견한다. 풀 패키지로 세팅되어 있는 완전한 사랑에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두 사람이 만나 미래의 불안정함을 함께 견디는 것, 다만 둘이 함께 ‘시작’한다는 것이 소중한 일임을. 윌의 고물 DIY 자동차가 고속도로를 상쾌하게 활주하며 영화는  끝난다.

   수전 손택은 고통받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구호물자만이 아님을 강조했다.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삶을 버티는 희망을 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평소처럼’ 사랑하고, ‘아주 좋은 시절처럼’ 꿈꿀 수 있는 문화적 인프라가 필요하다. 단지 의식주뿐 아니라 아름다운 것, 즐거운 것, 감동적인 것을 꿈꿀 권리가 필요하다. 수전 손택이 감행했던 어떤 날카로운 평론보다 매혹적인 ‘평론 활동’은,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던 사라예보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출했던 일이었다. 모두가 의심스런 눈초리로 수전 손택에게 물었다. 언제 폭탄이 떨어져 죽을지도 모르는 곳에서, 연극이 가당키나 하겠냐고. 게다가 슬픔을 잊을 만한 유쾌한 공연도 아니고, <고도를 기다리며>라니, 너무 우울하지 않냐고. 도대체 사람들이 연극을 보러 오기는 하겠냐고. 수전 손택은 이렇게 대답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폭격으로 망가진 사라예보의 이미지만 생각하느라, 사라예보가 과거에 활기 넘치고 매력적인 수도였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듯하다. (……) 재능 있는 배우들이 여전히 사라예보에 있듯이 교양 있는 관객들도 여전히 사라예보에 있다. 단지 과거와 차이가 있다면, 배우들과 관객들이 극장을 오가다 폭격을 맞거나 총격을 당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현관 밖을 나섰을 때뿐만 아니라, 침실에서 잠을 잘 때, 부엌에 뭔가를 가지러 갈 때에도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수전 손택, 김유경 역, <강조해야 할 것>, 시울, 2006, 407~408쪽.

 
   

   그녀는 오래전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흡사 사라예보를 위해, 사라예보를 향해 창작된 듯한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출하며 사라예보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다. 물도 없고 화장실도 고장난 열악한 상황에서, 매일 폭탄 소리를 들으면서도, 언제 우리가 공연 중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도, 고도를 기다릴 수 있는 자유, 예술을 만끽할 수 있는 자유, ‘우리가 혼자가 아님’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자유를, 사라예보 사람들은 생면부지의 뉴욕 비평가와 함께했다. 그녀는 전쟁의 고통에 빠진 사람들이 모두 현실도피적인 오락물만을 원할 것이라는 통념과 싸웠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사라예보 사람들도 자신이 처한 현실을 예술로 변형하고 확인하는 것에서 오히려 힘과 위안을 얻는다.” (위의 책, 409쪽) 전쟁이 일어나도, 내 옆의 사람이 죽어가도, 우리는 살아야 하고, 살아 있다는 것을 가장 뜨겁게 확인하는 길은, 단지 우리가 먹고 입고 싸는 동물만이 아님을 깨닫는 일은, ‘예술’과 함께하는 일임을, 수전 손택은 온몸으로 증명했다.

   
 

문화, 특히 진지한 문화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사라예보 사람들이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 존엄성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 (……) 예를 들면 화장실이 오물통이 되지 않도록 변기에 물이 나오게 하는 데 거의 하루 종일 매달리면서 굴욕감을 느끼는 것이다.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공공장소로 가서 줄을 서 떠온 물을 이런 식으로 쓰는 것이다. 이런 굴욕감은 공포보다 훨씬 클 수도 있다.
연극을 무대에 올린다는 것은 사라예보의 연극관계자들에게는 큰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도 해왔던 일을 계속한다는, 즉 자신들이 정상으로 되돌아간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고작 물 긷는 사람이나 인도주의적 원조를 받는 수동적인 사람이 아닌 것이다. 실제로 사라예보에서는 자신의 일을 계속 하는 사람을 가장 운 좋은 사람이라고 여긴다.  (……) 그런 상황 속에서도 나와 배우들은 월급을 받지 않았다. 다른 연극인들도 기꺼이 우리 리허설에 참석하곤 했는데, 이것은 단순히 우리의 작품을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매일 극장에 간다는 사실이 좋아서였다.
연극을 공연한다는 것은 하찮은 일이 아니라 오히려 정상성을 표현하는 즐거운 일인 셈이다. 
 

-위의 책, 412~413쪽.

 
   


   월급은 꿈도 꾸지 못하고, 조명도 화장실도 물도 없는 무대에서, 배우가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으며, 호텔 식당 쓰레기통을 뒤져 빵을 찾아내 스텝들과 나눠 먹으며, 고도나 클린턴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오지 않는 소품을 기다리며, 수전 손택은 공연을 성공적으로 끝냈다.

   
 

문학은 우리 아닌 다른 사람들이나 우리의 문제 아닌 다른 문제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능력을 길러주고, 발휘하도록 해줄 수 있습니다. 우리 아닌 다른 사람이나 우리의 문제 아닌 다른 문제에 감응할 능력이 없다면,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겠습니까? 아주 잠깐만이라도 우리 자신을 잊을 능력이 없다면,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겠습니까?  


-수전 손택, 이재원 역,<타인의 고통>, 2004, 208쪽.

 
   

   내 몸의 고통이 아닌 타인의 고통을 앓는다는 것. 그것은 연민이나 동정이나 분석이나 평가가 아니라, 그들 삶을 향한 완전한 몰입, 나를 잊어 너를 꿈꾸는 절실함이다. 아무런 ‘실용성’이 없지만, 나 아닌 타자의 욕망을 상상하게 만드는 공감의 장치, 내가 아닌 타자의 삶을 살아내는 망아(忘我)의 탈주. 그것이 예술의 힘 아닐까. 수잔 손택은 『문학은 자유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학은 이 모든 불운의 감옥에서 탈주하여 자유의 공간으로 진입할 수 있는 여권이라고. “문학, 그것도 세계 문학에 다가간다는 것은 국가적 허영심, 속물 근성, 강제적인 편협성, 어리석은 교육, 불완전한 운명, 불운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난다는 것이었습니다. 문학은 광활한 현실로, 즉 자유의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여권이었습니다. 문학은 자유였습니다. 특히 독서와 내면의 가치가 엄청난 도전을 받고 있는 이 시대에도 문학은 자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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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체조 2009-08-21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게도 그런 '여권'을 보내주세요, 여울님^^*

루비 2009-08-23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친구들이 만들어준 DIY 자동차, 완전 뭉클했지요. 윌에겐 그 고물자동차가 광활한 현실로 들어가는 멋진 여권....

기름종이 2009-08-24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익후, 이 영화 한 번 봐야겠네요. 줄거리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끼쳐.;; 재밌을 듯.

sotkfkd 2009-09-13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은 자유이다.
감동적입니다.
우리들의 모든 처키를 위해서 감사의 기도를!
잘 읽었습니다.

프라푸치노 2009-10-06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불운의 감옥에서 탈주하여 자유의 공간으로 떠날 수 있는 여권! 가슴이 마구마구 뜨거워집니다. 콩당콩당 두근두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