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순수의 시대>와 피에르 부르디외 - 마지막회

 

10. 무한미디어 사회의 구별짓기하다


   몸은 살아 있는 문화의 블랙박스다. 몸은 한 개인이 흡수해온 모든 문화적 기호의 집결체다. 이제 현대인은 상대방의 피부 상태를 보고 ‘나이’를 짐작하기보다는 그의 ‘계급’을 짐작한다. 차이의 생산을 통해 차별화되는 신체 이미지들. 눈길 한 번으로 상대방의 계급을 휘리릭 ‘스캐닝’하는 경이로운 독심술이 가능해졌다. 명품 화장품, 명품 의류, 고급 피트니스 클럽 회원권 등의 소비상품은 상층문화의 ‘다름’을 구별짓기하는 기호들인 것이다. ‘나태한’ 몸은 게으름과 가난의 상징이며, ‘바람직한 몸’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문화적 패스포트가 되었다.

   몸에 의해 해석되는 인간으로 전락하는 현대인들. 몸이라는 취향과 계급의 전시장을 화려하게 디스플레이하지 못하면 금세 ‘루저’ 취급을 받는다. 아니, 누가 특별히 그렇게 하지 않아도 스스로를 ‘루저’로 단죄한다. 김애란의 소설 「성탄특선」은 단지 크리스마스 데이트 때 입고 나갈 옷이 없다는 이유로 남친에게 연락도 없이 시골집에 내려가버린 20대 여성의 심리를 묘사한다.

   
  학비를 모은 뒤 남은 돈으로 멋을 부려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블라우스를 사고 나면 그에 어울리는 치마가 없고, 치마를 사고 나면 신발이 없었다. 여자의 옷차림은 스카프를 둘러맨 오리처럼 어정쩡한 구석이 있었다. 여자는 그 사실을 모르고 한동안 새로 산 치마 한 벌에도 기분이 좋아, 온종일 혼자만의 자신감에 휩싸여 캠퍼스를 날아다니곤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여자는 알게 되었다. 세련됨이란 한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며, 오랜 소비 경험과 안목, 소품의 자연스러운 조화에서 나온다는 것을. 옷을 ‘잘’ 입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잘’ 입기 위해 감각만큼 필요한 것은 생활의 여유라는 것을. 스물한 살 여자는 남자에게 예뻐 보이고 싶었다. 그것은 허영심이기 전에 소박한 순정이었다. 그리하여 크리스마스 날, 남자가 여자의 옷맵시를 한 번도 비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입을 옷이 변변찮단 이유로 도망쳐버린 것이었다. 그날 혼자 소주를 마셨던 남자는 여자가 잠적한 까닭을 지금까지 모르고 있다.

- 김애란, 「성탄특선」, <침이 고인다>, 문학과지성사, 2007, 91~92쪽.
 
   

   세련된 옷맵시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 남친에게 예뻐 보이고 싶은 소박한 본능조차 충족시킬 수 없다는 절망. 친구의 결혼식을 앞두고 옷장 앞에서 좌절해본 모든 여성들은, ‘잘 빠진’ 짝퉁 가방 앞에서 몇 번이나 지갑을 만지작거리며 망설여본 적 있는 여성들은, 소설 속 이 여자의 말 못할 아픔을 이해할 것이다.

   <순수의 시대>는 자신들의 순수를 지키기 위해 언제나 타자의 침입을 경계하는 귀족공동체의 승리를, 메이‘들’의 승리를 보여준다. 이들은 보이지 않는 도착적 폭력으로 공동체의 순수를 엄호한다. 메이가 누리는 화려한 귀족풍의 의상과 웅장한 인테리어는 ‘우리’의 범주에서 그 어떤 일탈도 수용하지 않겠다는, 타자에 대한 위협과 협박의 제스처다. 엘렌의 환영만찬을 집단 보이콧했던 그들이 엘렌을 추방하기 위한 환송만찬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것도 그들만의 순수를 사수하는 방식이다. 메이가 자아내는 티 없이 고운 순수의 이면에는 언제 ‘자기 것’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신경증적 공포가 자리하고 있다.
   뉴랜드는 아내가 죽어야 자신이 자유로워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과연 그랬을까. 시간이 흘러 뉴랜드가 57살이 되고 메이가 죽었을 때 뉴랜드는 아들의 권유로 프랑스 여행을 떠나게 된다. 여전히 파리에서 혼자 살고 있는 엘렌의 소식을 들었을 때 뉴랜드의 마음은 또다시 흔들린다. 이제 그와 엘렌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아들이 어머니의 유언을 전해준다. “어머니는 걱정할 게 없다고 하셨어요. 왜냐하면 어머니의 부탁으로 아버지는 원하는 모든 걸 포기했다고 하셨거든요.” 뉴랜드는 아들의 사탕발림에 넘어간다. “누군가가 자신을 이해해준다는 게 매우 큰 안도감을 가져다주었고 그의 희생을 아내가 이해했다는 데 크게 감동했다.” 

   뉴랜드는 아내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드리워놓은 감성의 그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뉴랜드는 엘렌의 집 앞에서 그녀의 집 창문을 물끄러미 바라다본다. “올라가는 것보다 여기 있는 편이 더 현실 같군.” 이것은 가장 뉴랜드다운 방식이다. 환상 속에서 가장 행복한 인간, 뉴랜드는 환상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현실의 기쁨을 희생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 인간이므로. 메이는 죽어서까지 그를 ‘메이의 커뮤니티’로 묶어둔다. 그가 메이의 이해에 감동받았다는 것, 그것은 그가 뉴욕 사교계의 아비투스를 드디어 완벽히 ‘자기화’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그토록 숨 막혀 하던 ‘메이의 아비투스’를 마침내 자신의 내면의 세포로 ‘장기이식’시키는 데 성공한 것은 아닐까.  

   부르디외의 탁월함은 ‘주관적인 감정’까지 ‘아비투스’의 영역에 포함시켰던 것이다. 감정도 제도적인 차원에서 일종의 능력이며, 감정이 자아 정체성 형성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엘렌이 고상한 귀족의 으리으리한 저택을 보며 ‘우중충하다’고 느끼는 감정 자체가 메이에게는 ‘불경’한 감정이며 뉴랜드에게는 ‘충격적’인 감정이다. 개인의 흥분이나 동정심, 말할 수 없는 무의식까지도 감정의 사회학적 정의에 포함되기 때문에 이데올로기 분석이 놓치는 개개인의 ‘말할 수 없는 욕망’, ‘표현되지 않는 욕망’까지 상징적 권력의 동력으로 다룰 수 있게 된다.
   부르디외는 상징적 권력이란 세계를 만드는 권력이라 말한다. 즉, 남자/여자 높은/낮은 힘센/연약한 등등, 강자와 약자를 가루는 모든 대립항이 사회에 대한 인식을 결정하고 세계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징적 권력은 집단적 ‘호명’을 통해 공고화된다. 알파걸, 엄친딸/엄친아, 강부자, 고소영 등 기득권을 상징하는 각종 별명은 그렇지 못한 자들에 대한 배제와 차별의 권력으로 기능한다.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 88만원세대(88만원 받는 신입사원), 장미족(장기간 미취업족), 사오정(45세 정년퇴직), 삼팔선(38세에 은퇴), 토폐인(토익 공부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 공시족(공무원시험 준비족), 취집(취업 대신 시집가기), 대오족(대학5학년생, 졸업을 미루는 학생)……. 이 모든 약자의 호명 또한 강자와 약자를 가르는 사회의 상징적 권력을 공고화한다. 이러한 구별짓기의 문화권력은 민주주의 사회가 지속될수록 견고해진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시너지효과를 일으킬 때, 누구나 개인의 노력을 통해 부르주아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퍼질 때, 허리가 휘어지게 대출을 받아서라도 아파트를 사놓으면 집값이 두 배 세 배로 뛸 것이라는 환상이 ‘대중화’될 때, ‘구별짓기’의 문화적 파장은 더욱 사회 깊숙이 내면화된다.

   우리는 아비투스의 그물망이 조종하는 대로 투표한다. 우리는 모든 선거가 자유로운 유권자의 선택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 과정은 전혀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아비투스의 그물들이 우리의 신체를, 의식을, 무의식까지도 쥐고 흔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노동자 계층이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기현상이 일어나는 것조차도 그들의 문화적 선택이 지배계급의 논리에 따라 ‘규격화’된 현상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계급 착시’가 아닐까.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이론은 바로 인간의 육체를 통해 전달되는 권력 효과를 증명하는 개념이다. 단지 보수여당을 지지하고 투표하는 결과적 행위만이 아니라 뉴타운 공약 여부에 따라 후보를 판단하는 유권자의 취향 자체가, 뉴스에 대한 일상적 무관심이, ‘정치는 나와 상관없다’며 투표일에 휴가를 떠나는 무관심 자체가, 민주주의에 대한 습관적 냉소라는 아비투스를 구성하는 일상의 습속이 아닐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우리가 속한 계급의 이익에 맞추어 개인의 선택을 내린다. 그 과정은 대부분 무의식적이거나 자각하기 어렵지만, 우리는 적군과 아군의 대립을 단지 보수 대 진보식의 커다란 구분이 아니라 아주 촘촘한 문화적 일상적 구별짓기 속에서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강남식과 강북식의 이분법도 있고 외제차와 국산차의 이분법도 있으며 연예인과 일반인이라는 식의 기상천외한 이분법도 있으며 얼짱과 얼꽝식의 당혹스러운 구분도 있고 나이트클럽에서 ‘물관리’하고 홍대 앞 클럽에서 출입자의 ‘액면가’로 입장권 배부 여부를 가리는 풍속까지 포함되어 있다. ‘걔는 나랑 친해’, ‘쟤는 나랑 안 친해’식의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구별짓기를 비롯하여 일상의 아주 미세한 선택 하나하나가 상징적 권력을 창조하기도 해체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중요한 것은 단지 보수정당이나 진보정당이냐를 결정하는 투표 행위가 아니라 일상의 닫힌 선분을 만드는 모든 사소한 억압들과의 투쟁이라는 것을, 부르디외는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름다운 ‘계급 배반’이 아닐까. 비정규직 노동자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아름다운 강남좌파, 노동자계급에게 음악과 회화와 그 모든 예술의 감동을 무료로 공급해주는 최고의 아티스트들, ‘구조조정’과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미명 아래 세계를 20대 80의 사회로 만든 신자유주의와 정면 승부하는 대통령을……. 우리는 오늘도 이 모든 ‘창조적 계급 배반의 상상 속 리스트’를 채워보며 부르디외가 투쟁했던 현대사회의 ‘새로운 앙시앙 레짐’을 극복할 수 있는 에너지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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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llowcup 2009-08-07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홋. 재미나게 읽었던 부르디외 편이 끝났네요.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주제도 너무 기대돼요! 화이팅!

mint 2009-08-07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좋은 영화평론은, 그 영화를 실제로 보고 싶게 만드는 글이라고 생각해요. '순수의 시대'는 매우 재미있게 보았던 영화인데, 오랜만에 다시 보고 싶어졌습니다. 더운 여름, 좋은 글 쓰시느라 고생많으셨습니다. 다음 글도 즐겁게 기다리겠습니다~ ^^

애플주스 2009-08-07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내 삶의 모든 과정이 보이지 않는 아비투스의 그물로 친친 감겨 있는 듯한 슬픈 환상...아, 떠나고 싶다!!^^

milkyway 2009-08-08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블라우스를 사고 나면 치마가 없고 치마를 사고 나면 신발이 없고...ㅜㅜ...완전공감입니다. 그래서 지름신의 악순환이 계속되지요.^^ 조금은 특별한 외출을 준비할 때마다 옷장과의 전쟁이 시작되는...

하나비 2009-08-08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얼마전 나름 좋은 카메라를 사고도, 다른 사람의 카메라를 본 순간, 주눅이 들었어요^^* 타인의 것에 대한 비교우위를 통해서 내 것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제 모습을 보며, 참 꿀꿀해요. 여하튼 다음엔 더 재미난 글을 부탁드려요. 여울님.

맨손체조 2009-08-08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전, 딱 삼팔선에 걸려 있어요, 이제 어떻게 될까요. 으랏차차!

월요일이싫어 2009-08-10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다음 영화는 또 뭘까요? +_= 이번에는 내가 본 영화가 나왔으면 좋겠다.

sotkfkd 2009-09-13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계에 존재하는 아비투스, 사실 글에서 느껴지는 문장 그 자체로서의 뛰어남에 존경을 표하다가도 작가가 드러내는 '메이' 적인, '뉴렌드'적인 언행에 주춤 뒤로 물러서야 할 때의 슬픔이란 얼마나 큰 지!
타자로 존재하던 이들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타자'!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