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순수의 시대>와 피에르 부르디외 ⑨

 

9. 그들 각자의 순수 (3) : 뉴랜드, 현실의 쾌락보다 환상의 쾌락이 달콤하다


   메이의 순수가 ‘결점을 용납하지 않는 결벽증’에 가깝고, 엘렌의 순수가 ‘진심을 숨길 수 없는 정직함’에 가깝다면, 뉴랜드의 순수는 ‘세속에 물들지 않는 정결함’에 가깝다. 뉴랜드는 다른 귀족에 비해 세속적 욕망에 대해서는 자유로운 편이지만, 그만큼 세상물정에 둔감하며 현실감각이 없다. 엄청난 독서광이며 뛰어난 예술적 감식안을 지닌 뉴랜드는 책과 그림이라는 네모난 프레임의 내부에서는 한없이 자유롭고 낭만적이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세상이 책보다 흥미진진하고 그림보다 아름다울 거라는 환상이 존재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의 취향에 딱 맞는 그림처럼 아름답지 않았고, 현실은 그가 좋아하는 책처럼 논리적이지 않았다.

   현실 속에서 그는 언제나 자신의 결정을 뒤로 미루며 스스로의 의견을 직접 내놓기를 꺼린다. 엘렌의 이혼을 만류할 때도 그는 다만 ‘가문의 생각’이 이러저러하다고 멋들어진 설교를 늘어놓았다. 엘렌은 물었다. “그들의 생각 말구요. 당신 생각은 어떠냐고요. 당신도 이혼이 나쁘다고 생각하시나요?” 그 순간 뉴랜드는 당황한다. 언제나 논리 정연한 ‘정답’을 준비해놓은 듯한 그의 두뇌 속 매뉴얼에는 ‘나만의 생각’을 거리낌 없이 말한다는 항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결정적 순간에도 그는 늘 결정을 ‘외부’의 힘에 맡겨버린다. 그는 신혼여행 직후에 엘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바다를 바라보는 엘렌의 아련한 뒷모습을 발견한다. 그가 큰소리로 그녀를 불렀다면 충분히 들릴 만한 위치에서도 그는 그녀를 부르지 않는다. 어느 때보다도 그녀를 붙잡고 싶었지만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긴다. “그는 자신에게 한 번의 기회를 주기로 했다. 배가 등대를 지나기 전에 그녀가 뒤돌아보면 그녀에게 가겠다고 말이다.” 

   엘렌은 독서와 예술로 감각의 세계를 확장한 뉴랜드에게 그 환상이 현실로 바뀔 수도 있음을 증명한 모험의 안내자였다. 한편 메이는 ‘모험’이라는 단어를 두뇌 속 사전에서 완전히 지워버린 사람처럼 행동한다. 메이는 자신에게 맞는 취향의 수질관리를 하느라 주변의 모든 환경을 자신의 빛깔로 정화시킨다. 그녀는 자신의 결벽증적 순수를 유지하기 위해 남편에게도 ‘지나친 자유’를 꿈꾸는 것조차 금지한다. 남편이 읽는 책의 검열까지 서슴지 않는 것이다.

   “무슨 책을 읽어요?”
   “일본에 관한 책이야.”
   “왜 그런 걸 읽지요?”
   “모르겠어. 그냥…… 다른 나라니까.”
   “당신이 시를 읽어줄 때가 좋았는데.”

   메이의 마음속에서는 머나먼 나라, 가볼 수도 없는 나라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 자체가 불필요하고 불쾌한 일이다. 메이가 그리는 귀족가문의 서재 풍경은 남편이 낭만적인 시를 읽어주고 아내는 우아하게 수를 놓는 것이다. 뉴랜드는 마음속에서만 독백한다. “그는 자신이 이미 죽은 거라고 생각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말이다. 아내가 죽으면 그는 자유를 얻을 것이다.” 그는 아내라는 선명한 현실과 싸워 자유를 쟁취할 생각은 하지 않고 아내가 자신의 모험과 자유를 방해하는 ‘상상 속의 간수’라고 생각함으로써 모든 책임을 아내에게 전가시킨다.
   그에게는 현실의 쾌락보다 환상의 쾌락이 달콤하다. 현실의 쾌락은 위험한 기회비용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결정적인 순간 늘 중요한 선택을 여성들에게 미룬다. 그는 마치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아내를 원망하지만 결국 그의 아비투스가 모든 것을 선택한 것이다. 그의 가슴속에는 엘렌과 함께 여행을 떠날 별장의 ‘열쇠’가 들어있지만 그것은 결국 그의 외투를 탈출하지 못할 것이며 엘렌에게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여전히 현실보다 상상이 매혹적이기 때문에.  

   냉정하게 말하면, 엘렌을 잡지 못한 뉴랜드의 무력함은 그의 축적된 과거와 잠재된 미래가 만들어낸 아비투스의 협상 결과다. 그가 여행 한 번 못 떠나게 발목을 잡는 아내를 증오하면서도 아내를 떠나지 못하는 것 또한 그의 육체에 뿌리깊이 각인된 아비투스의 결과인 것이다. 그는 상상속의 공간, 환상의 이미지가 현실의 잡다한 유해물질로 오염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이 속한 계급의 아비투스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아처의 우유부단함은 신중한 성격에서 기인하기도 하지만, 아처는 그가 자라온 환경이 만들어낸 (메이로 상징되는)‘집단의 아비투스’로부터 한 개인이 자유로워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증명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아처는 앨렌이 나타나자 밋밋한 메이에게 싫증을 느끼고 메이를 가짜 순결, 오싹한 제도의 산물이라고 부르며 거부감을 느낀다. 그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아비투스로 설명할 수 없는, 해결되지 않는 잉여가 자신에게 있음을 깨달았고, 그것이 그만의 특이성임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는 엘렌과 메이, 두 세계의 사이에 끼어 흔들리는 과정에서 자신이 결코 ‘메이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임을 예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뉴욕 사교계 인사들과 아처의 다른 점은 그에게는 문화적 유체이탈의 관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사교계의 관행을 끊임없이 객관화시켜 그 문화의 허구성을 비판한다. 언제나 그 비판은 그의 머릿속에서만 일어나기는 하지만. 그는 엘렌의 ‘환송 만찬회’에서 역시 다른 여인들과 달리 장갑을 끼지 않은 엘렌의 맨손을 바라보면서 간절하게 마지막 소원을 빌어본다. ‘이 손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어디든 따라가겠어’라고. 그러나 곧 자신이 화려한 만찬을 가장한 사교계의 거미줄 같은 감시망에 포획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밴 더 루이든 부인은 주인의 왼쪽에 앉음으로써 이 만찬이 ‘외국손님’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냈다. 올렌스카 부인이 이 세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이 작별선물보다 더 교묘하게 강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아직 그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수단을 써서 그와 불륜 상대자를 성공적으로 갈라놓았다. (……) 그것이 ‘피를 흘리지 않고’ 목숨을 빼앗는 옛 뉴욕의 방식이었다. 질병보다 추문을 더 두려워하고, 용기보다 체면을 중히 여기고, 소동을 일으킨 사람들의 행동을 제외하면 ‘소동’보다 더 교양 없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방식이었다.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떠오르자, 아처는 자신이 무장한 군대 한가운데 있는 죄수같이 느껴졌다. (……) 직접적인 행동보다 암시와 비유에서, 성급한 말보다 침묵에서 더 많은 것이 전해져 오는 죽음과 같은 느낌이 가족 납골당의 문처럼 그를 서서히 죄어왔다.

-이디스 워튼, 송은주 역, 『순수의 시대』, 민음사, 2008, 410~412쪽. 
 
   

   그들이 연인이라는 사실이 이미 만천하에 유포되었다는 사실을 엘렌과 아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십수 년만에 돌아온 엘렌의 환영 만찬회 때는 노골적으로 집단 보이콧을 했던 바로 그 인사들이었다. 이제 엘렌이 추방당할 때가 되니 얼씨구나 하고 환송 만찬회를 열어주며 ‘외국인’의 추방을 기뻐하는 축제를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엘렌을 몰아내기 위해 이 파티를 주최한 것은 뉴욕 사교계의 공식 마스코트 메이였다. 메이는 자신이 임신했다고 거짓말을 함으로써 엘렌을 좌절시켰고, 메이가 잽싸게 준비한 엘렌의 환송 만찬회는 엘렌 추방작전의 화룡점정이었다. 엘렌은 몇 주 후 자신의 거짓말을 현실로 만듦으로써(그녀는 몇 주 후 임신에 성공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여행을 떠나겠다는 뉴랜드마저 단념시킨다. 이제야 이 무서운 ‘소문의 공동체’의 힘을 깨달아버린 그는 고귀한 가문이라는 가족 납골당에 산 채로 매장당한 것 같은 공포를 느낀다.

   그는 자신의 낭만적 환상을 엘렌에게 투사하는 것에 만족하고 엘렌과 함께 진짜 세상에 나아가 전투를 벌일 용기는 없다. 환상의 쾌락에는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지만 현실의 쾌락너머에는 엄청난 기회비용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늘 책을 읽는 그의 모습은 ‘이 세상 저 너머의 세계’조차 책으로만 경험하는 그의 나약함을 보여준다. 엘렌은 그가 마주친 유일한 실재이며 텍스트로 분석할 수 없는 야생의 실체였던 것이다. 그는 환상 속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그녀를 사랑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살아 숨 쉬는 육체를 가진 인간이었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7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하나비 2009-08-06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전, 마음으로는 엘렌을 동경하지만, 행동은 메이 같아요^^* 저도 가끔 같이 사는 사람이 읽는 책과 만나는 친구 등등을 검열한다니까요.

예인 2009-08-06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비투스에 충실한 보수적인 메이,아비투스에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엘렌,아비투스를 벗어나고 싶지만 현실 속에 안주하는 뉴랜드, 이 세명의 캐릭터를 아비투스를 중심으로 비교한 영화읽기가 흥미진진하군요. 인물 중심의 캐릭터의 묘사가 뛰어납니다. 철학과 문학을 아우르는 지식과 감수성 때문일까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건필하세요.~~

시트러스 2009-08-07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랑했지만 결국 함께 할 수 없었던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가네요. 보통 이별의 원인을 성격차이로 얼버무리지만ㅜㅜ...우린 그때 서로의 탄탄한 아비투스의 장벽을 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후덜덜....^^

인디안밥 2009-08-07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환상의 쾌락이 더 강렬하다는 말에 공감해요. 연애를 하고 있긴 하지만, 때로는 상대를 사랑하는 건지 사랑에 빠진 나 자신을 내려다보며, 사랑에 충분히 취해 있다는 안도감 자체를 사랑하는 건지 분간하기 어려워요. 그럴 때면 현실 속의 상대보다 잠들기 전 상상하는 누군가가 더 애틋하게 다가오거든요.

sotkfkd 2009-09-13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래에서 시작하여 열한 번째 줄, '엘렌'은 '메이'의 오기가 아닌가요?

메이의 생이 참 안쓰러워요. 그렇담 그렇게 바라보는 나는? 이라는 질문은 스스로에게 던지지 않을 수 없는 현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