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순수의 시대>와 피에르 부르디외 ⑧

 

8. 그들 각자의 순수 (2) : 플라밍고를 닮은, 엘렌의 순수


   부르디외는 개인의 아비투스를 형성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교육이라고 말한다. 부르디외의 눈에 비친 제도 교육은 사회의 불평등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합법적인 장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교육을 통해 육화된 문화적 불평등이 평생 지배/피지배의 권력구도를 재생산한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프랑스 사회의 국가기관에 배치된 인력 분포를 보면, 최고의 엘리트 양성기관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이 국가기관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들 중 90% 이상이 상층 부르주아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편 프랑스에서 노동자계급의 가정에서 자라난 학생들은 고등학교에 진입할 때 90% 이상 실업계로 진로를 결정하며, 이들 중 대부분이 고등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채 또다시 노동자 계급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다.1)
   머나먼 프랑스의 이야기가 마치 우리 이야기인 듯, 슬프도록 익숙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육이 갖는 문화적 재생산의 역할은 유럽이나 아시아나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교육열로만 따지면 명실 공히 세계 1위를 다투는 한국. 한국에서는 교육을 통해 힘겹게 축적한 상징자본이 그만큼의 문화적 지배를 재생산하지 못한다는 박탈감 때문에 오히려 더욱 경쟁이 격화되는 경향이 있다. ‘학력 인플레이션’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학력조차 ‘천국으로 가는 티켓’이 될 수 없다는 집단적 패배감 또한 ‘구별짓기’의 격화에 따른 문화적 효과라 할 수 있다. ‘학파라치’까지 만들어 사교육 열풍을 막는다는 정부의 야심찬 프로젝트는 엄연히 존재하는 구조적 갈등을 전시행정으로 은폐하는 고육지책일 수밖에 없다.

   엘렌은 뉴욕 상류층의 문화적 환경에서 볼 때 가장 ‘저급한 교육’을 받은 여성이었다. 그녀에 대한 험담을 시작할 때 늘 ‘불쌍한 엘렌’이라고 운을 떼는 밍고트 가의 사람들이 보기에, 엘렌이 받은 교육은 비체계적이고 비윤리적이며 비논리적이다. 엘렌의 부모는 방랑벽이 심했고 유럽의 이곳저곳을 떠돌다 죽었다. 엘렌이 받은 교육은 제도 교육과는 거리가 먼 데생이나 피아노 5중주 같은 예술가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한 것이었다. 엘렌은 앵글로색슨 계 미국인이 저급한 문화로 멸시하는 플라밍고를 멋들어지게 추고 나폴리 연가를 시원하게 부르는 등 이국풍(outlandish) 예능에 소질이 다분한 보헤미안 소녀였다. 상상력을 억압하는 뉴욕 백인 사회에서 그녀가 받은 이질적인 교육은 그 자체로 기존 사회에 위협적이었다. 그들은 매혹적인 엘렌의 이국 취향으로 인해 그동안 쌓아왔던 균질한 ‘취향의 커뮤니티’가 ‘잡스럽고 이질적인 외국취향’으로 물들까 두려워한 것이다.   

   그녀의 문화적 취향뿐 아니라 사람을 사귀는 취향 또한 사교계의 암묵적 규약을 깨뜨리는 것이었다. 엘렌은 불명예스러운 과거를 지닌 벼락부자라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던 스트러더 부인과 사귀는가 하면, 소문난 바람둥이 보퍼트를 거리낌 없이 만난다. 그러면서도 ‘어떤 규칙을 위반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엘렌은 소외된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반사회적’ 행동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이런 점에서 엘렌 또한 공동체의 시선으로부터 지나치게 자유로운 ‘순수한’ 영혼이다. 관습에 순종하며 이질적인 문화를 배척하는 메이의 순수(purity)와는 달리, 엘렌의 순수는 자신의 욕망과 감정에 솔직하며 타인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는 순수함(honesty)이다. 

   엘렌은 밴 더 루이든 가의 웅장한 저택에 대해 거리낌 없이 “우중충하다(gloomy)"고 평가한다. 뉴랜드는 그녀의 솔직함에 충격을 받는다. 모두가 장엄하다고 격찬하는 밴 더 루이든 가의 저택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엘렌은 흔히 영화에 나오는 팜므파탈처럼 열정적이고 관능적인 매혹을 지녔지만, 그들처럼 ‘도덕’과 ‘관습’마저 깡그리 무시하는 캐릭터는 아니다. 그녀는 애초에 자신의 신체를 집단의 아비투스에 가두는 모든 권력과 싸우고 싶어 했다. 하지만 엘렌은 타인에게 고통을 주면서까지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려 하지는 않는다. 그토록 원하던 이혼이었지만 메이와 아처의 가문을 위해 이혼을 포기했으며, 뉴랜드가 애절한 사랑고백을 했지만 메이를 생각하며 그에 대한 마음을 접는다.  

   그녀는 자신의 거주지와 친구들까지 간섭하는 귀족들의 노골적인 금족령을 견디지 못하고 보스턴으로 피란(?)을 간다. 그러나 사실 그녀의 도피는 뉴랜드와 메이의 결혼생활을 가까이서 봐야 하는 고통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함이었다. 마치 비즈니스상의 이유인 듯 가장하며 그녀를 급작스레 방문한 뉴랜드. 하녀도 없이 혼자 여행을 하는 그녀의 행동을 그 순간에도 ‘비관습적’이라고 콕 집어 지적해주는 모범생 뉴랜드 앞에서 그녀는 말한다. 또 하나의 ‘비관습적’인 행동을 했다고. 거액을 제시하며 자신과 만나줄 것을 부탁하는 남편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뉴랜드는 질투와 분노에 휩싸여 소리친다. “당신은 나에게 난생 처음으로 진짜 삶을 엿보게 해주었으면서, 동시에 가짜 삶을 계속 살라고 강요했어요. 누군들 이런 고통을 견딜 수 있겠어요?”
   엘렌은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그러나 절대로 나약해보이지 않는 담담한 말투로 말한다. “난, 견디고 있어요(I'm enduring it).” 뉴랜드는 그녀의 압도적인 차분함에 말문이 막힌다. 그녀는 가식과 허세로 가득한 뉴욕의 본질을 속속들이 꿰뚫어버린 듯한 눈빛으로, 그녀의 전존재를 모두 드러내는 듯한 투명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노골적으로 그녀를 거부한 미국을 그녀가 떠나지 않은 이유가 여기서 밝혀진다. 다만 멀리서라도 뉴랜드의 행복을 지켜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뉴랜드가 안전하게 양가의 관심과 보호 속에 살아가는 것을 다만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따스하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녀의 슬픈 미소 뒤로 내레이션이 흐른다. “그는 극장이나 피로연에서 그녀와 다시 마주치게 될 것이다. 서로 옆자리에 앉게 될 수도 있고 둘만의 시간을 다시 갖게 될 기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를 안 보고는 더 이상 살 수가 없었다.” 그를 사랑할수록 그에게서 멀리 도망치는 것이 그녀의 순수다. 아주 가끔이라도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아주 먼발치서라도 그의 미소를 보기 위해 그녀는 자신을 홀대하는 뉴욕에 남는다.
   함께 있지 않지만 어디서든 함께 있고, 멀리 있지만 언제나 가까이 있고, 그를 포기해야만 지킬 수 있는 사랑. 엘렌의 역설적인 사랑법은 열정과 욕망을 동경하지만 도덕과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그녀의 정결함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러한 엘렌의 순수는 가문이나 혈통이 가르친 것이 아니라 파란만장했던 그녀의 삶에서 그녀가 스스로 선택한, 결코 ‘학습되지 않은’ 순수였다. 복잡하게 이해관계를 따지는 사교계 사람들과는 달리, 엘렌의 원칙은 처음부터 단순했다. 그 모든 위험과 비방을 감수하고 왜 그토록 이혼을 원하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녀는 티없이 해맑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자유를 얻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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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부르디외의 책 『재생산』(장 클로드 파세롱·피에르 부르디외, 이상호 역, 동문선, 2000)을 참고할 수 있다. 교육을 통한 문화지배의 재생산을 한국적인 맥락에서 분석한 책으로는 <피에르 부르디외와 한국사회>(홍성민 지음, 살림, 2004)가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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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인 2009-08-05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엘렌의 캐릭터는 귀족적 아비투스로부터의 자유로운 여성이군요.
부르디외에 관한 책을 소개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비 2009-08-05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엘렌 같은 살아있는 예술 체험 교육이라니, 저도 한번 그런 전인 교육 받아봤으면~~^^*

블레이드러너 2009-08-05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플라멩고를 닮은 엘렌'. 오~오~오~ 작년 겨울 스페인에서 보았던 플라멩고. 훨훨 날아 갈듯한 자유로운 손짓 발짓 몸짓.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이 해체되는 듯 한. 아, 저는 엘렌같은 여자라면 완전 땡큐죠^^* ㅋㅋㅋㅋ

sotkfkd 2009-09-13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육! 그 노골적인 자본의 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