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순수의 시대>와 피에르 부르디외 ⑤

 

5. 아비투스의 딜레마 - 그것은 학습될 수 있는가 <1>


   영화 <프리티 우먼>은 거리의 창녀가 3일 만에 초특급 부르주아의 아비투스를 학습하는 경이로운 속성 엘리트 코스를 보여준다. 그녀가 부르주아들의 천국으로 입성하는 티켓은 바로 ‘신용카드’였다. 루이스(리처드 기어)는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창녀 비비안(줄리아 로버츠)을 ‘고용’한다. 처음에는 밤의 파트너로, 나중에는 사교모임에 대동할 파트너로. 루이스는 비비안에게 저녁 약속에 어울릴 만한 ‘품위 있는’ 의상을 사 입고 오라며 현금을 두둑이 건네지만, 싸구려 탱크탑을 걸친 비비안의 ‘행색’을 본 명품매장 직원은 비비안을 냉대한다. “당신에게 맞는 옷은 여기 하나도 없어요.” 그러자 루이스는 비비안을 직접 데려가 최고급 명품 매장의 여왕으로 만들어준다. 루이스는 비비안에게 냉소적으로 말한다. “사람에겐 불친절하지만 신용카드에게는 모두 친절하지.” 명품매장이 즐비한 로데오 거리에서 쇼핑백을 잔뜩 들고 경쾌하게 활보하는 비비안은 이제 더 이상 거리의 여자로 보이지 않는다.

   그녀와 함께 지내던 친구는 몰라보게 변한 비비안의 모습을 보고 감탄한다. “멋지다! 거리 출신 티는 하나도 안 나!” 비비안은 자조적으로 말한다. “돈만 있으면 쉬운 일이야.” 비비안이 부르주아의 세계에 진입하기 위해 필요했던 테이블 매너와 우아한 자태는 ‘학습’할 수 있었다. 그러나 파티 드레스를 입고 전용기까지 타고 날아가 오페라를 본다 해도 그녀가 ‘그들만의 리그’에 진정으로 편입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사랑에 빠진 남자의 ‘예절 바른 냉대’를 견딜 수 없었다. “나는 한 번도 널 창녀 취급한 적 없어.” 그는 그녀의 면전에서 ‘창녀’라는 단어를 내뱉음으로써 뜻하지 않게 그녀를 모욕하고 만다. 비비안은 쓸쓸하게 독백한다. “방금 그랬잖아요.” 그의 ‘뜻하지 않음’ 속에서, 즉 그의 무의식 속에서 그는 한 번도 그녀가 창녀라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프리티 우먼>은 결국 비비안의 동화 같은 꿈을 실현시킴으로써 이 ‘양극화된 세계’의 갈등을 달콤하게 은폐한다. <순수의 시대>는 이보다 훨씬 현실주의적인 영화다. 엘렌의 1차적 아비투스는 뉴욕의 상류층에서 배태된 것이지만, 유럽에서의 자유분방한 문화생활과 결혼생활의 산전수전을 통해 습득한 2차적 아비투스는 달랐다. 엘렌의 취향과 행동 속에서 이제는 어린 시절 습득한 1차적 아비투스의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이혼을 결심하고 남편으로부터 도망친 것 자체가 비관습적이지만(unconventional), 남성에게 맨손으로 먼저 악수를 청한다거나 당당하게 맞담배를 피우는 것, 하녀도 없이 혼자 여행을 떠나는 것 등등은 사사건건 ‘그들만의 리그’가 오매불망 지켜온 전통과 관습을 뒤흔드는 것이었다. 그녀의 이혼을 향해 공동체가 내린 판결은 그것이 ‘불쾌하다(unpleasant)’는 것이었다. 법적으로 이혼은 충분히 가능했지만 양가는 ‘소문이 무성한, 이혼한 여자’가 존재하는 집안의 일원이 되기를 한결같이 거부했던 것이다. 

   엘렌은 완벽한 미국인으로 변신하여 고향에 정착하고 싶지만 아처는 경고한다. “당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렇게 될 수 없을 거요.” 그것은 ‘남다른’ 엘렌의 독특함에 대한 찬사이기도 하지만 ‘너는 우리와 달라’라는 배제의 선언이기도 하다. 아비투스는 ‘연기’할 수도 있고 ‘학습’할 수도 있지만(그래서 타고난 신분을 속여 기상천외한 사기를 치는 사건들이 예나 지금이나 끊이지 않지만) 한 인간의 사회적 위치를 안정시키는 결정적 변수는 ‘공동체의 승인’이다. 엘렌은 오랜 유럽 생활 동안 습득된 보헤미안적 기질을 떨쳐내지 못함으로써, 아니, 그저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정말 원한다고 표현함으로써 ‘그들만의 리그’에 입장할 수 있는 티켓을 발급받지 못한다.
   신분과 국경과 인종을 초월한 사랑이 뉴스거리가 되고, 신데렐라 스토리가 해마다 버전-업되어 ‘욕먹으면서도’ 세계적으로 양산되는 이유는, 그만큼 인간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아비투스로부터 이탈하기 어려운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끼리끼리 결혼해야 한다’는 어르신들의 노파심은 이 ‘아비투스의 충돌’을 되도록이면 피해가라는 현명한(?) 처세술일까. 뉴랜드가 엘렌에게 매혹을 느끼면서도 그녀의 맨손과 담배와 과감한 의상에 매번 화들짝 놀라는 것은 그가 습득해온 취향이 그토록 견고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비투스는 단지 제도나 교육을 통해 집단적으로 습득되는 것이 아니다. 아비투스는 ‘인식’을 통한 학습효과를 넘어 ‘육체’에 각인된 무의식과 몸에 밴 습관이기에 더더욱 ‘포착’하기도 ‘극복’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취향은 계급의 암호다. 취향은 노골적으로 ‘끼리끼리임’을 확인하기에는 왠지 낯 뜨겁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현대인이 외모만으로는 쉽게 판단할 수 없는 낯선 타인의 계급을 판독하기 위해 사용하는 세련되고 우회적인 암호다. 부르디외는 이렇게 말한다. 취향은 중매자라고. 취향이라는 기호를 해독하는 작업을 통해 처음 만나는 남녀는 각자 자라온 아비투스의 ‘친화성’을 발견하게 된다. 사랑에 빠진 현대인은 잃어버린 신발 한 짝을 찾은 양, 자기 취향에 ‘딱 맞는’ 사람을 찾았다고 기뻐한다. 그러나 그 ‘천생연분’은 기실 우리의 치밀한 무의식의 용의주도한 주판알 굴리기를 통해 계산된 ‘아비투스의 연합’이 아닐까. ‘취향이 비슷한 사람이 좋아요’라고 말하는 현대인의 무의식 속에는 ‘나의 취향을 거스르는 사람과는 상대하기 싫다’는 배제의 논리가 깔려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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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읽었어요 2009-07-31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의식하지 않아도 거부감을 느끼고 꺼리게 되는 관계들이 있는 걸 보면- 순수의 시대에서 말하는 것은 귀족사회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잣대와 편견을 대변하는 듯 하네요. 누구나 저마다 그 집단의 아비투스로부터 자유롭지 않을 듯. 대신 이 글을 읽으면서 자각은 할 수 있게 되었네요.

블레이드러너 2009-08-01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취향은 계급의 암호다!" 암호를 풀 수 있는 힘이 내게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예인 2009-08-01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르디외의 아비투스에 대해 순수의 시대와 귀여운 여인은 좋은 사례가 되는군요. 말 그대로 필로 시네마가 유감없이 실력이 발휘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 인간으로부터의 소외는 마르크스적 계급적대의 충돌보다 아비투스라는 보이지 않는 계급적대를 포함한 사회적 적대가 오히려 심리적으로는 소외를 더 심화시키는 것 같습니다. 취향과 인격, 습관까지 미세한 정서들의 균열을 아비투스라는 개념으로 영화를 통해 잘 표현이 되었네요. 마르크스적 계급적대가 몰적인 선분의 충돌이라면 아비투스는 계급적대와 사회적 적대의 분자적인 선분이라고 하면 들뢰즈식의 아비투스에 대한 이해가 될 듯 합니다. 한편의 훌륭한 영화읽기였습니다. 건필하세요. ~~

예인 2009-08-01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욕망의 관점에서 계급과 아비투스는 그 근저에 식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식욕은 구별짖기, 공격욕동으로 나아가는 것 같고 프로이트적으로 해석을 하면 그 적대 속에서도 짝짖기 하려는 본능인 성욕동이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편의 영화를 식욕의 관점에서 해석을 하느냐 프로이트적 성욕의 관점에서 해석을 하느냐에 따라 영화를 보는 시각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나는 프로이트적으로 해석을 했는데... 그러면 인간의 문화라는 것은 성욕과 식욕의 억압이 문화라는 꿈으로써 상징화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네요. 프로이트의 꿈 해석은 한 쪽 측면을 부각시킨 것이라 보면 될 것 같네요. 영화라는 장소가 인간의 무의식이 상영되는 장소거든요. 식욕,성욕,수면욕, 인간의 3대 욕구이지요. ~~

sotkfkd 2009-09-13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부르디외며 들뢰즈(댓글)까지 오랜만에 읽게 되는 이름들이어서 참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