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아이 - 무엇으로도 가둘 수 없었던 소녀의 이야기
모드 쥘리앵 지음, 윤진 옮김 / 복복서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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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아이 (2020) by #모드쥘리앵 #maudejulien #복복서가
#theonlygirlintheworld (2014)
     
‘완벽한 아이’는 프랑스의 심리치료사인 모드 쥘리앵 (1957-)의 회고록이다.
     
참 기괴하다고밖에는 할 수 없는 그녀의 삶이 40년 만에 세상에 알려졌다.
     
서평을 쓰는 것은 쉽지 않았다.
     
모드 개인의 충격적인 성장기를, 독자에 불과한 내가 어떻게 감히 떠들어댈 수 있는가.
     
이 책을 그녀의 인간 승리에 초점을 맞춰 읽고 싶지 않았다.
     
한 소녀의 기괴한 성장기. 거기에 어떤 것을 추가하거나 빼지 않고, 그대로 읽어 나갔다.
     
그렇게 읽고 싶었다. 안 그러면 내가 모드를 오해할 것 같았다.
     
나는 그저 그녀가 그려낸 그림을 들여다볼 뿐, 그녀가 담긴 창가를 엿보았을 뿐.
     
후에 그녀가 그 창을 깨고 나와 성공하는 드라마는 이 수기의 본질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모드 자신도 “나는 그 철책에서 나왔어요! 나는 희망과 용기의 증거예요!” 이렇게 자신을 소개하려고 이 책을 썼다고 보지 않는다.
     
줄줄이 달린 추천사도 안 읽었다 (안 읽혔다). 내가 볼 땐 모드의 텍스트 외엔 모두 사족이었다.
     
이 소설은 1인칭 현재형으로 쓰여 있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과거도, 미래도 지향한 적이 없고, 그저 현재, 그때 그 자리에 있던 모드의 고백이 전부이다. 거기엔 기쁜 일, 슬픈 일, 소소한 일상 얘기도 엮인다.
     
모드의 불행의 원인은 부친 루이 디디에였다
     
루이 디디에는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이후 여러 일을 하며 부를 축적한 사업가로,
     
자신이 겪은 전쟁의 상흔과 트라우마가 매우 깊었는지 왜곡된 방식으로 그의 가족의 삶에 폭군처럼 군림한다.
     
철책으로 가둔 커다란 집에 자신의 왕국을 만들어 사는 것.
     
왕국의 시종은 단 두 사람.
     
그가, 가난한 광부의 6살 난 딸을 사들여 공부시켜 만든 자신의 아내 자닌과, 1957년 11월 23일날에 반드시 출생해야 했고 또 출생했던 딸 모드였다.
     
그 딸은 초인이 되어 세상을 구하고 그의 영혼까지 구원해줄 특별한 아이라는 것.
     
아버지는, 프리메이슨, 신비주의, 사드, 피라미드 등 이상한 cult들을 조합한 정신세계의 소유자로서, 딸을 초인으로 키우기 위해 비인간적인 갖가지 훈련들을 시킨다. 너무 터무니없어서 종종 웃음이 나기도 했다.
     
(스포라서 책의 자세한 내용은 쓰지 않는다.)
     
어린 모드가 아무런 방패막 없이 어른들의 더러운 손에 노출되어 희생되었을 때, 동물을 향한 순전한 사랑이 짓밟혔을 때, 나는 분노했고 마음 아팠다.
     
그것을 목격했으면서도 방관한 부모의 태도는 이해 불가다.
     
그러면서도 아버지란 존재가 완전히 악역도 아닌 것에 혼란스럽기도 하다.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벌써 아버지가 그립다. 나는 아버지를 증오하고, 어서 도망치고 싶다. 철책이 다시 닫히는 순간 내가 한 가짜 맹세의 기억이 가슴을 찌른다. 어머니 말이 맞는
다. 나한테 기대해봐야 헛일이다. 나는 도둑처럼, 배신자처럼 이 집을 떠난다." (310)
     
내게 모드를 이해할 수 없던 부분도 있었다.
     
세상과 완전히 담을 쌓은 것도 아닌, 세상과 맞닿아 있었으면서, 철책 너머 탈출의 기회 또한 전혀 없지 않았음에도 타인이 꺼내주기까지 소극적으로 머물렀던 모드가, 글에선 ‘해방과 자유’를 외치며 몸부림치는 모드와는 너무 달라서, 이따금 현실과 이상의 자리를 뒤바꿔 낯설게 하는 그런 모습들에 모드에게 다가가기 어려웠다.
     
“나는 굶주리지도 않고 묶여 있지도 않고 매를 맞는 것도 아니다. 누가 내 말을 믿겠는가.” (201)
     
그래서인지,
     
“내 영혼은 누구의 것도 아닌 나의 것이며 그 어떤 완벽한 계획을 가진 이도 이를 가져가 자신의 미성숙한 자아의 먹이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모드 쥘리앵은 자신의 삶을 통해 감동적으로 증거했다.” 는 김영하 작가의 서문이 답답하게 읽혔다.
     
아마도 그건, 그런 폭군 밑에 세뇌당하고 정신까지 지배당할 수 있었을 모드가 자신의 영혼 만큼은 독립적인 존재로서, 오염되지 않게 필사적으로 지켜낸 것에 대한 찬사라고, 나는 믿고 싶다.
     
이 책은 모드 쥘리앵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모드를 세상 밖으로 꺼내준 인간들.
     
모드를 세상 안에서 위로해준 동물들.
     
어둠 너머에 분명히 존재하는 빛의 이야기들.
     
철책 밖을 꿈꾸는 이들에게 들려준 모드의 마지막 말은,
     
“인간들은 훌륭하다.”
     
꼿꼿이 버티던 내 심장이 무너져버렸다.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벌써 아버지가 그립다. 나는 아버지를 증오하고, 어서 도망치고 싶다. 철책이 다시 닫히는 순간 내가 한 가짜 맹세의 기억이 가슴을 찌른다. 어머니 말이 맞는다. 나한테 기대해봐야 헛일이다. 나는 도둑처럼, 배신자처럼 이 집을 떠난다. (p. 310)

나는 굶주리지도 않고 묶여 있지도 않고 매를 맞는 것도 아니다. 누가 내 말을 믿겠는가. (p. 201)


인간들은 훌륭하다. (p.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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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테아 2.2 을유세계문학전집 108
리처드 파워스 지음, 이동신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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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제공 #리차드파워스 #갈라테아2_2 (2010) #galatea2 (1996) #이동신

 

피날레는 없다네. 여기서는 절대적으로 중간만 다루거든.” (25)

 

어떤 책은 읽는 것만으로도 그 수많은 단어와 문장들의 격류에 힘이 부쳐, 아주 단순한 언어로만 간결히 기억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이 소설은 U라는 동네로 돌아온 소설가 (이자 본인 리차드 파워스) P의 회고에서 시작한다.

 

PU에 있는 모교의 방문 교수가 되어 이곳을 다시 찾은 것이다.

 

오래전 U의 대학원생으로서 C를 가르치며 그녀와 연인이 되었던 P.

 

우연의 장난처럼 네덜란드 이민자의 딸로 출생한 C에게서, 자신과 닮은 혹은 자신이 결핍한 상실감과 유대감을 느끼며 두 사람은 젊은 시절을 함께했다.

 

혈통과 정체성의 유령에 끌려다니며 생존자의 가책으로 불안정했던 C, 아버지의 만류에도 과학도의 길을 버리고 소설가가 된 P.

 

남의 인생의 조각을 끌어모아 제 것인양 글을 써야 하는 작가의 숙명과 동시에 이상적인 연인으로 사는 것은 불가능한 공존이었다.

 

PU의 센터에서 괴짜 박사 필립 렌츠를 만나는데, 그는 복잡계를 연구하는 신경과학 엔지니어다.

 

렌츠는, 인공지능을 인간만큼 발전시켜 스스로 책을 읽고 해석하여 영문과 석사 시험을 치를 수 있는지를 시험해보는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거기 적임자로 영문과 교수인 P를 끌어들인다.

 

P는 과학의 가능성을 의심하면서도, 매일 컴퓨터에 다양한 지식들을 읽어 준다. 문학 작품, , 소설, 아주 사소한 세상 얘기, 그리고 자기 자신의 얘기들도.

 

임플리멘테이션 A에서부터 시작해 시행착오 끝에 H에 도달.

 

인공지능 헬렌이 탄생하는데.

 

이 프로젝트는 결국 무엇을 위한 것일까.

 

갈라테아는 단지 기계와 인간의 애틋한 교감을 말하는 소설이 아니다.

 

P라는 인물에 대한 얘기다.

 

'그런 것 같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9)로 소설이 시작하듯이.

 

불확실함에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했던 P, 어딘가 갔지만 찾지 못한 C, 헬렌의 모습을 투영한 A, 그럼에도 현실을 살아나가는 주변 인물들, 그들의 아픔과 슬픔들을.

 

소설은 과학도였던 작가답게 빈틈이 없다.

 

마치 헬렌을 길들였던 방식대로, ‘연상, 패턴, 순서' (444)의 작업처럼, 한 인간의 기억의 조각에서 시작해 현실과 과거를 교차하는 패턴, 그리고 이상적인 배열을 통해 여러 인물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네트처럼 잇고 있다.

 

거기에 작가의 지식은 상상을 초월한다.

 

영문학, 영문법, 언어학, 물리학, 수학, 공학, 심지어 이 작가의 장기인 클래식 음악까지 연결한다.

 

벌레스크 (부를레스카), 멜리스마 등의 클래식 텀을 과학 소설에서 볼 줄은 몰랐다.

 

과학에 무지한 나도 재밌게 읽을 수 있던 이유는, 이런 고도의 지식을 굉장히 우아하고 아름다운 문체로 표현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단어 혹은 의미를 위해, 수많은 은유와 추상적 표현을 쓰고 있는 그의 글이 왜 국내에 쉽게 번역될 수 없는지 이해가 될 만했다. 그 점에서 역자의 유려한 번역과 정성에 감사한다.

 

불확실함은 이 소설의 모든 것이다.

 

확실한 건 떠나는 것에 대해 쓰고 싶다는 거였다. 다음 소설은 이렇게 시작할 거다.

남쪽으로 향하는 기차를 상상해보라. 하지만 이 첫 줄을 받아서 시작할 수가 없었다. 그처럼 완벽한 첫 문장으로 시작하면 결국 그걸 망칠 수밖에 없다는 자명한 이유 탓에 난 출발지에서 맴돌고 있었다.“ (p. 43)

 

천천히, 느리고 정적인 문체로, 아직 다가오지 않은 어떤 불확실함에 목이 조여드는 소설.

 

그러면서 가슴 한켠이 먹먹하고 아프고 쓸쓸하다.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소설은 내내 묻고 있었다.

 

그것은 헬렌도, 렌츠도, 그 누구도 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P는 자신이 품은 이 불확실한, 정체 모를, 무국적 상태의 정신의 미아를 떨쳐내고 다시 소설을 쓸 수 있을까.

 

"남쪽으로 향하는 기차를 상상해보라.”

 

이 근사한 첫 줄로만 끝났던 그의 모호한 여행은 헬렌을 만남으로 그 어딘가에 도달할 수 있을까.

 

나는 A가 내 위치를 측량해 주고 말해 주기를 원했다.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여기 사는 것이라고 동의해 주기를.” (526)

 

인생은 환유를 배우는 것이다라는 에머슨 (252)의 말 한마디를 위해,

 

작가가 들려준 534 페이지의 아름답고도 불확실한 변주곡.

 

나는 이 소설을 이렇게 기억하리라.

 

#순문학애호가 #문학 #소설 #과학소설 #SF소설 #SF문학 

피날레는 없다네. 여기서는 절대적으로 중간만 다루거든. (p.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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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의 달
나기라 유 지음, 정수윤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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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성애 미화가 존재한다. ‘서로의 구원‘ 과 (굳이) ‘페도필리아‘라는 별개의 것을 이으려는 작가의 시도가 순수치 못하다. 후반에 수습하기에 필력도 좋지 못하고 모순들이 충돌한다. 아닌 것은 아니다. 작가라고 모든 소재를 다 삼아 쓸 순 없다. 즐겁게 읽어달라는 작가의 말은 조롱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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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새 2022-09-27 22:48   좋아요 2 | URL
이 책에는 페도필리아 미화가 나오지 않습니다. 혹시 책을 끝까지 제대로 읽은 것이 맞나요? 책을 끝까지 읽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서평을 남겼다면 책을 펼쳐두고 글자를 읽지 않은 것이고, 펼치지도 않았다면 스스로 많은 서평을 남기시는 분으로서 부끄러워하셨으면 합니다. 초반의 페도필리아로 느껴지는 묘사가 후반에 후미의 어떤 마음으로부터 말미암아 나오는 것인지 본인은 모르고 있는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적지는 못하지만 상실과 아픔으로 인한 도피처의 체재로 사용했지만 그것조차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라 괴로워하는 것은 보이지 않으셨나요? 작가가 소설에서 그토록 말하는 제멋대로 판단하여 타인을 재조립하려고 하고 입맛대로 해석하는 대중들의 모습이 본인과 다를 것이 있나요? 그 때문에 등장인물들이 얼마나 스스로 갈등하고 고통을 감내하는지 봤다면 이런 말도 안되는 책장 겉핥기식 서평은 나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맑은시내 2022-09-28 11:23   좋아요 0 | URL
매우 공격적인 댓글이군요. 반감으로 가득한 댓글보단 본인의 소신 있는 서평을 쓰세요. 개개인의 독서에는 여러 방식과 해석이 존재합니다. 금새 님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저도 언급하신 점에 대해 다른 독자들의 생각들을 이해하는 바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아요. 어떤 독자에겐 이런 부분이 크게 보인다면 다른 독자에게는 다른 부분이 크게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죠. 제 경우, 후반에 나오는 후미의 심경에 관해 작가가 제대로 설득력 있게 수습하지 못한 점 (특히 앞부분과 연결되는 맥락에서), 요즘 시기에도 매우 예민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만큼 이를 접근하는 작가의 태도나 필력의 가벼움 (한 예로, 즐겁게 읽어 달라, 즐겨 달라는 인사는 좀 아니지 않습니까. 이런 면모 등에서 작가가, 우리에게 던져준 심각한 문제의식보다는 장르적으로 주제를 소비하는 구성에 더 치중한 건 아닌가 그 의도를 생각해본 겁니다.), 그런 까닭인지 이런 혼란과 논란을 야기하는 것 등은 이 소설의 불완전한 무언가 그러니까 독자들의 호불호가 존재할 수 있는 요소가 있다고 봅니다. 저한테 겉핥기식으로 읽었다, 부끄러워해라 등 공격하셨습니다만, 저는 제 손에 들어온 어떤 책도 대충 읽지 않습니다. 제 과거 독서 이력까지 들춰내면서 과열하실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일본 소설 수없이 읽었고 충격적인 주제들도 많이 접해온 사람인데 이 소설에 대한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저만 그런 걸까요, 공감수가 나타내는 게 뭘 의미하는지, 다시 한 번 차분히 생각해 보세요.

미니지 2025-10-02 09:54   좋아요 0 | URL
책 끝까지 읽은거 맞나..? 후반부 챕터에서 해당 부분 언급해주는데 이 무슨;;;

맑은시내 2025-10-02 10:50   좋아요 0 | URL
영화보고 오셨나요. 아름다운 배우들과 국보로 히트친 감독 버프받고 이 책이 달리 읽히셨나요. 책은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법입니다. 마치 게임에 여러 엔딩이 있고, 내가 취하는 것이 진 엔딩이듯이 말이지요. 책 나오자마자 읽었고 굿즈도 있습니다. 5년 전에 나온 책입니다. 지금은 여러 의견들이 나오고, 최근에 영화도 나오면서 처음 이 책이 던져 준 날 것의 감상과 문제의식이 많이 퇴색되고 순화, 미화되어 보이는 듯합니다. 이 책을 다시 볼 시간은 없습니다만, 5년 전 제 기억에서 아마 이 책에서 혼자 노는 여자 아이를 어른인 후미가 집에 데려가는 장면이 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소설로 보면 뒷부분에 이런 저런 사정이 설명되고, 작가의 주도 하에 어떻게든 수습이 되는 것 같지만, 제가 보는 쟁점은 그게 아닙니다. 소설은 픽션인데 구태여 현실을 반영하느냐고 물으신다면 그것은 저와 미니지 님과의 생각과 사유가 같을 수 없기에 이 소설이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일 테죠. 그런 것으로 태클을 거시면 곤란합니다. 개인의 생각과 사유와 경험은 저마다 다른데, 왜 이렇게 생각하지 않느냐, 왜 이렇게 이해하지 않느냐 하고 다그치면 그건 폭력 아닙니까.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주제 의식 하나가 ‘폭력‘의 고발인데, 그것을 알고 계시다면 타인의 생각도 존중해주세요. 사라사도, 후미도 저는 작가가 그린 캐릭터성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인위적인 혹은 작위적인 방법으로 피해자의 상황을 만들고 서로를 끼워 맞추는 듯한 시원찮은 필력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마지막에 딱 ‘이랬습니다‘ 하는 소설적 기법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설득력도 없고요. 화제성을 끌기 위해 매력적인 청년과 가련한 어린 여자아이를 집어 넣어 쓴 장르 소설류, 딱 이 수준이었습니다. 참고로, ‘달의 영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그 소설은 여운이 남고 필력도 좋더군요.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버나딘 에바리스토 지음, 하윤숙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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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여자다른사람들 (2020) #girlwomanother (2019) #버나딘에바리스토 #부커상 #김영사

#서평단

 

 

네가 아무리 잉글랜드 영국인인 척해도 달라지지 않아

그리고 앞으로 또다시 날 어머니라고 부르면 피가 철철 나도록 때려서 빨래 너는 베란다에 거꾸로 매달 거야

난 네 마마야

앞으로도 영원히

절대 잊지 마, 아비 (알겠니)? (224)

 

 

이 소설은 독하다.

 

이렇게 강렬하고 도발적인 문학은 근래 처음 본다.

 

부커상이라는 화려한 타이틀 아래 아프리카 디아스포라를 다룬 완성도 높은 작품이란 것에는 이견이 없지만, 사실 이 소설이 내게 새긴 것은 두 가지였다.

 

퀴어페미니즘

 

솔직히 레즈비언들이 어떻게 사랑하고 질투하고 망가지고, 어떤 약을 하는지는 궁금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문학의 재료로 삼아 집요하고 자세히 공들여 서술하는 작가의 노력은 실로 놀라웠다.

 

책의 첫 장은 성공한 레즈비언 극작가 겸 연출가 앰마의 얘기로 시작한다.

 

흑인 극작가나 연극배우가 거의 전무한 상황에 그녀가 이룬 성취는 아주 대단했다. 게다가 그녀는 성소수자다. 마이너의 마이너.

 

엠마의 성적지향성과 레즈비언들의 분파 등이 매우 자세하게 설명되고, 그렇게 다음 인물에 연결되면서 이 소설의 주제인 아프리카 디아스포라가 개별의 화자의 인생을 통해 펼쳐지는 구성을 취한다.

 

소설의 구성 방식이 탁월한데, 12명의 흑인 여성 인물이 등장한다.

 

엠마/ 야즈/ 도미니크/ 캐럴/ 버미/ 라티샤/ 셜리/ 윈섬/ 퍼넬러피/ 메건, 모건/ 해티/ 그레이스

 

이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각자의 삶에 빛과 어둠이 있다.

 

치명적인 약점과 실수, 상처를 가진 이들이다. 이웃으로, 직장 동료로, 친구로, 어머니로, 딸로 그렇게 연결되어.

 

최연소자 19살의 야즈에서 91살 고령의 할머니 해티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그 누구도 소홀히 여기지 않고 그들의 삶에 귀를 기울인다.

 

1세대들은 4세대들이 비교적 편하게 살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준 선구자 역할을 한 사람들이다.

 

당시 소수의 흑인으로서 그들이 받은 차별과 냉대는 말로 다 할 수 없었고, 고달픈 노동을 통하여 살길을 모색해야 했다.

 

대부분 부모를 일찍 여의거나 고아였던 불행한 가정사를 지니고 있었고, 어린 나이에 미혼모가 되어 혼자 아이를 키우는 인생들도 대다수였다.

 

정치적으로도 불안정한 시기라 그들은 좌파, 우파, 가부장제 등에 휩쓸리며 시대에 순응해 살아왔다.

 

그러나 다음 세대는 좀 다르다. 그리고 그 다음 세대는 급진적으로 더 다르다. 역사는 변하고 시대는 달라졌다.

 

레즈비언, 페미니즘, 정치 등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 책이고, 그래서 사실 아프리카 디아스포라의 이야기가 더 크게 부각되지 못한 듯해 아쉬움이 있다.

 

그리고 이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들 대부분이 나약하고 폭력적이고 무책임하는 등 여성들의 행복을 망치는 극단적인 존재로서 등장하는 것도 안타까웠다.

 

그러나 여성은 숭고하고, 여성은 강했다.

 

페미니즘이든, 퀴어든, 무책임한 남자든, 그것을 압도하는 강함이 여성들에게 있는데 그것이 바로 연대감이다.

 

흑인이라는 같은 뿌리 아래 생성된, 피보다 진한 가족의 연대감이 이들을 굳건히 만들어준다.

 

뭔가 느끼는 게 아니며, 뭔가 말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존재하는 것

둘이 함께 존재하는 것“ (p. 627)

 

 

읽다가 눈물을 흘린 챕터가 있다.

 

나이지리아 이민자의 딸로, 열악한 환경과 아픔을 딛고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해 런던의 은행 부사장까지 오른 캐럴과 그의 모친 버미의 얘기였다.

 

이 글의 첫 시작에 등장하는 말이 바로 버미가 백인 영국인처럼 변해가는 딸과 다투다가 마지막에 화해하며 한 말이다.

 

이렇게 가슴 울컥거리는 아름다운 장면과 문장들이 기습하듯 내게 스몄다.

 

나로선 책의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성소수자, 페미니스트 얘기에 벽에 부딪치긴 했지만, 한 여성 한 여성마다 걸어온 인생의 여정을 읽는 것은 유의미했다.

 

내가 뭐라 평가할 수 없는 (하려면 하겠지만) 여러 면모를 가진 소설이고, 운문 형식으로 숨결과 호흡을 유지하는 문체도 아름답고, 가독성이 뛰어나고, 오직 그들만이 쓸 수 있는 큰 스케일과 시선이 담겨 있어 읽는 보람이 컸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든, 취향적으로든) 이 책에 전부를 다 이해하고 수용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작가 버나딘의 창문으로 엿본 영국은 여전히 먹먹한 안개에 쌓여 있었기에.

 

 

네가 아무리 잉글랜드 영국인인 척해도 달라지지 않아
그리고 앞으로 또다시 날 어머니라고 부르면 피가 철철 나도록 때려서 빨래 너는 베란다에 거꾸로 매달 거야
난 네 마마야
앞으로도 영원히
절대 잊지 마, 아비 (알겠니)?
- P224

뭔가 느끼는 게 아니며, 뭔가 말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존재하는 것
둘이 함께 존재하는 것 - P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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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우가 연주하는 슈만 [2CD] - 아베크 변주곡 Op.1, 숲속의 정경 Op.82, 어린이의 정경 Op.15, 유령 변주곡 WoO 24, 다채로운 소품집 Op.99 외
슈만 (Robert Schumann) 작곡, 백건우 (Kun-Woo Paik) 연주 / 유니버설(Universal)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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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너무 좋은 연주라 오래도록 소장하고 싶었고 사랑하는 음반인데, 이 라이센스 DG 시디에 스크래치와 염료 코팅 에러들이 보여 정말 유감스러웠어요. 교환받아도 또 그런 듯합니다만. 다음 제작 땐 퀄리티에 꼭 신경쓰길 바랍니다. 백건우 선생님 멋진 연주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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