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버나딘 에바리스토 지음, 하윤숙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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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단

 

 

네가 아무리 잉글랜드 영국인인 척해도 달라지지 않아

그리고 앞으로 또다시 날 어머니라고 부르면 피가 철철 나도록 때려서 빨래 너는 베란다에 거꾸로 매달 거야

난 네 마마야

앞으로도 영원히

절대 잊지 마, 아비 (알겠니)? (224)

 

 

이 소설은 독하다.

 

이렇게 강렬하고 도발적인 문학은 근래 처음 본다.

 

부커상이라는 화려한 타이틀 아래 아프리카 디아스포라를 다룬 완성도 높은 작품이란 것에는 이견이 없지만, 사실 이 소설이 내게 새긴 것은 두 가지였다.

 

퀴어페미니즘

 

솔직히 레즈비언들이 어떻게 사랑하고 질투하고 망가지고, 어떤 약을 하는지는 궁금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문학의 재료로 삼아 집요하고 자세히 공들여 서술하는 작가의 노력은 실로 놀라웠다.

 

책의 첫 장은 성공한 레즈비언 극작가 겸 연출가 앰마의 얘기로 시작한다.

 

흑인 극작가나 연극배우가 거의 전무한 상황에 그녀가 이룬 성취는 아주 대단했다. 게다가 그녀는 성소수자다. 마이너의 마이너.

 

엠마의 성적지향성과 레즈비언들의 분파 등이 매우 자세하게 설명되고, 그렇게 다음 인물에 연결되면서 이 소설의 주제인 아프리카 디아스포라가 개별의 화자의 인생을 통해 펼쳐지는 구성을 취한다.

 

소설의 구성 방식이 탁월한데, 12명의 흑인 여성 인물이 등장한다.

 

엠마/ 야즈/ 도미니크/ 캐럴/ 버미/ 라티샤/ 셜리/ 윈섬/ 퍼넬러피/ 메건, 모건/ 해티/ 그레이스

 

이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각자의 삶에 빛과 어둠이 있다.

 

치명적인 약점과 실수, 상처를 가진 이들이다. 이웃으로, 직장 동료로, 친구로, 어머니로, 딸로 그렇게 연결되어.

 

최연소자 19살의 야즈에서 91살 고령의 할머니 해티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그 누구도 소홀히 여기지 않고 그들의 삶에 귀를 기울인다.

 

1세대들은 4세대들이 비교적 편하게 살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준 선구자 역할을 한 사람들이다.

 

당시 소수의 흑인으로서 그들이 받은 차별과 냉대는 말로 다 할 수 없었고, 고달픈 노동을 통하여 살길을 모색해야 했다.

 

대부분 부모를 일찍 여의거나 고아였던 불행한 가정사를 지니고 있었고, 어린 나이에 미혼모가 되어 혼자 아이를 키우는 인생들도 대다수였다.

 

정치적으로도 불안정한 시기라 그들은 좌파, 우파, 가부장제 등에 휩쓸리며 시대에 순응해 살아왔다.

 

그러나 다음 세대는 좀 다르다. 그리고 그 다음 세대는 급진적으로 더 다르다. 역사는 변하고 시대는 달라졌다.

 

레즈비언, 페미니즘, 정치 등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 책이고, 그래서 사실 아프리카 디아스포라의 이야기가 더 크게 부각되지 못한 듯해 아쉬움이 있다.

 

그리고 이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들 대부분이 나약하고 폭력적이고 무책임하는 등 여성들의 행복을 망치는 극단적인 존재로서 등장하는 것도 안타까웠다.

 

그러나 여성은 숭고하고, 여성은 강했다.

 

페미니즘이든, 퀴어든, 무책임한 남자든, 그것을 압도하는 강함이 여성들에게 있는데 그것이 바로 연대감이다.

 

흑인이라는 같은 뿌리 아래 생성된, 피보다 진한 가족의 연대감이 이들을 굳건히 만들어준다.

 

뭔가 느끼는 게 아니며, 뭔가 말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존재하는 것

둘이 함께 존재하는 것“ (p. 627)

 

 

읽다가 눈물을 흘린 챕터가 있다.

 

나이지리아 이민자의 딸로, 열악한 환경과 아픔을 딛고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해 런던의 은행 부사장까지 오른 캐럴과 그의 모친 버미의 얘기였다.

 

이 글의 첫 시작에 등장하는 말이 바로 버미가 백인 영국인처럼 변해가는 딸과 다투다가 마지막에 화해하며 한 말이다.

 

이렇게 가슴 울컥거리는 아름다운 장면과 문장들이 기습하듯 내게 스몄다.

 

나로선 책의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성소수자, 페미니스트 얘기에 벽에 부딪치긴 했지만, 한 여성 한 여성마다 걸어온 인생의 여정을 읽는 것은 유의미했다.

 

내가 뭐라 평가할 수 없는 (하려면 하겠지만) 여러 면모를 가진 소설이고, 운문 형식으로 숨결과 호흡을 유지하는 문체도 아름답고, 가독성이 뛰어나고, 오직 그들만이 쓸 수 있는 큰 스케일과 시선이 담겨 있어 읽는 보람이 컸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든, 취향적으로든) 이 책에 전부를 다 이해하고 수용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작가 버나딘의 창문으로 엿본 영국은 여전히 먹먹한 안개에 쌓여 있었기에.

 

 

네가 아무리 잉글랜드 영국인인 척해도 달라지지 않아
그리고 앞으로 또다시 날 어머니라고 부르면 피가 철철 나도록 때려서 빨래 너는 베란다에 거꾸로 매달 거야
난 네 마마야
앞으로도 영원히
절대 잊지 마, 아비 (알겠니)?
- P224

뭔가 느끼는 게 아니며, 뭔가 말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존재하는 것
둘이 함께 존재하는 것 - P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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