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뿐인 친구녀석이 꿈자리가 뒤숭숭 하다며 별 일 없냐고 물길래 나는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아무 일 없냐고 물어서 없다고 말했다.

 

 

.. 요즘은 자꾸 거짓말이 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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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것 없이 내내 컴퓨터 앞에 앉아 하루를 보냈다. 오늘 어느정도 진척이 되었어야 할 일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오후에는 양쪽 메신저에 있는 친구등록을 모조리 삭제해버리고 [꺼져드림] 과 [씨발] 로 닉을 변경한 후 로그오프를 했다. 메신저 탈퇴 하는 방법이 있다면 더 간단했을텐데 항상 내가 로그인을 언제고 할 수 있다는 점이 더 나를 시험하고 곤욕이다. 이렇게 있다가 얼마후에는 일때문에라도 다시 로그인을 할테고 그러면 다시 반복이 되겠지. 사람들은 모두 나를 피한다. 내가 조금 좋아라 하거나 마음의 문을 열거나 편하게 느껴질만 하면 다들 슬금슬금 피한다. 먼저 친구등록을 했던것도 대부분 그네들이고 먼저 다가왔던 것도 대부분 그네들이었다. 내 눈엔 그네들이 정말 이상하게 보이지만 모두들 같은 행동인걸 보면 아무래도 내가 문제인가 보다. 이유는 정확히 모르지만 대충 짐작은 가기도 한다. 이런 이상얄딱구리한 성격으로 태어난 내가 싫다. 내가 도대체 뭘 그렇게 잘못한거지...? 나는 그냥 사람이 그리웠을뿐이라고 ..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걸 느끼고 싶었던 것 뿐이라고 ..

 

울고싶다 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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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이 가끔 생각나거나 내킬때에나 들여다보고 어루만지는 인형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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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보일드 하드 럭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요시토모 나라 그림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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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모토바나나의 그 유명하다는 글들을 나는 읽어본 적이 없다.워낙에 가려 보는 타입인데다가 특히 번역된 글들은 별로 좋아하지를 않는다.번역된 글들이 정말 그 작가의 문체일까가 나는 사실 의심스럽다.아무리 번역을 잘하는 번역가라 하더라도 그곳에는 그 작가만의 문체만 순수하게 있지는 못할 것이다.번역가의 문체는 어느정도 뭍어 있을테고 그건 어쩌면 어쩔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고 그러나 나는 원문을 읽을 능력이 안되므로 별로 좋아하지를 않는다.내가 문체라는 것에 비중을 제법 두는 이유는 문체가 그 글 전체의 분위기를 좌우함과 동시에 작가의 개성을 간접적으로 글 전체에서 표출하는 일부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쩌다 읽게 되었는지는 이번에도 역시 나는 기억나지 않고, 읽은 소감을 말해 보라면 글쎄, 아무 생각 없는데, 라고 말 할 수 있는게 고작인 하드보일드 하드럭이다.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일본 소설을 읽다보면 비슷한 분위기에 휩쌓인다. 무라카미 류의 소설을 읽어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어도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을 읽어도 내용과 스토리의 성격과 진행 방식이 조금씩 차이가 있을 뿐 전체적인 분위기는 나에게 비슷한 이미지로 다가왔다. 그것이 번역의 단점일 수도 있고 내 자신의 구분하지 못함일 수도 있겠지만 어떠랴. 어쨌든 나는 문체부분은 이미 포기하고 읽었고 그래서 작가의 작품의 많은 부분을 놓친 기분이 들지만 그래도 읽었긴 읽었다 이거다.

하드보일드 하드럭에는 두가지 이야기가 나온다. 옛 연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와 결혼을 앞두고 죽음을 맞이한 언니에 대한 이야기 이다. 각자 화자는 다르고 주위 배경도 다르고 결론도 다르지만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 에 관한 점이라는 것이다.
'죽음' 이라는 부분은 나에게 상당히 예민한 부분이다. 누군가 죽었을때도, 누군가 죽을지 모를때도, 내가 죽고 싶을때도, 나에겐 언제나 예민한 부분이었고 그것은 내가 살아있으므로 어쩌면 당연한 것들일지도 모른다. 설령 나 뿐일까. 누구에게나 죽음이라는 것은 아직은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조금은 생소하여 어떤 의미에서든 환상을 갖고 있을 것이고 그럼에도 친근하고 그러면서도 두렵고 막연한것이 아닐까.

하드보일드 하드럭에서 이야기 하는 죽음은 모두 갑작스러운 죽음이다. 준비되지 않은 죽음. 미처 준비하지 못한 채 상대방의 죽음을 알게되는 그런 당황스러운 죽음. 이들이 얼마나 슬퍼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과거형으로 나오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들은 실제 상황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서 그 슬픔이 마음에 와 닿지는 않지만, 나를 그 소설에 대입시켜 볼때 나에게 소중한 누군가가 급작스레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많이 당혹 스럽고 많이 힘들고 슬플 것 같다.내가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이렇게 주저리 거린지도 모르겠다. 그냥 그랬다는 것이다. 그냥 그랬을 뿐이다. 그냥, 죽음에 대한 당사자의 모습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 대한 것들을 보았을 뿐이다.분명한 것 한가지는, 누군가 죽어도, 세상은 변함없이 돌아간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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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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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들을 대부분 싫어한다. 내가 말하는 부분이 상대에게 다른 방향으로 접수되어도 억울하고, 상대가 나에게 오해의 여지가 없도록 충분히 설명을 안해주고 앞에 주어 잘라먹고 말하는 것도 무척 화가 난다. 한번 이야기해서 끝날 것을 몇 번의 신경전과 말다툼 후에서야 풀어지는 것을 보면, 지름길을 알고선도 빙 돌아온 기분이들어서 진이 빠지고 대화하기가 싫어지는 경우도 종종있다. 물론, 내가 너가 아니고 사람과 사람은 각기 다르므로 오해라는 것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아무리 공들여 설명을 한다해도 표현방법의 차이나 관념의 차이 사고의 차이 등에서 오해는 빈번히 생긴다. 그렇게 공들여도 오해생기기 쉬운 인간들간의 관계, 그 공마저 안들인다면 얼마나 많은 오해들에 파묻혀 지내야할지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그 오해의 여지를 만들어주는 것중에 하나가 농담이라고 생각한다. 듣는사람 좋고 말하는 사람 좋고 가볍게 웃자고 하는 이야기. 물론 하는 사람도 농담으로 하고 듣는 사람도 농담으로 접수한다면 문제는 없다. 하지만, 이러면 어떨까? 하는 사람은 농담인데 듣는 사람은 진심으로 듣는다면? 하는 사람은 진심인데 듣는 사람은 농담으로 듣는다면? 무수히 많은 사람들중에서 오랜시간을 지내더라도 나와 코드가 맞는 사람을 만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 배 앓아 낳은 자식의 속도 모르는게 인간인데, 몇 년 접한(혹은 몇 번) 상대와 나의 코드가 맞을 것이라는 자부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지 궁금하다.

농담 때문에 더 불쾌해 지는 것은, 농담이란 말을 너무 빈번하게 사용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가끔, 내가 뻔히 화낼 말을 하고서는, 화내는 나에게, “농담인걸 갖고 뭘 그러냐”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농담이라면 무엇이든 다 넘어가고 웃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부터가 짜증스럽다.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는 나는 농담도 구분 못하는 사람, 혹은 속 좁은 사람이 되는데, 그럴때마다 농담이라는 단어를 아무대나 끼워넣고 있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든다. 그런 사람들의 행동이, 자신이 내뱉은 말에 대한 책임회피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단지, 듣기 좋은 말, 하기 좋은 말, 적당한 말들만 골라 해주는 사람은 너무도 많다. 적어도 내 측근들에게는 그런 흔한 말보다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솔직한 평가와 대응으로 내가 조금더 깨닫고 배우는 바가 있기를 원하는 바이다. 그렇지 않다면, 측근과 친한 사람과 친구의 의미가 무엇에 있을지도 궁금하다.

농담이라는 것은 분명 무익한것만은 아니다. 대화가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는 윤활제 역할도 하고, 적당한 때에 적당한 농담으로 사람의 기분이 좋고 분위기를 즐겁게 해줄 수도 있다. 농담이란 것은, 어쩌면 무겁고 칙칙한 대화를 조금쯤 자연스럽고 부담없게 하기 위해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

정작 문제는 “농담” 이 아니라, 아무곳에나 “농담이었어” 라고 끼워넣는 우리일지도 모른다. 단순히 농담이라는 단어의 빈번한 사용이 농담과 거짓말 변명 빠져나갈 구멍의 차이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아, 나는 역시 농담이 싫다. 단순한 “농담” 이 싫은게 아니라, 뒤죽박죽 섞이면 안될것들이 섞여진채 모두 하나로 뭉뚱그려져 농담이라고 불리우는, 그 농담 이라는 단어가 싫은것일지도 모르겠다.

박완서의 아주오래된 농담을 읽으면서, 나는 그동안 말로 표현하기도 힘들고 쉽게 이해받지도 못한 부분을 한번에 이해받은 기분이 들어 흡족했다. 조기발견 못한 암으로 시한부인 환자의 보호자에게 먼저 통고를 하고, 보호자는 대부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환자에게 알리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하는 병원생활. 사랑에 속고, 시대에 속고, 이상에 속고, 일생에 속아 산 것도 분한데 죽을때까지 기만을 당해야 옳겠냐며 이러한 거짓말을 강요당할 때처럼 의사라는 직업에 환멸을 느낀적도 없다는 영빈에게 현금은 유쾌하게 대답한다.

“얘는, 그게 어떻게 거짓말이냐, 농담이지. 듣는 사람이나 하는 사람이나 다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들어서 즐거운 거, 그거 농담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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