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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들을 대부분 싫어한다. 내가 말하는 부분이 상대에게 다른 방향으로 접수되어도 억울하고, 상대가 나에게 오해의 여지가 없도록 충분히 설명을 안해주고 앞에 주어 잘라먹고 말하는 것도 무척 화가 난다. 한번 이야기해서 끝날 것을 몇 번의 신경전과 말다툼 후에서야 풀어지는 것을 보면, 지름길을 알고선도 빙 돌아온 기분이들어서 진이 빠지고 대화하기가 싫어지는 경우도 종종있다. 물론, 내가 너가 아니고 사람과 사람은 각기 다르므로 오해라는 것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아무리 공들여 설명을 한다해도 표현방법의 차이나 관념의 차이 사고의 차이 등에서 오해는 빈번히 생긴다. 그렇게 공들여도 오해생기기 쉬운 인간들간의 관계, 그 공마저 안들인다면 얼마나 많은 오해들에 파묻혀 지내야할지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그 오해의 여지를 만들어주는 것중에 하나가 농담이라고 생각한다. 듣는사람 좋고 말하는 사람 좋고 가볍게 웃자고 하는 이야기. 물론 하는 사람도 농담으로 하고 듣는 사람도 농담으로 접수한다면 문제는 없다. 하지만, 이러면 어떨까? 하는 사람은 농담인데 듣는 사람은 진심으로 듣는다면? 하는 사람은 진심인데 듣는 사람은 농담으로 듣는다면? 무수히 많은 사람들중에서 오랜시간을 지내더라도 나와 코드가 맞는 사람을 만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 배 앓아 낳은 자식의 속도 모르는게 인간인데, 몇 년 접한(혹은 몇 번) 상대와 나의 코드가 맞을 것이라는 자부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지 궁금하다.
농담 때문에 더 불쾌해 지는 것은, 농담이란 말을 너무 빈번하게 사용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가끔, 내가 뻔히 화낼 말을 하고서는, 화내는 나에게, “농담인걸 갖고 뭘 그러냐”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농담이라면 무엇이든 다 넘어가고 웃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부터가 짜증스럽다.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는 나는 농담도 구분 못하는 사람, 혹은 속 좁은 사람이 되는데, 그럴때마다 농담이라는 단어를 아무대나 끼워넣고 있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든다. 그런 사람들의 행동이, 자신이 내뱉은 말에 대한 책임회피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단지, 듣기 좋은 말, 하기 좋은 말, 적당한 말들만 골라 해주는 사람은 너무도 많다. 적어도 내 측근들에게는 그런 흔한 말보다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솔직한 평가와 대응으로 내가 조금더 깨닫고 배우는 바가 있기를 원하는 바이다. 그렇지 않다면, 측근과 친한 사람과 친구의 의미가 무엇에 있을지도 궁금하다.
농담이라는 것은 분명 무익한것만은 아니다. 대화가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는 윤활제 역할도 하고, 적당한 때에 적당한 농담으로 사람의 기분이 좋고 분위기를 즐겁게 해줄 수도 있다. 농담이란 것은, 어쩌면 무겁고 칙칙한 대화를 조금쯤 자연스럽고 부담없게 하기 위해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
정작 문제는 “농담” 이 아니라, 아무곳에나 “농담이었어” 라고 끼워넣는 우리일지도 모른다. 단순히 농담이라는 단어의 빈번한 사용이 농담과 거짓말 변명 빠져나갈 구멍의 차이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아, 나는 역시 농담이 싫다. 단순한 “농담” 이 싫은게 아니라, 뒤죽박죽 섞이면 안될것들이 섞여진채 모두 하나로 뭉뚱그려져 농담이라고 불리우는, 그 농담 이라는 단어가 싫은것일지도 모르겠다.
박완서의 아주오래된 농담을 읽으면서, 나는 그동안 말로 표현하기도 힘들고 쉽게 이해받지도 못한 부분을 한번에 이해받은 기분이 들어 흡족했다. 조기발견 못한 암으로 시한부인 환자의 보호자에게 먼저 통고를 하고, 보호자는 대부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환자에게 알리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하는 병원생활. 사랑에 속고, 시대에 속고, 이상에 속고, 일생에 속아 산 것도 분한데 죽을때까지 기만을 당해야 옳겠냐며 이러한 거짓말을 강요당할 때처럼 의사라는 직업에 환멸을 느낀적도 없다는 영빈에게 현금은 유쾌하게 대답한다.
“얘는, 그게 어떻게 거짓말이냐, 농담이지. 듣는 사람이나 하는 사람이나 다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들어서 즐거운 거, 그거 농담아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