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투의 유혹 - 일본어가 우리말을 잡아먹었다고?
오경순 지음 / 이학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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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민족, 인종의 유입으로 우리 민족의 순수함이 더렵혀지고 있습니다!'

 

'외래 종의 유입으로 우리 고유의 생태계와 먹이사슬이 붕괴되고 있습니다'

 

전자는 딱 돌 맞기 쉬운 말(비록 100년전만해도 통용되었겠지만)이라면, 후자는 (아마도) 누구나 동의하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언어'는 이 둘 가운데 어디에 위치하는 것일까? 언어는 인간도 아니고, 살아있는 생물도 아니기에 위의 두 가지 주장의 사이 어디쯤, 아마도 애매한 곳에 위치하지 않을까 싶다. 다시 말하면 어느 쪽으로도 주장할 수 있는 것이고, 어느쪽도 틀리다, 혹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순수한 우리말'을 사용하자는 주장은 의미가 있고, 필요하다고 생각되지만, 유입된 외국어를 적절히(?) 사용하는 형태를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조금 불편하게 느껴진다.

 

이러한 외래어 가운데서도, 일본어의 지위는 조금 특별하다. 식민지의 아픈 경험이 남아 있기에 일본어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있으면서도, 원래부터 '한자문화권'이라는 오랜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고 있고, 이른바 '근대화'와 함께 새로 만들어진 단어들('민주주의'마저도) 또한 일본어에서 시작되었다는 복잡한 사연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일본어투의 한자어는 전문적이고 권위가 느껴지는 방향으로(가령 법조계, 혹은 법조문에서의 용어 사용이나 철학용어-욕을 많이 얻어 먹는 '차연'이라는 단어를 떠올려보라) 사용되는 한편, 다른 의미에서의 '전문적' 용어, 이른바 업계 용어(가령 '노가다'판에서의 일본어, 군대의 일본어, 심지어 기자들의 업계용어, 혹은 은어-가령 사츠마와리-등으로)로서도 사용된다. 전문성과 '쌍스러움'이 혼재된 일본어의 활용이, 나는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 말을 다양하고 풍성하게 만들어준다고도 생각한다.

 

물론 일상언어에서 어느정도까지 일본어를 '허용'할 수 있는가는 복잡한 문제다.

가령, 아니뗀 굴뚝에 연기나랴를, 아니뗀 엔또츠에 연기나랴 라고 말한다면, 나는 (당연하지만) 반대한다. 반대라기 보다, 굴뚝을 엔토츠라고 말하는 사례를 적어도 내 주위에서는 거의 보지 못했다.

 

하지만 가령 저자가 일본어의 남용사례로 들고 있는 '야리꾸리'(やり繰り 솔직히 이 단어가 일본어에 이렇게 정확히 대응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라는 말은 어떨까. 나는 야리꾸리가 획득한 '우리말' 고유의 특성을 존중(?)하고 싶다. 야리꾸리는 '거시기'만큼이나 여러 의미로 해석되고 활용되고 있다고 보이며, 적어도 나에게 야리꾸리는 '아싸라비아'만큼이나 우리말과 같은 '친근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또한 '왜냐하면~ 때문이다', 혹은 '만약~한다면' 을 일본어식 해석으로, 즉 앞부분의 '왜냐하면', '먄약' 이란 말은 원래부터 우리말에 없는 불필요한 부분이라는 지적도 수긍하기 어렵다. 원래부터 없었다고(아니 애초부터 '원래부터'는 언제부터인가)해서 사용해서는 안되는 것인가, 오히려 문장의 성격과 의미를 더 명확히 해주고 있지 않은가. 가령 '원래부터' 우리 말에 과거 분사형의 동사활용이 있었는가, 지시대명사에 대응하는 단어들은 있었는가,를 생각해보면 외국어의 수용과정에서 우리 말은 좀더 풍부(적어도 '변화')해 질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언어가 비록 생물은 아닐지언정, 외국어(문화)에 반응하며 계속 진화(양보해서 '변화')해 나가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나는 우리말이이 좀더 풍부해 지길, 유연하게 사용되길 바란다.

 

여러가지 의견을 달리하는 곳이 있었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고, 의외로 몰랐던 사실도 많이 알게 해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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