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믿어선 안 될 것은


삶을 부정하는 인간의 나 자살할 거야, 란 떠벌림이다. 그런 인간이 가야 할 길은 알콜릭 정도가 적당하다. 삶을 인정하지 않고선 실제로 자살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뭐랄까. 결혼을 한 인간만이 이혼을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 수 없다. (중략) 물론 이것은 험담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살아갈 수 있는 인간들이다, 라는 얘기다." 

(박민규, <아침의 문>, 2010년 이상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 2010, p.16)


오랜만에 박민규의 <아침의 문>이 생각나서 재독하다가 문득 나는 "살아갈 수 있는" 쪽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에는 

"살아갈 수 없는" 자들도 있다. 안심하기도, 아니기도 했다. 아직 살아갈 수 있으므로 나는 삶을 인정하지 않은 것 같았다. 


삶은, 


수면제를 한 사발 먹고도 자살에 실패한 자의 끊임없는 구토같고, 

극심한 구토의 끝에 따라 나올 것만 같은 내장처럼 징그럽고,  

어떤 우아함이나 예의와도 어울릴 수 없으며, 

서로를 괴물이라 부르기엔 너무 적나라하므로 예의상 만들어낸 인간이란 단어처럼 기만으로 가득 찬데다,

제 아이를 벤 여자의 아랫배를 칼로 누르며 여기서 지워줄까 하고 속삭이는 남자처럼 폭력적인데, 

아무에게도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이 아무도 없는 상가 건물 옥상에서 혼자 엎지르듯 아이를 낳고 도망치는 여자처럼 미련하기까지 하나, 

싸늘한 콘크리트 바닥에서 탯줄을 몸에 감고 우는 버려진 아이처럼, 

누군가 안아들고 달래줄 수 밖에 없는, 

그러나 그 이상은 누구도 어떤 것도 해 줄 수 없는,

그런 것이다. 


라고 박민규는 말한다. 그런 것임을 인정해야 그것을 떠날 수 있다 한다. 아니, 그런 것임을 인정해 버리면 살아갈 수가 있나?



아이를 잉태시킨 애인에게 구타를 당하고, 임신을 들키지 않으려고 배에 압박붕대를 두르고 계산대를 지켜야 하는 만삭의 알바생처럼, 누구나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사람으로부터 삶의 민낯을 잠시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저들의 경험처럼 최악은 아닐지라도 인간의 지리멸렬함을 맛보기엔 충분한 경험. 그것은 "오랜 시간 부패한 온갖 욕들이"(p.31) 끊임없이 솟구치도록 몸서리쳐지는 것이다. 그래서 죽다 만 인간이 비스킷과 우유를 먹고 토할 때, 미련하고 불쌍한 미혼모가 난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 하고 울부짖을 때, 어떻게든 죽어보고자 다시 자살을 시도할 때, 누구의 축복도 받지 못한 채 단지 실수로 만들어진 생명이 태어날 때, 편안히 책 읽던 자세는 흐트러지고, 책장을 넘기던 손은 나도 모르게 입을 가린다. 


박민규는 삶의 더러운 맨살을 그 땀구멍과, 닭살 위로 돋은 시커먼 털과, 흉터와, 피가 덜 마른 상처와, 때까지 그려내는 작가다. 원래 이런 거야 그러니 어쩌겠어 당신도 별 수 없어 받아들여 하고 들이민다. 보통은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나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처럼 유머를 통해 감동으로 승화시키는데 탁월하지만, 일단 무겁게 쓰려고 마음 먹으면 단편이든 장편이든 거대한 중력의 블랙홀을 만든다. 몇 번을 다시 읽어도 똑같은 힘으로 빨려들어간다. 울 수도 없을 만큼 마음이 무거워진다. 대단한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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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문 작가가 9 만에 내놓은 소설집 『오리무중에 이르다』 는 죽고 싶지 않으나 살아야 이유를 하나도 발견하지 못하는 괴로움에 대하여 편의 소설 모음이다. “ 세계에 반드시 일어나야 같은 것은 없었다.” 출판사의 소개 문구만 보고 덜컥 샀는데, 묘한 기시감에 저자 검색을 보니 2014년도에 백다흠, 백가흠 형제가 기사가 뜬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5091932085&code=960100). 오랫동안 알코올 중독과 우울증으로 고생한 하다. 우울의 손아귀에 목덜미를 잡혀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의 앞뒤 없는 중얼거림 같은 느낌. 기시감은 거기에서 오는 것이었고, 그래서 책의 리뷰를 쓰는 것은 내게는 특히 어렵다


개인이 자신의 삶에서 떨어져 나갈 , 너무 멀리 버려 마침내 나의 구체성을 잃고 인간의 으로 추상화되어 버릴 삶이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 (p.100), “어디를 펼쳐도 막다른 골목 같은 것들이 연속해서 나오” (p.100),  “그리고 모든 것이 너무도 진부”(p.100) 진다. “모든 생각과 감정과 행위와 동작 들이 너무도 오래도록, 수십만 혹은 수백만 반복된 것들이었고, 모든 것들이 낡을 대로 낡은 유물들처럼”(p.100) 여겨져 이상 끝이 없는 무의미한 반복() 참여하고 싶지 않은 욕구, 허무를 끝내고 싶은 욕구로 이어지는 우울에 떨어지는 것이다.

 

책에는 편의 서로 다른 소설이 실렸지만 사실 이러한 구분이 무의미하다. 심지어 하나의 안에서도 서사는 이어지지 않고, 주인공의 정체는 오리무중이다. 배경도, 사건도 일치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애당초 글들을 소설이라 불러야 할지도 의문스럽다. 그에게 소설 쓰기는 이제 일기를 쓰는 것과 몹시 유사한 같다.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이야기도 작가가 이해할 없는 것을 글로 수는 없으므로 모든 글에는 어떤 면에서든 작가 자신의 이야기가 반영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설집은 작가의 배경을 알고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매우 자전적이라고 생각하게 만들 만큼 알코올중독과 우울과 그에 따른 여러 증상의 묘사가 생생하다. 생각은 시종일관 맥락 없고 부조리하게 전개되는데, 적어도 소설 쓰기에 대한 작가의 의도만큼은 정확하게 전달된 같다.


자신으로 말할 같으면 갈수록 소설을 쓰는 거의 불가능하게 여겨졌는데 이제는 거의 소설이 써질 없게 구상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플롯이나 서사나 배경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인물조차 등장하지 않는, 등장한다 해도 인물이 아무것도 생각이 없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끝내 아무것도 하지 않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그래서 소설 속에서 펼쳐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소설만을 반복적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그러니 소설이 써질 리가 없었는데, 인물뿐만 아니라 사물조차도, 아무것도 등장시키고 싶지 않았다.”(p.73)


요컨대, 그는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고, 실제로 아무 것도 없었고, 아무 것도 없는 <어떤 불능 상태> 빠져 무엇을 써야 할지 이상 없게 되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에서 끊이질 않는 생각의 잡음을 어떤 형태로든 - 맥락이나 형태나 조리에 상관없이- 토해낼 밖에 없었던 같다


언젠가 이후로, 아무런 맥락도 없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얘기를 하는, 그래서 아무것도 말하는 것이 없는 것에 대해 말하는,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해 말하는, 그래서 사실 무엇에 대해서도 할말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그래서 어쩌면 말하기의 끝에 대해 말하는, 그리고 모든 것들에 대해 말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거의 필사적으로 말하는,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이런 글들을 쓰며, 삶을 허비하는 삶을 바치는, 그럼에도 다른 삶은 꿈조차 수도 없는, 그럼에도 다른 삶은 꿈꾸고 싶지 않은, 남은 삶은 남은 삶을 허비하는 마저 바칠 것이 분명한 이상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그런 것쯤은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pp.99~100)


나로서는 ( 소설이 매우 자전적이라는 가정 하에) 그가 글들을 쓰지 않았다면 심한 우울의 상태로, 어쩌면 삶을 마무리하는 형태이거나 혹은 이상 예전과 동일한 사람이라곤 없는 폐인으로 전락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을까 싶다. 토해내는 행위는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 우리의 시한부 인생을 조금 연장하는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이제 그에게 인생은 향이 날아가 이상 맛을 느낄 수도 없게 되어버린 오래 차와 같은 것이다.


지금 마시고 있는 차라는 생각을 정신을 가다듬고 단단히 하지 않으면 차라는 것도 모를 만한 맛이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차라는 믿음을 잃지 않는 필요한 같았고, 믿음을 잃는 순간 차는 차가 아닌 같았다. 하지만 다시 모금을 마시고 나자 믿음 또한 사라져버렸다. 차이지만 차가 아닌 것을 마시고 있는 같았다.”(pp.67~68)


지금 살고 있는 인생이라는 생각을 마음 단단히 먹고 되새기지 않으면 살아있다는 사실도 모를 만큼 무미건조하고, 이것이 삶이라는 믿음을 잃지 않는 필요한 같고, 믿음을 잃는 순간 삶이 아니게 같은 절박함. 모든 것을 알면서도 막상 하루를 살다 보면 숨쉬지만 살아 있지 않은 듯한 허무. 삶에 대한 같은 시각은 ( 것으로든, 죽은 것으로든) ‘존재함 Being’ 대한 관찰로 이어진다.


삶은 밤의 껍데기를 벗기고 보니 일곱 일곱 속에 열한 마리 벌레가 들어 있었다. (……) 구멍 속에 죽어 있는 (……) 벌레들을 가까이서 보고 있자 아주 친근하게 느껴졌다. (……) 밤벌레들은 보란듯이 죽어 있었다. 죽어 있는 모든 것은 어떤 점에서는 보란듯이 죽어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었다. 그렇게 말고 달리 있기는 어려우니까. 아니, 보이는 모든 것이 어떤 점에서는 보란듯이 있었다. 그와 동시에 대체로 사물들을 아무렇지 않게 혹은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있었고, 죽어 사물이 된 사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물론 무심한 것 같은 사물들이 무정하거나 무참하거나, 암담하거나 참담하게 보이는 순간들이, 평소 감추고 있던 무정함과 무참함과, 암담함과 참담함을 드러내는 것 같은 순간들이 있었다.”(pp.226~227)


아무렇지 않게 보란듯이 존재하는 타인들. 사람들. 죽은 사람들. 사물들. 나만 빼고 아무렇지 않게 보란듯이 존재하는 세상. 어쩜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보란듯이 수백만 되풀이되어 진부한 삶을 계속할 있나 하는 의문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존재의 틈새에서 암담하고 무참한 생의 본질을 포착할 만큼 예리한 정신이 그를 괴롭힌다. 때문에 밤이나 낮이나 잠들지 못하는 불면의 저주에 시달려, 몽롱한 비현실감 속에서, 깨어 있는 것도 잠든 것도 아닌 24시간을 보내야만 하는 우울의 감옥에서 쓰여진 같다.


하루종일 낮도 밤도 아냐, 낮도 밤도 눈도 감은 눈도 아닌 눈으로 보내고 있으니, 눈도 감은 눈도 아닌 눈이 보기엔 밤도 낮도 밤도 아니야, 하고 생각했다.”(p.101)


무의식과 의식의 중간에 붙들려 어디에도 기댈 없는 ()의식 상태에서 스스로에 대한 통제를 잃고 신경을 태우는 듯한 생각의 속도대로 받아 적은 듯한 느낌이다. 불안이나 존재의 위화감, 생의 무의미나 허무의 감정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당황스럽거나 매우 흥미롭거나 하나일 같다. 우울을 모르는 사람에게 이것은 실험적인 글쓰기이고, 아는 사람에게는 죽고 싶으나 죽고 싶지 않다는 울음이다.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인정할 없게 사람의 살고 싶다는 외침. 그래서 공감하고, 때문에 꼼꼼하게 읽어나가는 것이 힘이 든다. 어쩌면 쓸데없이 깊게 읽는 건지도 모른다. 작가가 의도치도 않은, 없는 의미를 읽어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주인공의 밑도 끝도 없는 주절거림은 비슷한 고통 속에서 어쩔 줄을 몰랐던 과거의 어느 시점을 회상하게 경험으로부터 텍스트를 읽게 만든다.  

 

번째 <개의 >에서 화자는 어린 강아지를 무릎에 올려 놓고 이유 없이 귀를 접었다 펴는 행위를 반복한다.


나는 도리 없이 계속해서 강아지의 귀를 접었다 폈다 수밖에 없었는데, 이제 강아지는 약간 겁을 먹은 같았고, 자신에게 가해지는 일이, 어쩌면 강아지로서도 처음 경험하는 일이 언제 끝날지 없다는 사실에 강아지가 겁을 먹은 것은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지만, 표정은 겁을 먹은 것만도 아닌 같았고, 어느 쪽이냐 하면 모르겠다는 것에 가까웠다.”(p.15)


한편으로 나는 강아지가 느낌이다. 누군가 귀를 계속 접었다 폈다 하는데 의중도 언제 끝날지도 없는 느낌. 힘겨움과 함께, 저에게 당신의 기나긴 우울과 광기에 대한 지나치게 솔직하며 대중없는 독백을 읽게 만드시는지요 하고 묻고 싶은 기분에 휩싸인다. 아마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래의 인용이 아닐까 싶다.


어떤 불능 상태에 이르러 무의미한 글쓰기를 반복하는 것이 사실상 있는 것의 전부가 되었을 기대할 있는 것은, 무의미한 글쓰기를 반복하는 또한 가능하지 않은, 완전한 불능 상태에 이르는 인지도 몰랐다. 생각들이 반복되었다. 어떤 반복이 원하는 것은 어떤 상태 자체이므로.”(p.265)


확실히 독특하다. 소설의 주인공이 저자 본인이든 아니든, 적어도 그가 완전한 불능상태에 이르지 않기를 바란다. 아무렇지 않게는 아닐지라도, 이렇게 아니게 달리 존재하기는 어려우니 이렇게 라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면 좋겠다. 오래 되어 본래 무슨 차였는지조차 알기 힘들 만큼 무향무미해 차일지라도 차는 차라는 믿음을 잃지 않으면 좋겠다. 그래서 조금 더 부조리하고, 더 맥락 없고, 더 자신 있게 오리무중이면서도 여전히 예리한 글로, 더 흥미롭게 독자를 매혹해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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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적인 도시 - 뉴욕 걸어본다 3
박상미 지음 / 난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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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먹은 안정제의 기운이 떨어지고 저녁 약을 먹기 직전 자정 무렵의 생각의 속도가 좋다. 너무 빨라 타이핑으로는 물론이고, 말로도 따라갈 수 없는 생각의 점핑. 여기서 저기로 핑 핑 날아다닌다. 술에 취하는 것처럼 생각에도 취할 수 있다. 이것도 일종의 중독. 


한병철의 <타자의 추방>은 밀도가 높아 좀처럼 읽히지 않는다. 미약한 정신으로는 따라갈 수 없어서, 박상미 에세이집 <나의 사적인 도시>를 뒤적거린다. 예술과 삶에 관한 저자의 전반적 견해랄까, 취향이랄까 하는 부분에는 그다지 동의하지 않지만, 장르를 불문하고 다양한 예술작품과 작가들 속을 넘나들며 뉴욕에서 오래 타향살이 해 온 그녀의 독특한 경험이 잠깐씩 책장을 멈추게 만드는 통찰을 보여준다. 예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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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은 시간 개념이 없다. 그래서 과거를 지난 일로 취급할 줄 모른다. 의식은 시간이 갈수록 지난 일을 잊기도 하지만 무의식은 그럴 줄을 모르고, 계속해서 그 일을 '살고 있는' 것이다. 무의식 속의 일들이 현재형으로 존재하는 방식은 아무래도 다양할 것이다. 아침을 괴롭히는 꿈일 수도 있고, 불면의 밤일 수도 있고, 엉뚱한 순간에 떨어지는 눈물일 수도 있고, 한쪽 입가에만 생긴 주름일 수도 있고, 뜻하지 않게 종이 위에 모습을 드러내는 어떤 원더풀한 단어들일 수도 있다. 무의식에 대한 의식의 지식은 매우 제한적이어서 우리가 지금 어떤 과거를 살고 있는지 알지 못할 뿐이다. (176쪽~1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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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있는 약이 기억에 약간 영향을 주는데, 과거에 있었던 일들은 뜬금없이 생생하게 최근의 일처럼 재생되고, 바로 하루나 이틀 전의 일들은 대개 한 달쯤 전의 일처럼 모호하게 흐리다. 심지어 한 순간, 예컨대 누군가와 나눈 대화, 내가 적었던 어떤 글과 같은 순간들이 통째로 편집되어 날아가버리고 전혀 기억을 못하는 일도 생긴다. 그래서일까. 저 구절을 읽는 순간 생애 어떤 때보다 무의식에 가까운 요즘을 새삼 돌아보게 된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계속해서 그 일을 '살고' 있는 무의식. '어떤 일도 잊지 못하는 사람'의 괴로움을 유사 체험하고 있는 요즘, 공감이 가는 구절이다. 나의 경우 재연되는 기억은 주로 깊이 상처 받았던 순간, 처음 겪은 모멸의 순간, 당황과 수치, 배반과 분노의 순간들이다. 사무실에서, 학교에서, 식당이나 카페에서 이유도 없이 갑자기 그런 순간들로 소환당해 다시 한 번 배반당하거나, 상처받거나, 모멸과 자괴감에 주먹을 움켜쥐게 된다. 


멍하니 생각 속에 잠시 가라앉았다가 다시 읽어내려간다. 이 책의 가치를 높여주는 것은 방대한 양의 예술 정보에 있다. 처음 만나는 화가, 시인, 소설가, 조각가, 팝아티스트들이 책장 사이 사이에서 반짝이며 독자를 기다린다. 그들이 소개되는 방식은 우아하면서 시적이다. 예컨대, <월든>으로 유명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산책에 대해 남긴 다음과 같은 말이 인용되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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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는 아무리 짧은 산책이라도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모험심을 갖고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만약 부모와 형제와 아내와 자식과 친구들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리고 그들을 다시 보지 않을 생각이라면, 만약 빚을 다 갚았고 유언을 썼고 온갖 일들을 다 처리했다면, 당신은 자유로운 인간이다. 당신은 비로소 걸을 준비가 된 것이다."  (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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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나가 듯 가볍게, 어디 멀리 가지 않을 것처럼 턱 턱 집을 걸어나와 그대로 계속 걸어 사라지고 싶다. 나는 걸을 준비가 되었나. 언젠가 썼던 유언은 아직도 유효한가. 빚은 없고, 세금도 다 내었고, 꼭 처리해야할 일도 없는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날 준비는 되었나. 

잠시 손이 멈추었다. 다시 스스륵 책장을 넘겨 본다. 에세이집이라 앞에서부터 차례로 읽을 필요가 없어 책상 한 켠에 두고 머리가 복잡할 때, 활자가 필요할 때 부담없이 읽기에 좋다. <깨질 수 밖에 없는>이란 제목이 눈에 들어와 꼼꼼히 읽어 본다. 월리드 베쉬티 Walead Beshty 라는 작가를 나는 처음 보는데, 그는 FedEx 상자 안에 꼭 맞는 크기의 육면체 유리 상자를 아무런 완충제 없이 넣어 전시장으로 배달시킨다고 한다. 

출처: http://www.thisiscolossal.com/2017/01/fedex-works-walead-besh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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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블랩 같은 보호막 없이 페덱스 상자에 꽉 맞는 육면체 형태의 긴장으로 버티는 유리 상자는 도착하면 물론 깨져 있다. 수없이 금이 갔지만 그 형태는 간직한 채, 어딘가 다다르기 위해선 반드시 깨져야 하는 무언가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1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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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태는 간직한 채, 어딘가 다다르기 위해선 반드시 깨져야 하는' 것이라...... 여기서 누구나 인생을 떠올릴 것이라 생각한다. 무수히 금이 가 형태를 유지하기 힘든 요즘의 나는, 아직 덜 깨진 것인지, 너무 많이 깨져서 힘이 드는 것인지, 얼마나 더 깨져야 할 것인지를 잠시 생각해 본다. 굳이 시도하지 않아도 되었을 모험, 굳이 겪을 필요 없었던 사랑, 굳이 집착할 필요 없었던 성취들이 쩍 쩍 금을 내고 있었던 것일까. 아주 작은, 공기가 겨우 통할 만큼의 틈이라도 벌어지면 와장창 무너질 것 만 같다고 생각하며 훌쩍 책장을 넘기는데, 필립 로스의 책 <유령 퇴장 Exit Ghost>의 한 구절이 인용된다. 


******

노년이란 걸 상상할 수 있어? 당연히 못하겠지. 나도 못했으니까. 어떤 건지 전혀 몰랐지. 그림을 잘못 그렸던 것도 아니야. 전혀 그림이 없었던 거지. 아무도 상상해보는 것조차 원하지 않아. 직접 당하기 전까지 원하지 않는 거지. 이게 다 결국 어떻게 될 거냐고? 둔감함이야말로 필수적이지. 내 인생보다 앞서 있는 어떤 인생도 상상할 수 없다는 건 당연한 일이야. (중략) 중년이란 많은 사람들에게 힘든 시기지. 하지만 노년은? 재밌게도 이 시기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이 그 안에 있으면서도 완전히 그 밖에 있게 되는 그런 시기야. 내내 자신의 소멸을 관찰하면서 계속되는 활력 때문에 그 소멸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거지. 심지어는 완전히 독립된 것 같기도 하지. (중략) 그 객관적인 거리의 잔임함이야 말로 끔찍한 거야. (209쪽)

******


자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와아!! 하고 기대감에 부풀었으나, 그 거리감이야 말로 끔찍하게 잔인하다는 마무리에 김이 샌다. 모르겠다. 아직 중년도 되지 않은 나로서는, 그닥 좋아하지 않는 자의식과 함께 한 몸에 갇힌 느낌이고, 통계적으로 본다면 이대로 최소 수십 년 동안 더 이 룸메이트와 화해하고 어떻게든 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이 모옵시 짜증난다. 자의식이라니.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밖에 있단 건 어떤 느낌일까. 여기서 이렇게 행동하고 숨쉬고 있는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듯 통제불능의 느낌인 걸까. 알 듯 모를 듯 하지만 뭔가 끔찍한 느낌일 것 같기도 하다. 노년이 오면 편안해 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금이 갈 일도, 그 금이 형태를 무너뜨릴 만큼 치명적일 일도 더 이상 없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는데. 


이렇게 발길 닿는 대로 산책하듯이 책을 탐독한다. 시종일관 밀도가 높은 것도, 가슴 저미는 서사가 있는 것도 아니라 오히려 자주 손이 가는데, 그렇다고 소일거리를 위한 책은 절대 아니다. 글, 현대미술, 패션, 음악 등 장르를 불문하고 이 정도 큐레이션을 이 정도 깊이로 경험할 수 있는 책도 드물다. 엄마 새가 먹이를 꼭꼭 씹어서 소화되기 쉽도록 만들어 새끼 새를 먹이는 것 같다. 저자만의 통찰력 있는 필터링으로 현대 예술은 의미불명의 잡동사니가 아닌, 세상에 대한 유일무이하고 재미있는 해석이 되고, 그로 인해 독서는 여유롭고 즐거운 산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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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죽음에 관한 책 두 권을 동시에 읽게 되었다. 프랑스 철학자이며 유대인으로서 두 번의 세계 대전을 모두 겪어야 했던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1903~1985)의 『죽음에 대하여 Penser La Mort?』와, 정신건강의학 전문의 이병욱의 『자살의 역사』다.



장켈레비치는 1966년에 출간된 죽음 La Mort』라는 저서를 통해 인간이 결코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단 한 가지, 곧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질문을 탐구했다. 아직 국내에 죽음 La Mort』은 번역되어 나오지 않았고, 이 책은 장켈레비치가 여러 매체와 나누었던 대담을 모은 것이다. 죽음의 의미, 죽음에 대한 종교적·일반적 태도, 안락사 논쟁과 죽을 권리, 죽음에 대한 불안과 폭력 등이 다루어 진다. 대담집의 장단점을 모두 가진 책이다. 죽음에 대한 광범위한 내용을 이론서보다 쉬운 언어로 다루지만 충분한 이해를 도모하기엔 깊이가 부족한 감이 있다. 사실 다니엘 디네와의 대담을 다룬 첫 장 <돌이킬 수 없는 것>과, 조르주 반 우트와의 대담을 쓴 두 번째 장 <죽음에 대한 성찰과 태도>를 제외하고는 조금 지루했다. 아무래도 한 세기를 먼저 살다 간 철학자인만큼 그 사이 의학 발달과 사회의 고도화로 생명 연장과 질병의 극복, 그리고 죽음의 질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어 그의 죽음 사유의 기초를 이루는 사실관계가 다소 시대에 뒤쳐진다. 그리고 첫 장 이후에 이어지는 내용들에서는 질문의 날카로움에도 불구하고 장켈레비치가 질문의 핵심을 비켜간 듯한 답변도 꽤 있다. 

다만 첫 두 장에서는 죽음을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가능한지를 다루고 있어 흥미로웠다. 예컨대 디네는, 죽음은 생각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살아볼 수 없는 것이며 삶을 무화시켜버리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삶은 바로 이 죽음의 가능성 때문에 팽팽하게 활력과 긴장을 유지하는 이유에 대해 질문한다. 이에 대해 장켈레비치는 다음과 같이 베르그송을 인용하여 설명한다.


(베르그송을 인용하며) 눈이 없이는 볼 수 없으므로 눈은 분명히 시각 기관이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눈이 시각에 장애가 된다고 말입니다. 눈이 없으면 훨씬 더 잘 볼 수 있으리라는 것이 아니라 다만 눈이라는 것 자체가 시각을 제한한다는 말입니다. 두 눈을 가졌다는 것은 본다는 것을 뜻하지만 동시에 단지 제한적으로만 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 이는 다른 어떤 경우에든 타당한 얘기입니다. 나는 육체를 통해 여기에 현존하고, 표현하고, 존재하고, 살아가지만, 그와 동시에 육체로 인해 나는 다른 곳에 존재하지 못하고, 각종 질병과 온갖 육체적 문제에 좌우됩니다. (……) 어떤 관점에서 보면 언어는 표현에 장애가 된다고 할 수 있지만, 자기표현에 장애가 있다는 점 때문에 인간의 표현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표현의 장애가 곧 표현의 수단이 됩니다. 죽음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지요. (본문 20쪽~22쪽)


죽음은 삶의 중단이므로 존재의 관점에서 보면 일종의 장애이지만 동시에 그 때문에 '누군가 이 세상에 살았음을, 그가 존재했음을 영원히 확정'(본문 44쪽)짓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죽는다는 것은 존재의 조건입니다. 죽음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동시에 의미를 제거한다고 말한 사람들이 있는데, 저도 그 의견에 동의합니다. 죽음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비의미non-sens입니다. (본문 45쪽)


그러나 자의식을 가진 존재로써 인간의 실존은 중단없이 '계속 나아감'을 요구하므로 우리는 취약한 육체의 구석 구석으로 언제든 파고들 수 있는 죽음의 가능성을 외면한다. 만약 우리가 완전한 끝인 죽음을 향해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으며 언제 죽을지조차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수긍한다면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라도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죽음의 보편성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일상에서 스스로의 죽음은 필연이 아닌 '하나의 가능성'으로만 느껴지는 것이며, 이러한 기만은 '계속됨을 전제로 하는 실존의 필연성'에 의해 정당화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와 비슷하게 죽음에 대한 불안도 자아를 '조망'할 줄 알고, '존재한다는 사실의 놀라움을 아는' 인간에게만 특유한 것으로 설명된다. 


개와 고양이 같은 동물들도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존재하지만 그 어떤 동물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놀라워하지는 않습니다. 반면에 인간은 존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존재한다는 사실을 놀랍게 여깁니다. 전적으로 부조리하고 근거도 없는 놀라움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바로 인간의 힘입니다. (본문 63쪽)


이것을 인간의 힘으로 불러야할지 약점으로 불러야할지 의문스럽지만, 어쨌거나 그는 인간의 자의식을 죽음을 인식하는 불안의 근원으로 보며, 종교의 존재 역시 바로 이 죽음에 대한 인간 본연의 불안을 처리(위로)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본다. 신자와 비신자의 죽음에 대한 태도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신자에게는 종교에서 제시하는 내세가 현세와 동일하게 - 마치 두 번째의 삶과 같이 - 실재로 존재하는 것으로써 가치를 지니므로 죽음이 또 다른 삶의 시작이 되지만, 비신자에게 죽음은 완전한 無로 돌아가는 것이므로 그는 죽음에 관해 사유할 수 밖에 없으며, 그 결과는 곧 '죽음을 전혀 모르며 알 수 없다'는 태도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왜냐하면 죽음이야말로 경험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이며, 만약 그에 대해 사유한다 하더라도 '내가 죽음에 대해 상상하는 모든 것은 삶의 변이형이고, 여전히 삶'(본문 58쪽)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신자에게 있어서 '죽음에 대한 태도'는 '삶에 대한 일반적인 태도'일 수 밖에 없고, 죽음에 대한 성찰은 곧 실존에 대한 진지한 탐구이다. 

그래서 종국에는 무로 돌아갈 존재에게 중요해 지는 것은 자기 삶의 의미를 보다 큰 전체 속에서 보는 것, 즉 사회 속에서 나의 존재가 타인에게 주는 의미가 된다. 


나의 삶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나의 삶 전체는 나 자신에게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니 너무 깊이 사색에 빠지거나 인간 실존의 일반적 의미나 나의 실존이 나 자신에게 갖는 의미에 대해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는 그 의미를 찾을 수 없을 테니까요. (……) 한 생애는 그것이 다른 무언가에 포함될 때 의미를 갖습니다. 제 연구는 제가 강의를 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고, 그런 식으로 생이 끝날 때까지 의미가 조금씩 이어집니다. 그렇지만 하나의 총체로서 저의 실존은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는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제 자신에게는 의미가 없습니다. (……) 나의 일생을 보다 넓은 전체 속에 위치시키지 못한다면, 삶은 아무 의미 없는 지리멸렬한 지속에 불과하게 됩니다. (본문 33쪽~35쪽)


얼마 전 미국의 저널리스트 시베스천 영거가 쓴 책 『트라이브, 각자 도생을 거부하라』에서 '사회적 연대감'을 현대사회에서 인간 생존의 필수 조건이라 설파하던 것이 생각나는 부분이다.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유효한 통찰이 '공동체 속에서 찾을 수 밖에 없는 개인의 삶의 의미'라니. 그것이 죽음 앞에서 인간이 반복적으로 발견할 수 밖에 없는 진실이라면 단순히 사회통합과 구성원 통제를 목적으로 하는 프로파간다는 아니리란 생각이 든다. 


실존자에게 있어 죽음의 의미, 죽음을 사유하는 것의 의미,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흥미롭게 논파한 책이다. 그의 저작 죽음 La Mort』이 번역 출간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병욱의 자살의 역사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동서양 인물들의 자살 사례 모음집이다. 구미가 당기는 제목과 함께 정신건강의학 전문의라는 저자의 약력을 보고, 자살에 대한 역사적·이론적·경험적·철학적 분석과 논의가 펼쳐지기를 내심 기대하고 샀으나, 전혀 다른 구성에 다소 실망했다. 책은 제1부 <서양의 죄의식 문화와 자살>, 제2부 <동양의 수치심 문화와 자살>, 제3부 <한국인의 한과 자살>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살자 한 명 당 약 두 쪽 정도의 지면을 할애해 자살하기까지의 생애를 간략하게 정리했다. 

굳이 이렇게 세 부로 나눈 이유에 대한 언급과 분석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 부분이 없다. 저자는 서문에서 한국의 이례적으로 높은 자살률을 언급하며 자살의 동기와 배경을 이해함으로써 앞으로도 벌어질 비극적 자살들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되고자 했다고 집필 의도를 밝히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자살 동기나 배경에 따른 분류, 분석, 이론 확립, 한국 사례의 특수성과 보편성 등 학술적으로도 다양한 접근이 필요하고 그것이 핵심일 것 같은데 아쉽게도 사례 수집에 그치고 있다. 의미가 있다면 '자살'이라는 터부에 대해 이만큼 방대한 양의 아카이빙을 했다는 것이겠다. 한 가지 더 아쉬운 점이라면, 저자가 서문에서 논한 자살의 '베르테르 효과' (자살의 모방심리와 파급효과를 나타내는 용어, 본문 7쪽)란 것이 바로 이 책을 읽다 보면 일어난다는 점이다. 서문에서 이은주, 안재환, 최진실 등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 사례와 당시의 파급효과를 사례로까지 들면서 설명해 놓고도, 본문은 이 백명 가까운 유명인의 자살 사례로만 채워져 있어 연속해서 읽어내려 가기가 어렵다. 좋은 소재에 많은 노력이 들어 간 책일텐데,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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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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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물게 산문으로 쓰여 졌으나 누군가는 시로 읽게 되는 글이 있다. 처음 만나는 작가, 해외에서는 '체코 소설의 슬픈 왕'으로 불리우는 체코의 국민작가,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시처럼 농밀한 소설이었다.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다. 삼십오 년째 책과 폐지를 압축하느라 삼십오 년간 활자에 찌든 나는, 그동안 내 손으로 족히 3톤은 압축했을 백과사전들과 흡사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나는 맑은 샘물과 고인 물이 가득한 항아리여서,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는 이제 어느 것이 내 생각이고 어느 것이 책에서 읽은 건지도 명확히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본문 1장 9쪽)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 네 문장은 책을 좋아하는 이들의 눈길을 단박에 사로잡을만 하다. 오로지 책과 가까이 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폐지압축공이 된 남자, 한탸의 인생이 우스꽝스럽게, 때로는 침울하고 장렬하게, 또 엄숙하게, 먹먹하고 담담하게 펼쳐진다. 대부분의 소설은 줄거리를 요약한 다음 어떤 점이 좋았다고 감상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이 책은 시를 읽을 때처럼 더 이상 요약할 수 없고, 한 마디로 감상을 말할 수도 없다. 다만 읽던 중에 즉흥적으로 남겨놓은 짧은 메모가 분위기를 전달하는 데 도움이 될까.  


"내내 춥다. 축축한 음산함이 퀴퀴한 악취를 풍기며 엄습한다. 인간 세상의 온도와 냄새다. 나는 프라하의 폐지 공장 지하실에서 20기압의 힘으로 인류의 지적 영광과 오물을 구분 없이 공평하게 짓이기는 압축기 앞에 서 있다. 쉼없이 돌아가는 압축기의 굉음에 온몸이 덜덜 떨린다. 반쯤 눈이 먼 채 책을 파먹다가 책과 함께 압축되어버리고 마는 쥐떼처럼 영원히 그 어둠을 떠날 수 없다. 그 사로잡힘이, 인생이, 몹시 벗어나고 싶으나 몹시 뿌리치기 어려운, 매혹적인 더러움이다."  


책이 추웠다, 딱히 어두운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이 아닌데도. 그도 그럴 것이 자뭇 덤덤한 어조로 계속되는 세세한 묘사 사이에서 덜컥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만나 버리기 때문이다. 


프라하의 하수구와 시궁창에서는 쥐들이 생사를 건 대전쟁을 벌이는데, 승리하는 쪽이 포드바바까지 흘러가는 배설물과 오물을 전부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면 변증법의 논리대로 승자가 다시 두 진영으로 나뉜다는 것도 그 고매한 하수구 청소부들이 내게 알려주었다. (본문 3장 37쪽)


절망의 기도를 올리기 위해 꽉 맞잡은 양손처럼 내 압축기의 아가리가 『도덕경』을 분쇄하는 광경을 나는 지켜본다. (본문 3장 47쪽)


청년들과 아름다운 처녀들의 무리에 둘러싸여 빛을 발하는 젊은 예수에게서 나는 눈을 떼지 못한 채 맥주를 단지째 들이켰다. 반면 노자는 홀로 자신에게 어울리는 무덤을 찾고 있었다. (본문 4장 52쪽)


닭장을 벗어난 닭들이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내려오며 모이를 쪼아대면 손 하나가 그들을 낚아채 산 채로 꼬챙이에 꿰어 목을 잘랐다. (본문 6장 97쪽)


한없는 연민으로, 때로는 분노로, 시니컬한 조소로 세상을 관조하는 시선. 주인공은 고독을 사랑하는 관념적인 현자요 시인이다. 그는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본문 1장 18쪽)' 혼자이며, '덜컹대는 고철의 소음 속에서 20기압의 힘으로 그것들을 짓이기도 있노라면, 인간의 뼛조각 소리가 들리곤' 하는 감수성의 소유자다. 집안 머리맡엔 2톤은 족히 넘을만한 책들을 쌓아두고 언제든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쏟아져 압사당할까 두려움에 떨면서도 책들에 둘러쌓여 찬양하며 신봉한다. 한탸에게 책은 인간이고, 신이고, 삶이고, 그 자신과 다름 없다. 시대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가깝지 않은 주인공인데, 남의 이야기를 읽는 것 같지 않아서 130쪽 남짓한 짧은 책을 읽으면서도 마음이 들썩거렸다.


책의 말미에 이런 독백이 있다. 


우리는 만신창이가 된 다음에야 최상의 자신을 찾을 수 있다. (본문 8장 127쪽)   


흐라발은 이 책을 들어, '나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세상에 나왔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수십 년간 공산주의 체제의 감시 하에 굴곡 깊은 삶을 살았던 작가가 선언한 필생의 역작. 그의 최상이 이 책이라면 아마도 만신창이가 되도록 힘들었던 삶의 여정에서 얻은 씁쓸한 지혜와 서늘한 연민이 책의 정수를 이루고 있는 것이 잘 이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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