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믿어선 안 될 것은


삶을 부정하는 인간의 나 자살할 거야, 란 떠벌림이다. 그런 인간이 가야 할 길은 알콜릭 정도가 적당하다. 삶을 인정하지 않고선 실제로 자살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뭐랄까. 결혼을 한 인간만이 이혼을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 수 없다. (중략) 물론 이것은 험담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살아갈 수 있는 인간들이다, 라는 얘기다." 

(박민규, <아침의 문>, 2010년 이상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 2010, p.16)


오랜만에 박민규의 <아침의 문>이 생각나서 재독하다가 문득 나는 "살아갈 수 있는" 쪽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에는 

"살아갈 수 없는" 자들도 있다. 안심하기도, 아니기도 했다. 아직 살아갈 수 있으므로 나는 삶을 인정하지 않은 것 같았다. 


삶은, 


수면제를 한 사발 먹고도 자살에 실패한 자의 끊임없는 구토같고, 

극심한 구토의 끝에 따라 나올 것만 같은 내장처럼 징그럽고,  

어떤 우아함이나 예의와도 어울릴 수 없으며, 

서로를 괴물이라 부르기엔 너무 적나라하므로 예의상 만들어낸 인간이란 단어처럼 기만으로 가득 찬데다,

제 아이를 벤 여자의 아랫배를 칼로 누르며 여기서 지워줄까 하고 속삭이는 남자처럼 폭력적인데, 

아무에게도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이 아무도 없는 상가 건물 옥상에서 혼자 엎지르듯 아이를 낳고 도망치는 여자처럼 미련하기까지 하나, 

싸늘한 콘크리트 바닥에서 탯줄을 몸에 감고 우는 버려진 아이처럼, 

누군가 안아들고 달래줄 수 밖에 없는, 

그러나 그 이상은 누구도 어떤 것도 해 줄 수 없는,

그런 것이다. 


라고 박민규는 말한다. 그런 것임을 인정해야 그것을 떠날 수 있다 한다. 아니, 그런 것임을 인정해 버리면 살아갈 수가 있나?



아이를 잉태시킨 애인에게 구타를 당하고, 임신을 들키지 않으려고 배에 압박붕대를 두르고 계산대를 지켜야 하는 만삭의 알바생처럼, 누구나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사람으로부터 삶의 민낯을 잠시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저들의 경험처럼 최악은 아닐지라도 인간의 지리멸렬함을 맛보기엔 충분한 경험. 그것은 "오랜 시간 부패한 온갖 욕들이"(p.31) 끊임없이 솟구치도록 몸서리쳐지는 것이다. 그래서 죽다 만 인간이 비스킷과 우유를 먹고 토할 때, 미련하고 불쌍한 미혼모가 난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 하고 울부짖을 때, 어떻게든 죽어보고자 다시 자살을 시도할 때, 누구의 축복도 받지 못한 채 단지 실수로 만들어진 생명이 태어날 때, 편안히 책 읽던 자세는 흐트러지고, 책장을 넘기던 손은 나도 모르게 입을 가린다. 


박민규는 삶의 더러운 맨살을 그 땀구멍과, 닭살 위로 돋은 시커먼 털과, 흉터와, 피가 덜 마른 상처와, 때까지 그려내는 작가다. 원래 이런 거야 그러니 어쩌겠어 당신도 별 수 없어 받아들여 하고 들이민다. 보통은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나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처럼 유머를 통해 감동으로 승화시키는데 탁월하지만, 일단 무겁게 쓰려고 마음 먹으면 단편이든 장편이든 거대한 중력의 블랙홀을 만든다. 몇 번을 다시 읽어도 똑같은 힘으로 빨려들어간다. 울 수도 없을 만큼 마음이 무거워진다. 대단한 힘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