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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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물게 산문으로 쓰여 졌으나 누군가는 시로 읽게 되는 글이 있다. 처음 만나는 작가, 해외에서는 '체코 소설의 슬픈 왕'으로 불리우는 체코의 국민작가,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시처럼 농밀한 소설이었다.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다. 삼십오 년째 책과 폐지를 압축하느라 삼십오 년간 활자에 찌든 나는, 그동안 내 손으로 족히 3톤은 압축했을 백과사전들과 흡사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나는 맑은 샘물과 고인 물이 가득한 항아리여서,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는 이제 어느 것이 내 생각이고 어느 것이 책에서 읽은 건지도 명확히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본문 1장 9쪽)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 네 문장은 책을 좋아하는 이들의 눈길을 단박에 사로잡을만 하다. 오로지 책과 가까이 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폐지압축공이 된 남자, 한탸의 인생이 우스꽝스럽게, 때로는 침울하고 장렬하게, 또 엄숙하게, 먹먹하고 담담하게 펼쳐진다. 대부분의 소설은 줄거리를 요약한 다음 어떤 점이 좋았다고 감상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이 책은 시를 읽을 때처럼 더 이상 요약할 수 없고, 한 마디로 감상을 말할 수도 없다. 다만 읽던 중에 즉흥적으로 남겨놓은 짧은 메모가 분위기를 전달하는 데 도움이 될까.  


"내내 춥다. 축축한 음산함이 퀴퀴한 악취를 풍기며 엄습한다. 인간 세상의 온도와 냄새다. 나는 프라하의 폐지 공장 지하실에서 20기압의 힘으로 인류의 지적 영광과 오물을 구분 없이 공평하게 짓이기는 압축기 앞에 서 있다. 쉼없이 돌아가는 압축기의 굉음에 온몸이 덜덜 떨린다. 반쯤 눈이 먼 채 책을 파먹다가 책과 함께 압축되어버리고 마는 쥐떼처럼 영원히 그 어둠을 떠날 수 없다. 그 사로잡힘이, 인생이, 몹시 벗어나고 싶으나 몹시 뿌리치기 어려운, 매혹적인 더러움이다."  


책이 추웠다, 딱히 어두운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이 아닌데도. 그도 그럴 것이 자뭇 덤덤한 어조로 계속되는 세세한 묘사 사이에서 덜컥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만나 버리기 때문이다. 


프라하의 하수구와 시궁창에서는 쥐들이 생사를 건 대전쟁을 벌이는데, 승리하는 쪽이 포드바바까지 흘러가는 배설물과 오물을 전부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면 변증법의 논리대로 승자가 다시 두 진영으로 나뉜다는 것도 그 고매한 하수구 청소부들이 내게 알려주었다. (본문 3장 37쪽)


절망의 기도를 올리기 위해 꽉 맞잡은 양손처럼 내 압축기의 아가리가 『도덕경』을 분쇄하는 광경을 나는 지켜본다. (본문 3장 47쪽)


청년들과 아름다운 처녀들의 무리에 둘러싸여 빛을 발하는 젊은 예수에게서 나는 눈을 떼지 못한 채 맥주를 단지째 들이켰다. 반면 노자는 홀로 자신에게 어울리는 무덤을 찾고 있었다. (본문 4장 52쪽)


닭장을 벗어난 닭들이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내려오며 모이를 쪼아대면 손 하나가 그들을 낚아채 산 채로 꼬챙이에 꿰어 목을 잘랐다. (본문 6장 97쪽)


한없는 연민으로, 때로는 분노로, 시니컬한 조소로 세상을 관조하는 시선. 주인공은 고독을 사랑하는 관념적인 현자요 시인이다. 그는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본문 1장 18쪽)' 혼자이며, '덜컹대는 고철의 소음 속에서 20기압의 힘으로 그것들을 짓이기도 있노라면, 인간의 뼛조각 소리가 들리곤' 하는 감수성의 소유자다. 집안 머리맡엔 2톤은 족히 넘을만한 책들을 쌓아두고 언제든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쏟아져 압사당할까 두려움에 떨면서도 책들에 둘러쌓여 찬양하며 신봉한다. 한탸에게 책은 인간이고, 신이고, 삶이고, 그 자신과 다름 없다. 시대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가깝지 않은 주인공인데, 남의 이야기를 읽는 것 같지 않아서 130쪽 남짓한 짧은 책을 읽으면서도 마음이 들썩거렸다.


책의 말미에 이런 독백이 있다. 


우리는 만신창이가 된 다음에야 최상의 자신을 찾을 수 있다. (본문 8장 127쪽)   


흐라발은 이 책을 들어, '나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세상에 나왔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수십 년간 공산주의 체제의 감시 하에 굴곡 깊은 삶을 살았던 작가가 선언한 필생의 역작. 그의 최상이 이 책이라면 아마도 만신창이가 되도록 힘들었던 삶의 여정에서 얻은 씁쓸한 지혜와 서늘한 연민이 책의 정수를 이루고 있는 것이 잘 이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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