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문 작가가 9 만에 내놓은 소설집 『오리무중에 이르다』 는 죽고 싶지 않으나 살아야 이유를 하나도 발견하지 못하는 괴로움에 대하여 편의 소설 모음이다. “ 세계에 반드시 일어나야 같은 것은 없었다.” 출판사의 소개 문구만 보고 덜컥 샀는데, 묘한 기시감에 저자 검색을 보니 2014년도에 백다흠, 백가흠 형제가 기사가 뜬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5091932085&code=960100). 오랫동안 알코올 중독과 우울증으로 고생한 하다. 우울의 손아귀에 목덜미를 잡혀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의 앞뒤 없는 중얼거림 같은 느낌. 기시감은 거기에서 오는 것이었고, 그래서 책의 리뷰를 쓰는 것은 내게는 특히 어렵다


개인이 자신의 삶에서 떨어져 나갈 , 너무 멀리 버려 마침내 나의 구체성을 잃고 인간의 으로 추상화되어 버릴 삶이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 (p.100), “어디를 펼쳐도 막다른 골목 같은 것들이 연속해서 나오” (p.100),  “그리고 모든 것이 너무도 진부”(p.100) 진다. “모든 생각과 감정과 행위와 동작 들이 너무도 오래도록, 수십만 혹은 수백만 반복된 것들이었고, 모든 것들이 낡을 대로 낡은 유물들처럼”(p.100) 여겨져 이상 끝이 없는 무의미한 반복() 참여하고 싶지 않은 욕구, 허무를 끝내고 싶은 욕구로 이어지는 우울에 떨어지는 것이다.

 

책에는 편의 서로 다른 소설이 실렸지만 사실 이러한 구분이 무의미하다. 심지어 하나의 안에서도 서사는 이어지지 않고, 주인공의 정체는 오리무중이다. 배경도, 사건도 일치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애당초 글들을 소설이라 불러야 할지도 의문스럽다. 그에게 소설 쓰기는 이제 일기를 쓰는 것과 몹시 유사한 같다.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이야기도 작가가 이해할 없는 것을 글로 수는 없으므로 모든 글에는 어떤 면에서든 작가 자신의 이야기가 반영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설집은 작가의 배경을 알고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매우 자전적이라고 생각하게 만들 만큼 알코올중독과 우울과 그에 따른 여러 증상의 묘사가 생생하다. 생각은 시종일관 맥락 없고 부조리하게 전개되는데, 적어도 소설 쓰기에 대한 작가의 의도만큼은 정확하게 전달된 같다.


자신으로 말할 같으면 갈수록 소설을 쓰는 거의 불가능하게 여겨졌는데 이제는 거의 소설이 써질 없게 구상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플롯이나 서사나 배경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인물조차 등장하지 않는, 등장한다 해도 인물이 아무것도 생각이 없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끝내 아무것도 하지 않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그래서 소설 속에서 펼쳐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소설만을 반복적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그러니 소설이 써질 리가 없었는데, 인물뿐만 아니라 사물조차도, 아무것도 등장시키고 싶지 않았다.”(p.73)


요컨대, 그는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고, 실제로 아무 것도 없었고, 아무 것도 없는 <어떤 불능 상태> 빠져 무엇을 써야 할지 이상 없게 되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에서 끊이질 않는 생각의 잡음을 어떤 형태로든 - 맥락이나 형태나 조리에 상관없이- 토해낼 밖에 없었던 같다


언젠가 이후로, 아무런 맥락도 없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얘기를 하는, 그래서 아무것도 말하는 것이 없는 것에 대해 말하는,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해 말하는, 그래서 사실 무엇에 대해서도 할말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그래서 어쩌면 말하기의 끝에 대해 말하는, 그리고 모든 것들에 대해 말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거의 필사적으로 말하는,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이런 글들을 쓰며, 삶을 허비하는 삶을 바치는, 그럼에도 다른 삶은 꿈조차 수도 없는, 그럼에도 다른 삶은 꿈꾸고 싶지 않은, 남은 삶은 남은 삶을 허비하는 마저 바칠 것이 분명한 이상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그런 것쯤은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pp.99~100)


나로서는 ( 소설이 매우 자전적이라는 가정 하에) 그가 글들을 쓰지 않았다면 심한 우울의 상태로, 어쩌면 삶을 마무리하는 형태이거나 혹은 이상 예전과 동일한 사람이라곤 없는 폐인으로 전락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을까 싶다. 토해내는 행위는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 우리의 시한부 인생을 조금 연장하는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이제 그에게 인생은 향이 날아가 이상 맛을 느낄 수도 없게 되어버린 오래 차와 같은 것이다.


지금 마시고 있는 차라는 생각을 정신을 가다듬고 단단히 하지 않으면 차라는 것도 모를 만한 맛이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차라는 믿음을 잃지 않는 필요한 같았고, 믿음을 잃는 순간 차는 차가 아닌 같았다. 하지만 다시 모금을 마시고 나자 믿음 또한 사라져버렸다. 차이지만 차가 아닌 것을 마시고 있는 같았다.”(pp.67~68)


지금 살고 있는 인생이라는 생각을 마음 단단히 먹고 되새기지 않으면 살아있다는 사실도 모를 만큼 무미건조하고, 이것이 삶이라는 믿음을 잃지 않는 필요한 같고, 믿음을 잃는 순간 삶이 아니게 같은 절박함. 모든 것을 알면서도 막상 하루를 살다 보면 숨쉬지만 살아 있지 않은 듯한 허무. 삶에 대한 같은 시각은 ( 것으로든, 죽은 것으로든) ‘존재함 Being’ 대한 관찰로 이어진다.


삶은 밤의 껍데기를 벗기고 보니 일곱 일곱 속에 열한 마리 벌레가 들어 있었다. (……) 구멍 속에 죽어 있는 (……) 벌레들을 가까이서 보고 있자 아주 친근하게 느껴졌다. (……) 밤벌레들은 보란듯이 죽어 있었다. 죽어 있는 모든 것은 어떤 점에서는 보란듯이 죽어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었다. 그렇게 말고 달리 있기는 어려우니까. 아니, 보이는 모든 것이 어떤 점에서는 보란듯이 있었다. 그와 동시에 대체로 사물들을 아무렇지 않게 혹은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있었고, 죽어 사물이 된 사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물론 무심한 것 같은 사물들이 무정하거나 무참하거나, 암담하거나 참담하게 보이는 순간들이, 평소 감추고 있던 무정함과 무참함과, 암담함과 참담함을 드러내는 것 같은 순간들이 있었다.”(pp.226~227)


아무렇지 않게 보란듯이 존재하는 타인들. 사람들. 죽은 사람들. 사물들. 나만 빼고 아무렇지 않게 보란듯이 존재하는 세상. 어쩜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보란듯이 수백만 되풀이되어 진부한 삶을 계속할 있나 하는 의문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존재의 틈새에서 암담하고 무참한 생의 본질을 포착할 만큼 예리한 정신이 그를 괴롭힌다. 때문에 밤이나 낮이나 잠들지 못하는 불면의 저주에 시달려, 몽롱한 비현실감 속에서, 깨어 있는 것도 잠든 것도 아닌 24시간을 보내야만 하는 우울의 감옥에서 쓰여진 같다.


하루종일 낮도 밤도 아냐, 낮도 밤도 눈도 감은 눈도 아닌 눈으로 보내고 있으니, 눈도 감은 눈도 아닌 눈이 보기엔 밤도 낮도 밤도 아니야, 하고 생각했다.”(p.101)


무의식과 의식의 중간에 붙들려 어디에도 기댈 없는 ()의식 상태에서 스스로에 대한 통제를 잃고 신경을 태우는 듯한 생각의 속도대로 받아 적은 듯한 느낌이다. 불안이나 존재의 위화감, 생의 무의미나 허무의 감정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당황스럽거나 매우 흥미롭거나 하나일 같다. 우울을 모르는 사람에게 이것은 실험적인 글쓰기이고, 아는 사람에게는 죽고 싶으나 죽고 싶지 않다는 울음이다.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인정할 없게 사람의 살고 싶다는 외침. 그래서 공감하고, 때문에 꼼꼼하게 읽어나가는 것이 힘이 든다. 어쩌면 쓸데없이 깊게 읽는 건지도 모른다. 작가가 의도치도 않은, 없는 의미를 읽어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주인공의 밑도 끝도 없는 주절거림은 비슷한 고통 속에서 어쩔 줄을 몰랐던 과거의 어느 시점을 회상하게 경험으로부터 텍스트를 읽게 만든다.  

 

번째 <개의 >에서 화자는 어린 강아지를 무릎에 올려 놓고 이유 없이 귀를 접었다 펴는 행위를 반복한다.


나는 도리 없이 계속해서 강아지의 귀를 접었다 폈다 수밖에 없었는데, 이제 강아지는 약간 겁을 먹은 같았고, 자신에게 가해지는 일이, 어쩌면 강아지로서도 처음 경험하는 일이 언제 끝날지 없다는 사실에 강아지가 겁을 먹은 것은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지만, 표정은 겁을 먹은 것만도 아닌 같았고, 어느 쪽이냐 하면 모르겠다는 것에 가까웠다.”(p.15)


한편으로 나는 강아지가 느낌이다. 누군가 귀를 계속 접었다 폈다 하는데 의중도 언제 끝날지도 없는 느낌. 힘겨움과 함께, 저에게 당신의 기나긴 우울과 광기에 대한 지나치게 솔직하며 대중없는 독백을 읽게 만드시는지요 하고 묻고 싶은 기분에 휩싸인다. 아마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래의 인용이 아닐까 싶다.


어떤 불능 상태에 이르러 무의미한 글쓰기를 반복하는 것이 사실상 있는 것의 전부가 되었을 기대할 있는 것은, 무의미한 글쓰기를 반복하는 또한 가능하지 않은, 완전한 불능 상태에 이르는 인지도 몰랐다. 생각들이 반복되었다. 어떤 반복이 원하는 것은 어떤 상태 자체이므로.”(p.265)


확실히 독특하다. 소설의 주인공이 저자 본인이든 아니든, 적어도 그가 완전한 불능상태에 이르지 않기를 바란다. 아무렇지 않게는 아닐지라도, 이렇게 아니게 달리 존재하기는 어려우니 이렇게 라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면 좋겠다. 오래 되어 본래 무슨 차였는지조차 알기 힘들 만큼 무향무미해 차일지라도 차는 차라는 믿음을 잃지 않으면 좋겠다. 그래서 조금 더 부조리하고, 더 맥락 없고, 더 자신 있게 오리무중이면서도 여전히 예리한 글로, 더 흥미롭게 독자를 매혹해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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