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큼 세상에 물든걸까..
이제 겨우 스물의 문턱에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예전과 같은 감수성이 발현되지 않는다.
물론 내가 예전에 낙엽만 떨어져도 까르륵 거리며 웃거나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초절정 낭만소녀였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저, 그저 보통 정도의 수준을 가진 - 감수성 측면으로만 따진다면 - 여자아이였다. 남들만큼 웃고, 남들만큼 울었다. 세상은 언제나 햇빛으로 쨍쨍 빛났고, 가끔 멍한 상상을 하는. 주변에 널려 있는. 그렇고 그런 보통 여자아이.
다만 내가 개탄하는 것은, 스무 살 정도의 감성이 아니라, 서른 몇 살 정도의 감성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어느 샌가 무기력해지고, 어떤 일을 시작하기가 두렵다는 것. '그래, 일단 한번 저질러보는거야!' 가 아니라. 사건의 전후와 경중을 따지게 되었다. 좋게 말하면 신중해진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몸을 사리는 것이고. 정색소녀라 불릴만큼 직선적이었던 성격도, 거짓말같은건 시켜도 잘 못했던 내가,내 감정을 좀 숨길 수 있을 만큼 우회적으로 변하고, 핑계같은건 둘러대도 걸리지 않을만큼. 거짓말이, 늘었다. 무엇보다도, 내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하면 견디지 못했던 내가. 적당히 나와 타협하는 방법을 알아냈다는 것. 자존심과 품위를 지키려고, 티끌 하나도 묻지 않을 순수한 인생으로 살려 했었는데, 뻔뻔해졌다. 그만큼. 세상에 물든 걸까. 적당히 나를 좀 속여가면서, 남도 좀 속여가면서.
그래도 예전엔. 그래, 그래도 예전엔. 시같지 않은 시였지만, 그래도 시라고 끄적거리고, 사랑. 해본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사랑 이야기를 쓰고, 읽고. 밤새워 라디오를 듣곤 했는데. 지금은, 몇번 쯤, 사랑이 지나갔는데, 그때처럼 그런 마음이. 들지 않는다. 애틋하지도 않고. 그 옛날,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이렇게 하고 싶다. 생각했던 것들 중, 실제로 한 것은. 몇가지 되지 않는다. 그때는 그렇게 예쁘고, 환상적인 것처럼 느껴졌던 것들이, 왜 막상 하려니까 유치하고 바보같은 것처럼 느껴졌을까. 왜 지금은, 사랑의 감정이 솟아오르지 않는걸까. 플라토닉같은 사랑은 아니더라도, 텔레비전 드라마같은 사랑은 아니더라도, 길거리를 배회하는 연인을처럼, 나도 그런 보통 남자친구를, 가지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지 않는걸까. 그저 말초적인, 섹슈얼한 자극만을 찾아 헤메는 걸까. (그렇다고 내가 남자를 볼 때 섹슈얼한 측면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나는, 말초적 자극을 혐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묘한 호기심에 끌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
스무살치고는. 어른스럽다기보다 늙은듯한, 생각이 깊다기보다, 어쭙지않게 이것저것 주워들은 지식으로 땜질하고 다니는 것 같은 자책. 이제는 그만하고싶은. 낭만소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