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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한가운데 영원의 길을 찾아서 - 100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의 신앙 에세이
김형석 지음 / 열림원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100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의 신앙 에세이
이 책은 100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가 독자들에게 드리는 글이다. 흔히 100세 시대라고 하는데 정말 100세인 철학자 김형석 명예 교수의 신앙 에세이는 특히 기독교인들이 읽으면 좋을 듯 하다. 1920년생인 김형석 교수의 삶과 신앙을 함축적으로 보여줌과 동시에 현재 기독교인을 비롯한 종교를 가지고 있는
이들, 종교에 관심이 있는 이들을 아울러 이야기를 들려 준다.
제자가 찾아와 강연을 해달라고 한 날짜와 삼성 그룹에 강연을 하기로 한 날짜가 겹쳐 내적 갈등을 겪고 나서 대구에
있는 학교 강연을 하기로 결심하고 나서 저자는 왜 일을 하는가?라고 물으면 돈을 벌기 위해서라고 대답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렇게 사는 것은 교수답지도, 지성인답지도
못하고 특히 신앙인답지는 더 못하다고 반성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어느 쪽이 수입이 더 많은가 보다는
무슨 일이 더 소중한가, 무슨 일이 더 가치 있는가로 생각을 바꿔먹었다는 그의 고백은 진솔하지만 울림을
준다.
진정한 일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고 물어봤을 땐 내가 그 일을 함으로써 그 사람들이 좀 더 인간답게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일의 목적은 그렇다. 내가
그 일을 함으로써 그 사람들이 좀 더 인간답게 행복하게 살도록 도와주는 것임을 그는 강조한다.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아무런 목표도 비전도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수많은 직장인과 기독교인들에게 다시금 삶의 목적, 일의 목적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 모두가 모든 일의 목적을 그 일을 통해서 더 많은 사람이 인간답게, 행복하게 사는 것임을 깨닫게 되면 사회는 올라간다. 전체가 행복해진다. 그래서 비로소 선진 국가가 되는 것이다(21p)’
어느 날 현대 그룹 창설자인 정주영 회장이 저자에게 불교 국가들이 경제적으로 뒤처진 편이고 그 보다는 유교 전통을
가진 국가들이 좀 더 잘살고, 기독교 국가가 더 잘사는 것 같다며 종교와 경제가 관계가 있다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저자는 정주영 회장에게 불교는 정신적 가치를 너무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현실 생활의
가치를 가볍게 본다. 무소유가 행복이라고, 인간다운 삶이라고
생각하는 동안 경제 성장은 어렵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 생각나는 기업가는 별로 없다. 유교는 더불어 사는 걸 가르친다. 더불어 사니깐 서로의 행복을 위해서
경제도 성장한다.
그런데 기독교 정신은 열심히 일하고 부지런히 노력해서 경제적 가치를 높여 나간다. 내가 소유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내가 가지기 위해서도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주기 위해서이다. 기독교 정신을 근간으로 한 나라의 경제가 앞설 수밖에 없다고 답을 했다. 이
대목에서 정말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는 그런 생각과 가치, 삶을 실천하고 있는지 반문하고 되돌아
보게 된다.
종교의 존재 의미는 인간애 정신이다. 생명을 존중하고, 모든 사람의 개성과 자유가 보장됨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정신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며, 그 사랑에 한계가 왔을 때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나누어 주는 일까지
책임지는 것을 뜻한다.
‘개인은 개인대로 성장해야 하고 사회는 사회대로 자라야 한다. 내가 자라지 않는데 가정이 어떻게 행복해지며, 내가 성장하지 않으면서
민족이나 국가의 성장을 기대할 수는 없는 법이다. 어떤 면에서는 성장이 곧 애국심이며, 성장을 포기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자기 성장과
자아 완성은 그 자체가 인생의 목적이어야 한다.(39p)
충실한 생을 살아 내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몇 가지 기본 조건을 이야기 한다.
우선 건강한 삶이 중요하다. 그러나 건강이 유일한 조건도 아니며 절대의 여건도 못 된다는
사실을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둘째, 정도의 경제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경제의 노예가 된다든지 경제가 절대의 조건이 된다면 그것 역시 행복과 값있는 인생의 전부는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값있는 일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건강이 필요하듯이 인생을 뜻있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경제력은
필요한 여건으로 받아들여도 좋다.
우리는 사회에 만연하기 쉬운 상하 인간관계에서 벗어나 하나님 앞에서 온 인류는 평등하다는 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이것이 기독교가 사회에서 빛이나 누룩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피부 색깔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인종차별은 용납될 수
없다. 빈부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이
부유한 사람에게 존경을 받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회 생활에서 직책의 상하는 필수적이나, 인격의 평등성은 더욱 필수적이다.
인간은 종교를 찾는 이유 중 첫째는 인간은 정신적 자아의 한계를 느꼈다는 일이며, 둘째는 그 한계를 자각하는 유한 속에서 영원을 사모하는 정신적 자아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 둘은 두 가지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강력한 인간적 본질로 나타나고 있다.
정신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어떻게 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본래성인 것이다.
기독교인들, 특히 교회 지도자들이 사회의 존경과 박수를 받는 일은
까마득한 옛 과거가 되어 가는 듯 하다. 편협하고 교만하고 고집스러운 이미지가 점차 늘어나고 있는 듯
하다. 한 건물에 3개의 다른 교단의 교회가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같은 기독교인으로도 이해가 쉽지 않은데 어떻게 믿지 않은 이들에게 이해를 바랄 수 있을까? 정말
비상식을 믿음으로 너무나 쉽게 치환하는 듯 한 모습을 자주 보곤 한다.
그리스도처럼 가난을 선택하였고 부끄럽지 않게 여기며 당당하게 정당한 수입으로만 생활하고 있는 그의 신념과 가치관은
다시금 경종을 울린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교회 청소년들은 명문대 진학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며
비전이라 누구나 이야기를 하고 청년이 되면 대기업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확정이며 비전이라 누구나 이야기를 하고 장년이 되면 아파트 및
주식 투자로 부자가 되고 자녀들이 좋은 학교에 진학 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 확장이며 비전이라 공공연히 말하는 모습을 어느 교회나 쉽게 볼 수 있다. 가난한 자들과 같이 울며 자신의 가진 것을 나눠주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잊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 저자가 지적하듯 모이기에만 힘쓰고 흩어져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치열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이
너무나 많기에 세상과 동떨어지거나 외면 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김형석 명예 교수님의
신앙을 전부 공감하지는 않지만 그가 살아온 삶과 행위, 흔적들은 존경 받아 마땅하고 또한 그렇게 살고자
따르는 이들이 더 많아지길 기도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