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과 시작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선집 대산세계문학총서 62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지음, 최성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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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폴란드 출신의 여류 시인입니다. 그녀는 199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고, 저는 CBS 라디오 PD이자 독서광에 서평가로 유명한 정혜윤 씨의 <침대와 책>(웅진지식하우스)을 통해 쉼보르스카의 존재를 알게 됐습니다. <침대와 책>에 인용된 시는 1972년 출간된 시집 <만일의 경우>에 수록된 '작은 별 아래서'입니다. 몇 대목을 인용해보겠습니다.

 

 "우연이여, 너를 필연이라 명명한 데 대해 사과하노라.

  필연이여, 혹시라도 내가 뭔가를 혼동했다면, 사과하노라.

  행운이여, 내가 그대를 당연한 권리처럼 받아들여도, 너무 노여워 말라.

  고인들이여, 내 기억 속에서 당신들의 존재가 점차 희미해진데도, 너그러이 이해해달라.

  시간이여, 매 순간, 세상의 수많은 사물들을 보지 못하고 지나친 데 대해 뉘우치노라.

  ... ... "

 

 그녀의 시 언어는 명징합니다. 존재와 없음같은 형이상학적 주제를 수시로 다루는데도 현학적이라기보단 시적이고 그 때의 '시적'은 따뜻함입니다. 삶으로 부딪히며 길어낸 언어들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철학적 주제라 해서 대학 강단에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언어는 편만하게, 깊은 구렁이나 높은 마루에도 있다가 없다가 합니다.

 

 저는 그녀가 폴란드 출신이라는 데 계속 관심을 붙박아두고 있습니다. <끝과 시작>을 처음 손 댈 즈음, 임지현 씨의 <새로운 세대를 위한 세계사 편지>(휴머니스트)도 읽고 있었는데 편지 형식으로 구성된 역사서였습니다. 개 중 가장 뜨겁게 읽었던 '지그문트 바우만에게'나 '얀 브원스키에게'는 수신자들이 모두 폴란드인이라는 공통점이 있었고, 발신자 역시 폴란드에서 공부를 해서인지 그 책을 읽은 후, '폴란드'는 좀 각별해졌습니다. (덧, 어제부터 읽기 시작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의 도입부 무대는 페테르부르크-바르샤바 간 열차네요. "우연이여, 너를 필연이라 명명한 데 대해 사과하노라.") 그대로 '폴란드'라는 지점은 쉼보르스카의 시를 읽는 관점이었습니다. 역사적 배경을 티 나게 드러내는 시는 거의 없지만, 추론해볼 따름입니다. 그녀의 나이와 폴란드의 역사를 겹쳐보며, 그녀가 강조하고 껴안는 작은 것들의 입지를.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살아 있는 자를 포옹하는 것. 감싸 안는 것.

  그를 붙잡을 수 있는 건

  오직 심장의 박동뿐."('살아 있는 자'에서)

 

 번역시이기도 하지만 여성만이 낼 수 있는 결기와 단순함 덕에 1차적으로 읽기가 쉽습니다. 쉬운데 존재의 깊음을 길어내는 솜씨는 1급입니다. 한두 마디로 답을 내리고 지나치기는 쉽지 않네요. 하지만 이 두꺼운 시선집을 이제는 다 읽자는 조급증 때문에 조금 급하게 읽었습니다.

 

 

 덧 - 부록으로 그녀의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문이 있는데, 그 역시 참 좋습니다. 알아보니, 국내에 번역된 <아버지의 여행가방: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집>(문학동네)에도 그녀의 연설이 실려 있네요.

 

 덧덧 - 세계문학총서의 하나로 구성된 선집이다보니 시집으로 받아들이기엔 부피가 까다롭습니다. 그 중에 제가 푹 빠져 읽은 시들을 갈무리 해 벗들에게 돌리는 건 어떨까 싶네요. 가볍게 지나가는 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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