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 시인선 490
허수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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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다는 건 거짓이나 숨김이 없이 바르고 곧다는 거라고 했다. 올해 많은 시집을 읽으며 솔직함은 나이와 반비례하는 것 아닐까 생각했다. 올 해 읽은 시집 중에는 젊은 나이에 등단하여 시작 활동을 하는 작가부터, 한창 감정이 불타오르는 서른, 마흔 나이의 작가들, 원숙해진 시어를 들려주는 원로 작가까지 다양했다. 시인의 나이는 다양했다. 젊은 시인들 혹은 서른과 마흔 나이의 시인들은 자기 자신에 솔직했다. 솔직하다고 느꼈다. 거침없이 자신의 감정을 파헤치고, 드러내고, 방향 없이 발산했다. 반면 원숙한 시인의 원숙한 시어는 에둘러간다고 느꼈다. 출발선에서 달리기를 시작해 결승선에 도착하기 직전 돌아본 삶은 마치 아무런 후회와 원한과 욕망이 없는 것처럼 보여졌다. 처음에는 삶을 포용하는 시어가 따스했으나 이어 솔직하지 않다고 느꼈다. 사람으로서 솔직하지 않아 보였다. 어쩌면 시인의 나이가 시인을 대하는 나에게 편견을 심어주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제일 솔직하지 않은 건 나인가 싶었다.

10월에 허수경 시인의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를 읽자고 결심하고 며칠 뒤 시인의 부고를 접한 것은 묘한 긴장감을 주었다. 시인은 등단 뒤 이십 대 나이에 시집을 두 권 내고 독일로 건너가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살다 암 투병 끝에 별세했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가 출간된 것은 2016. 시인의 나이도 오십을 넘겼고 어쩌면 몸도 조금씩 병들기 시작했을 무렵에 탄생한 작품일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삶보다는 삶 아닌 죽음에 눈을 돌리고 삶은 그만큼 여유롭게 바라볼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시인이 들려주는 시어는 반대의 감정으로 가득했다. 시인이라는 연필 한 자루가 점점 짧아지면서 떠난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 잊혀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아름다웠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 당신은 나쁘기도 하고 이쁘기도 한 복잡한 감정 ...... 삶과 죽음 사이 어느 지점에 있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시인은 끝까지 솔직해지고 싶어 했다. 오래된 과거를 돌아보는 시인의 솔직함은 묘하게 감동적이었다.

삶과 죽음 사이 어느 지점에 서서 지나온 길을 돌아봤다고 했다. 계절로 치면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접어드는 순간을 통과하고 있는 셈이다. 시인은 아주 많은 시에서 여름이라는 계절을 언급했다. 그 봄, 가을, 겨울 시인은 당신과 함께 있었으나 한 번도 노래를 한 적이 없다고 했다. 우리의 계절은 시퍼런 빛들이 무작위로 이마를 짓이기는 여름이라고 했다. 그리고 레몬향이 거미줄처럼 엉킨 여름밤 속에서 사랑을 한다고 했다. 아니, 사랑을 했을 것이다. 이것은 과거의 일이다. 삶에 대한 미련, 집착, 후회, 그리움에 솔직해질 수 있는 사람이 가장 그리운 계절은 아마 여름일거다. 여름처럼 태양이 작열하는 삶의 정점은 다시 시인에게 허락되지 않기 때문일거다. 나는 아직 여름보다는 가을과 겨울을 좋아했다. 한 해가 끝나고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된다는 감정이 좋았다. 그렇게 보면 나는 아직 삶과 죽음 중 삶에 더 가깝다고 믿었던걸까. 그래서 아직 더 많은 여름이 내 앞에 놓여져 있을 것이라 생각한걸까. (2018. 10. 26)


지난 여름 속 당신의 눈, 그 깊은 어느 모서리에서 자란 달에 레몬 냄새가 나서 내 볼은 떨린다 레몬꽃이 바람 속에 흥얼거리던 멜로디처럼 눈물 같은 흰 빛 뒤안에서 작은 레몬 멍울이 열리던 것처럼 내 볼은 떨린다

달이 뜬 당신의 눈 속을 걸어가고 싶을 때마다 검은 눈을 가진 올빼미들이 레몬을 물고 레몬향이 거미줄처럼 엉킨 여름밤 속에서 사랑을 한다 당신 보고 싶다, 라는 아주 짤막한 생애의 편지만을 자연에게 띄우고 싶던 여름이었다 

- 허수경 시인의 <레몬>중에서

 

http://blog.naver.com/marill00/221385313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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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1~4 세트 - 전4권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레프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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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말에 대해 생각한다. 1812년으로 돌아가보자. 볼콘스키 가문의 첫째 아들,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은 나폴레옹에 맞서 러시아의 운명이 걸린 보로디노 전투에 참가한다. 전투는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의 승리 아닌 승리로 끝났고, 볼콘스키 공작이 속한 러시아는 패배 아닌 패배를 경험했다. 전쟁은 참혹했고 주변에는 부상자들이 가득했고 볼콘스키 그 자신도 심각한 부상을 입고 사경을 헤맨다. 그도 알고 있는 바실리 가문의 차남 아나톨이 다리가 잘려 나가는 광경을 지켜본다. 그런데 인간과 인간의 삶이 부서지는 참혹한 순간에 안드레이 공작은 역설적으로 사랑의 위대함을 각성한다. 형제에 대한 사랑, 적에 대한 연민, 주변을 사랑하라는 신의 섭리. 사실 전쟁터는 사랑의 위대함을 각성하기에 적합한 지점은 아니다. 살갗이 뜯어져 나가는 현실의 순간에 사랑에 대해 곱씹어 볼 여유가 어디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결고리야말로 톨스토이의 문학을 톨스토이만의 것으로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말은 두 가지를 연결시키고 있다. 먼저 어떤 현실에 처해있고, 또 그 상황이 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지각하지만 다른 길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는 운명을 매개한다. 즉 거부하고 싶은 현실과 거부할 수 없는 운명 사이에 그럼에도 불구하다는 말이 위치해 있다. 매개되어 있는 것 사이에 우리는 보통 주인공들이 앞으로 어떤 운명을 선택하고 개척해 나갈 것인지 미래에 초점을 맞춘다. 현재의 삶이 얼마나 초라하거나, 혹은 얼마나 위대하거나 관계없이 현실을 관통하는 주인공의 각성 이후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어한다. 각성 이후의 지점에 작가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믿는다. 이 말은 분명 옳다. 톨스토이가 안드레이의 입을 빌어 그럼에도 사랑이다, 라고 말을 했을 때에는 그의 진심이 사랑, (), 땀으로 가득한 성실한 삶, 이런 것에 있음을 우리는 안다. 피예르를 통해, 레빈을 통해, 네흘류도프를 통해, 그리고 이들이 겪은 다양한 군상을 통해 톨스토이는 자신의 생각을 드러낸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사랑과 선(), 아니 작가의 무엇이라도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 재구성될 삶이 공허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삶 역시 진정성 있게 다루어져야 한다. 지금까지의 삶이 진실되게 다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은 현실을 긍정해야 한다는 당위가 아니다. 오히려 지금 발 밑에 깔려있는 현실의 부조리함과 참혹함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보여주고 경험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길을 걸어가려는 삶에 당위가 생긴다. 말이 길었다. 톨스토이의 문학은 현실과 운명 어느 것 하나 가볍게 다루지 않는다. 작품 내내 휘몰아치는 다양한 군상들의 생생한 목소리는 현실이 얼마나 우연으로 가득하며 매번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전개되는지 알려준다. 모두가 혼란스러운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엔트로피의 삶을 살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비단 1805년부터 1812년 모스크바의 함락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시간만이 전쟁이 아니라, 삶 전체가 끊임없는 투쟁과 전쟁의 연속이다.

톨스토이는 우리에게 현실과 운명 두 가지에 대한 고민을 요구한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 크고 작은 각성의 순간을 경험하며, 끊임없이 좋은 방향으로 삶을 만들어 가려고 노력한다. 사람의 본성이라고 믿고 싶다. 그러나 어느 순간 굳은 결심은 약해지고 주변의 사람은 통제되지 않고 지배할 수 없는 사건이 늘 발생한다. 삶은 쉽게 부서지고 허물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새로운 삶의 가능성에 대해 도전하고 생각을 품는 존재이기도 하다. 사람의 특권이라고 믿고 싶다. 비록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참혹한 현실에 기인하지 않고 불연속적이라 하더라도, 비록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톨스토이가 말한 사랑과, ()과는 다른, 각자의 것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런 것이었다. 우리는 삶이라는 전쟁을 겪고 있기도 하며, 동시에 아주 우연히 그와 반대의 삶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것. 우리가 꿈꾸는 평화라는 것이 도달할 수 없는 신기루라 하더라도 말이다. 이 역설을 이해한 순간 나는 본질적으로 행복해졌다.

(2018.10.22)


. 톨스토이의 장편 세 편을 쓰여진 시간과는 반대로, <부활>, <안나 카레니나>, <전쟁과 평화>순서로 읽었다. 작품의 분량은 점차 늘어났고 작품의 세계관은 점차 깊어졌다. 톨스토이를 만난 것만으로도 2018년은 본질적으로 행복했다, 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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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눈 - 빗소리가 어떻게 풍경을 보여주는가
올리버 색스 지음, 이민아 옮김 / 알마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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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부터 솜사탕 색깔을 구분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게 색각이상이라고 구체적인 증상을 알게 된 건 초등학교 신체검사 시간이었어. 색각이상(色覺異狀). 색각이상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증상이 있고, 증상의 정도에 따라 색맹이나 색약으로 분류되는데 나는 가끔 적색과 녹색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적록색약에 해당했지. 수경이도 초등학교 신체검사 시간에 한 번쯤은 색각이상 검사를 해봤겠지. 색으로 칠해진 점이 가득한 도형에서 특정한 숫자나 패턴을 읽어내는 것인데, 처음의 한 두 장은 손쉽게 읽었지만 그 뒤의 숫자들은 좀처럼 찾기 어려웠어. 색각이상 여부를 검사하던 선생님은 내가 어떤 숫자를 말할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었어. 대다수의 아이들이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7이요, 13이요, 19, 라며 숫자를 연신 외치는데, 나는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었거든. 몇 초 침묵이 이어지다가 간신히 12인가요, 라고 말하면 선생님은 색각검사지가 아니라 의아한 듯 나를 바라보셨지.

적색과 녹색을 구분하는데 가끔 어려움을 느꼈지만 일반 생활에서는 불편할 것이 거의 없었어. 신호등 색이 바뀌는 걸 제대로 분별할 수 있으니 그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했지. 물론 아이와 함께 공원을 찾았을 때 희미한 솜사탕 색이 하늘색인지 분홍색인지 분간하기 어렵다거나, 유니클로 매장에서 판매하는 옷의 다양한 색을 정확하게 비교하며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경우가 있었지만 삶을 재구성해야 할 만큼 심각한 수준은 결코 아니었지. 그러나, 아무 것도 아닌 증상이라 하더라도, 내 삶이 바뀐 것이 하나도 없다고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적록색약이라는 것이 무의식 중에 콤플렉스가 되었던 것 같아. 그래서 대학에 들어오고 나서 색깔에 대해 진지하게 공부하기 시작했지. 10,000가지 이상의 색을 체계화 한 팬톤(Pantone)의 색채 표현을 외우다시피 하며 이 색은 이 색이구나, 저 색은 저 색이구나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단다. 언제나 고통에는 정 반대 측면에서의 보상이 뒤따르는 법이었지.

색깔에 대해 이야기했지. 색깔이란, 사람 눈에 따라 보이는 여러 가지의 빛깔이라고 하네. 사람의 눈에 따라 지각되고 표현되는 것이 비단 색깔에만 해당될까. 아침에 일어나서 내 옆에 누워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기억나지 않을 때, 마음 속에서는 여전히 지적 사고가 가능하지만 어떠한 말로도 표현이 불가능할 때, 피아노 악보의 음표가 전혀 낯선 것으로 읽힐 때, 혹은 수십 년 읽은 책이 익숙한 알파벳이 아니라 전혀 생소한 그리스 문자나 히브리 문자로 이해될 때, 그때의 당혹감은 얼마나 크고 깊을까. 지금껏 익숙한 방식으로 지각하고 표현하던 것, 그러니까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이 파괴된다면 어떻게든 그 파괴 속에서 자신의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새로운 방식을 찾아야 할 거야. (229) 신경과 전문의인 저자가 2015년 세상을 떠나기 몇 해 전 출간된 <마음의 눈(2010)>은 사람들이 어떤 손실을 겪으며 삶이 어떻게 파괴되었고 또 어떻게 극복하는지. 삶의 파괴와 부활에 대한 이야기야.

올리버 색스를 떠올리던 순간이 생각났어. 작년 5월 회사 점심시간에 근처 갤러리에서 작품을 관람하고 돌아오던 길이었어. 마을버스를 타고 회사로 돌아오는데 창 밖을 바라보며 그 즈음에 읽었던 그의 자서전 <온 더 무브 (알마, 2015)>를 떠올렸단다. 책을 읽는 내내 느껴진 따스한 정서가 5월의 날씨와 잘 어울렸지. 그는 신경과 전문의로 일하면서 다양한 고통과 기괴한 상실 속에 살아가는 환자들을 마주했는데, 자신도 범속한 삶을 살았던 건 아니었어. 사람 얼굴이나 장소를 인지하지 못하는 어려움, 동성애라는 성 정체성에 대한 고뇌와 죄의식, 마약에 탐닉해서 몸과 마음이 부서졌던 과거, 모터사이클을 타다가 발생한 큰 사고 ...... 나의 고통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 조건은 아니지만, 아내를 모자로 착각하거나, 빗소리로 풍경을 볼 수 밖에 없는 이들의 처지에 감응(感應)할 수 있게 해주었을 거야. 삶이 부서진 이들에게 감응하고 귀를 기울였던 그는 실로 의학계의 계관시인이었어.

이번에 <마음의 눈>을 읽으며 마음이 더 따뜻해졌다면, 그건 환자들이 보여준 경이로운 생명력 때문일거야. 우리는 보통 아주 작은 상처에도 삶이 위축되고 더 나아가기를 두려워하지. 그러나 지금까지 살던 방식을 버리고 살아가는 방식을 새롭게 재구성해야 할 만큼 낯선 환경에 처했을 때 나나 수경이나 과연 끝까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이 들어. 올리버 색스라면 곁에 나타나 아마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우리도 그렇게 계속해서, 어떻게든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다고. 음표를 읽기 힘들어진 릴리언이 하이든 4중주곡을 여전히 머리 속에 기억하고 놀랍도록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를 들려줄 수 있는 것처럼 말이야. 릴리언이 특별한 건 아니야. 그녀는 평범한 사람이겠지. 우리 모두는 릴리언과 같아. 바로 그 때문에 우리 모두는 평범하지만, 동시에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부활하여 인간의 아름다움을 지키고 계속 살아가게 될 거야. 그게 인간이 인간으로 규정될 수 있는 조건이겠지.


이건 불행이라고, 중얼거리면
모든 음악이 전쟁의 손으로 우리를 안아주는 그런 슬픈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건 사랑이라고, 중얼거리면
모든 음악이 검은빛으로 변하는 그런 처참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다만 손을 잡아달라는 간절한 몸의 부탁일 뿐입니다
내가 하지 않으면 내 기억을 가진 쥐가 당신에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내 손을 잡아줄래요?

- 허수경 시인의 <내 손을 잡아줄래요?>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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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 - 문학동네시인선 100 기념 티저 시집 문학동네 시인선 100
황유원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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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이었다. 딸 아이는 내 손을 잡고 졸망졸망 걸어가는 것인데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손가락을 들어 밤 하늘을 가리킨다. 저것 보라고 했다. 밝은 가로등이 하나 서 있고 가로등 옆에는 소나무인지 향나무인지 동백나무인지 모를 사철나무 하나가 나란히 서 있었다. 아이는 저것을 보라고 했다. 저것의 색깔이 변했다고 몇 번이고 말했다. 처음에는 가로등 불빛이 밝은 것을 보고 놀랐다고 생각했지만 손 끝을 따라 시선을 옮겨 보니 사철나무의 끝이 갈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러니까 사철나무라고 생각했던 것은 계절이 바뀌며 색이 변하는 것이니 사실 사철나무는 아니었던 거다. 녹색이 미묘하게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쉽게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아이의 눈이 참으로 매섭고 신기했다. 우리는 다시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와 걸었던 길을 오늘은 나 혼자 걸었다. 회사에서 늦은 날이었다. 집에 거의 도착한 순간 걸음을 멈추고 어제의 나무를 올려 보았다. 여전히 갈색이었다. 나는 아이를 생각했다.
 
아이에 대해 생각했다고 했다. 아이는 태어난 지 두 해 반을 지나 걷고, 뛰고, 말하고, 웃고, 울고, 사랑스럽게 다가와 안기고, 또 세상에 혼자인 것처럼 자기만의 시간을 보낸다. 아이가 말을 한다고 했다. 아이는 두 돌이 지나면서 폭발적으로 단어를 배우고 습득한 것을 정확하게 발음하기 시작했다. 가끔 아이가 자기 자신에게 나에게 아내에게 하는 말을 듣다 보면 가슴 한 켠이 섬뜩해질 때가 있다. 이 아이가 언제 이런 단어를 배웠는가. 이 아이가 언제 이런 표현에 눈떴는가. 이 아이가 어쩌면 이렇게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표현 방식으로 이토록 세상을 아름답게 묘사해내는가, 그런 것에 섬뜩해질 때가 있다. 속으로 생각한다. 이 아이의 지금 이 말들을 기억하겠다고. 그리고 돌아서서 깨닫는다. 순간의 섬뜩한 기쁨은 언제나 돌아서면 까맣게 잊혀지는 법이라고. 그래서 아이의 말이 정확하게 기억되는 것은 거의 없다. 남는 것은 그 순간 품었던 경이로운 감정뿐이다. 말은 사라지고 아름다움이 남았다.
 
여행을 가기로 했다. 아이와 여행을 가려니 챙길 것이 많아 자연스럽게 가지고 가지 못할 것들도 많아진다. 책을 놓고 가기로 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세 번째를 읽던 참이었다. 가방은 가득 찼고 책은 무거웠고, 머리도 가득 찼고 무거웠다. 책을 읽지 않기로 했다. 여행을 하며 느끼는 순간의 것들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여행을 하며 느끼는 순간의 것들은 사진으로 담아내기도 하겠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차 휘발되어 집에 돌아오면 까맣게 잊혀지는 것이 더 많았다. 그래서 여행의 경험이 정확하게 기억되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그런 것들이 좋았다는 주관적인 감정 몇 개만이 떠오른다. 언제 어디에 여행을 다녀왔는지 정도를 기억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여행은 아이의 말과 같다. 돌아서면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설레고, 경이롭고 삶이 온전하게 구슬려지고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너는 아름답다. 나는 너의 아름다움을 기록하지 않되 최대한 기억하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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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단어 문학과지성 시인선 393
유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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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를 듣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아주 오래 전. 공부하려고 책상에 앉아 작은 오디오 전원을 켜면 라디오가 흘러나왔는데 아주 어릴 적에는 그게 무슨 채널인지, 채널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방송이 무엇인지, 방송을 진행하는 DJ는 누구인지 궁금하지도 않은 채 그저 흘러나오는 것을 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라디오 DJ와 방송 프로그램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 중학교 진학을 앞둔 무렵. 11년 동안이나 별밤지기를 맡았기 때문에 지금도 별밤지기라고 한다면 나와 내 위의 세대는 이문세를 떠올리겠지만, 내가 라디오 너머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주파수를 더듬던 시절에는 이휘재가 MBC 표준FM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진행하던 시절이었다. 그가 전창걸과 함께 ‘영화공작소’ 라는 코너를 진행한 적이 있다. <쉬리>, <타이타닉> … 영화 주요 장면을 재미있게 소개하는데 지금까지도 그 대사를 외우는 걸 보면 아마 그 무렵을 기점으로 라디오가 본격적으로 나의 생활을 장악하기 시작했던 듯 싶다.

하루 종일 라디오를 듣다 보니 시간대 별 프로그램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라디오 프로그램이 사람의 감정에 내려 앉는 결은 시간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저녁의 라디오는 깊은 호수와 같았다. 조용한 밤 DJ의 목소리가 고요하게 들리는 가운데 타인의 사연 속으로 깊게 빠져들었다. 낮의 라디오는 시장이었다. 겉잡을 수 없는 흥겨움 속에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타인의 사연은 깊게 파고들 것이 아니라 얇게 이해되고 소비되는 재료였다. 그러나 누군가의 감정과 사연에 동화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때로 감사하기도 했다. 이제 아침의 라디오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들었던 아침의 라디오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아침이라며 억지로 생글거리는 활기를 강요하지도 않았지만, 하루를 출발한다는, 시작한다는 적당한 템포와 세기를 전해 주었다. 가끔 누군가의 사연이 소개되기도 했으나 DJ의 목소리는 건조한 편이었다. 아침의 라디오는 분명 가까이 살고 있으나 좀처럼 살갑게 인사한 적 없는 옆 집 이웃과 같았다.

그러므로 유희경의 첫 번째 시집 <오늘 아침 단어>를 읽을 때 나는 생각한다. 이 시인은 아침이면 분명 방송국 어디선가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을 거라고. 그의 목소리는 비교적 나지막할 것이라고. 그리고 그의 라디오 채널은 그의 목소리처럼 담담하면서도 너무 가깝게 다가서지 않을 것이라고. 하여 적당한 깊이의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앉아 가만히 앉아있을 것이라고. 다가서지도 물러서지도 않는 알맞은 거리감이 나와 유희경 시인 사이에, 시인과 세상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여있을 것이라고. 나는 유희경의 시집을 읽으며 생각하게 된다. 그의 시집 제목처럼 그만의 건조한 서정은 낮도 아니며, 저녁도 아니며, 너무 늦은 밤도 아니며, 비교적 아침에 떠올려지고 회자될 성격이었다. 그는 우산에 대해서라면 오래오래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우산은 기본적으로 혼자 쓰는 것이었다. 나는 우산 아래 숨을 수 있고 숨은 공간 너머로 타인과 알맞게 교류할 수 있다. 핵심은 ‘알맞게’ 였다.

최근 몇 개월 동안 내면에 끝없이 파고드는 시어를 가까이 했다. 황혜경, 이제니, 김이듬 …… 서로 다른 시인들은 유사한 시어를 내세우며 나를 한없이 깊은 감정의 골짜기로 데려갔다. 그들의 사연이 녹아있는 시어를 가까이 하며 깊은 계곡을 내려갈 때는 황홀했으나 다시 나의 세계로 돌아오는 일은 요원한 것처럼 보였다. 떠남보다 돌아옴이 버거웠다. 그리하여 유희경 시인의 시집을 읽고 서점을 거닐다가 류근 시인의 산문집이 눈에 들어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어떤 슬픔에 대해서 천천히 이야기한다고 했다. 함부로 사랑에 속아주는 버릇. 그리고 함부로 인생에 져주는 즐거움. 사랑에 속아준다는 것은 타인에 대해 어려운 마음을 갖지 않겠다는 결의였다. 류근의 바로 대척점에 유희경 시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 모두는 우산을 쓰는 일 같이 꽤나 혼자인 셈이라, 남의 사연과 감정에 깊게 끌려들어갈 시간과 자신이 없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는 함부로 사랑에 속아주지 않는 버릇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


우산에 대해서라면 오래오래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검은 빛이고 나는 펼쳐진 시간을 사랑한다.

예를 들어 점점 어두워져 가는 거리, 어깨를 감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 가로등 켜지고, 그림자 사라지고, 나는 머뭇거릴 때,

검은 물로 태어나는 것 혹은 젖은 몸으로 살아가는 것 쉽게, 자신을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리는 방법 혹은 혼자서 걸어가는 일

- 유희경 시인의 <우산의 과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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