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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 - 처음 듣는 이야기
우치다 다쓰루 지음, 박동섭 옮김 / 유유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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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거실에서 TV를 아예 없애고 책장을 놓아 서재처럼 꾸민 적이 있었다. 내 시선에서 가장 책이 잘 보이는 코너에는 민음사에서 펴낸 세계문학전집을 비치했는데 어느 날 아내와 소파에 앉아 책장을 바라보다가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앉아서 책장에 전시된 책등을 보면 책 속의 인물들이 닫힌 책 틈 사이로 나에게 말을 건네는 것 같아. 마치 그 책을 열면 말을 걸던 인물들이 우르르 이 현실 속으로 쏟아져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 가끔 들어.”


우치다 타츠루에 따르면 책이란 외부로 통하는 문이며 책은 독자를 지금이 아닌 시대와 여기가 아닌 장소로 데려가는 힘을 지녔다. 책 한권이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닫힌 공간에 자그마한 구멍이 생기고 그로부터 신선한 바람이 불어 들어온다고 그는 말했다. 내가 아내에게 이야기한 것은 착각만은 아니었다. <레미제라블> 책 이면에는 19세기 격동의 프랑스 혁명이 존재했고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책 너머에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예술의 서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관점의 변화라고 해야 할 지 모르겠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독서란 책을 읽지 않는 행위까지 포함한 것이며 정확히 말하면 언젠가는 그것을 읽을 것이라는 전미래적 시제를 포함한 행위라는 점이다. 나아가 자신이 읽지 않은 책에 둘러싸여 사색하고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고 그는 말하는데, 이렇게 보면 책이란 그 안에 담긴 활자를 읽음으로 사람이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읽지 않음으로 인해 그것을 읽고 싶은 지점으로 우리를 움직이게 만든다.


우치다 타츠루 작가의 책을 처음 읽는다고 생각했지만 기록을 살펴보니 약 10년 전인 2013년에 그가 쓴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를 읽었던 모양이다. 그 당시의 나는 미셸 푸코와 구조주의 철학에 관심을 두고 있었는데 정작 지금까지 꾸준하게 책을 읽었던 주제는 마지막 자크 라캉에 대해서였다. 모르는 것은 여전히 많고 그것을 알려주려는 책은 여전히 많다. 나는 여전히 무지했고 그 무지함이 나를 여전히 책을 읽는 사람으로 존재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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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마음 - 나의 옳음과 그들의 옳음은 왜 다른가
조너선 하이트 지음, 왕수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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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MBTI 유형지표-쌍 중 두 번째 인식 기능은 감각(Sensing)과 직관(Intuition)으로 나뉜다. 몇 번을 반복해서 테스트해도 INFJ 유형으로 판단되는 나로서는 세상을 보다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셈이다. 세상을 이성이나 경험이 아닌 즉각적인 직관으로 인식하고 판단한다는 점이 때로는 스스로를 덜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여겨지게 만들었고 때문에 남들보다는 조금 이상적이고 추상적인 성격이 드러난다고 여겼고 이런 성격을 나는 나의 한계점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조너선 하이트 교수는 <바른 마음>에서 사람은 누구나 직관이라는 내면의 코끼리가 순간적으로 도덕적 판단을 하기 마련이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추론이라는 기수가 그 코끼리의 움직임을 최대한 보조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며 처음에는 위안을 받았고 이어서는 그것이 누구나 가진 사람의 본성이라고 조금은 믿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와는 다른 직관을 지닌 이에게 우리는 본능적으로 끌리고 다른 직관을 가진 이는 경계하며 부정한다.


도덕적 판단의 여섯 가지 기반, 즉 배려/피해, 자유/압제, 공평성/부정(비례와 인과법칙), 충성심/배신, 권위/전복, 고귀함/추함이 각기 다른 비중으로 반응한 결과 사람이 진보적인 성향 또는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게 되는지를 살핀 점도 인상적이다. 도덕은 어느 한 가지 기반의 점유물이 아니다. 도덕은 여섯 가지 기반의 조합이며 어느 기반에 가장 높은 비중을 두고 있는지가 사회정치적 성향을 결정짓는다는 이 유기적인 움직임을 나는 머리 속으로 떠올렸다.


남은 질문은 이런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도덕적 기반에 내가 좀 더 밀접하게 반응하는지, 그리고 사회집단은 어떤 도덕적 서사에 밀접하게 반응하는지는 동태적인 것일까 정태적인 것일까? 도덕적 판단이 도덕적 기반의 조합의 결과라면 한 집단이 선호하는 정치, 경제, 사회체제 역시 그러한 조합의 결과일 것인데 다만 조합은 한 시점에 멈추어 있지 않는다. 다시 말해 시대정신이라는 개념이 존재하는 것인지, 여전히 유효한 것인지 나는 궁금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과 똑같은 도덕적 서사를 가진 사람들과 뭉쳐 정치적 집단을 이루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살아가며 어느 한 가지 서사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그 뒤로는 다른 대안적인 도덕 세계는 더 이상 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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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지음, 함규진 옮김 / 와이즈베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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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다사다난했던 2020년. 올 해로 과장 3년차가 되었고 2010년부터 시작된 직장 생활도 만 11년이 되었다. 아직 Junior였던 사원 무렵이 생각난다. 그때는 내가 직장인으로서의 소명 의식도 높지 않았고, 뭔가 대단한 것을 성취했다는 자부심도 없었고, 남들보다 앞서 나간다는 의식, 누군가로부터 능력을 인정받는다는 느낌 역시 희박했을 때였다. 무엇보다 어렸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시절이 그립다. 항상 좋았다는 이상한 그리움이 피어난다. 돌아보면 우리 팀에 특출나게 잘 하는 (소위 에이스라는) 사람은 없었지만,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재능과 열정을 비교하고 시기하지 않았다. 우리는 공동의 가치를 추구했고 조화롭게 지냈다. 마이클 샌델 교수의 언어로 바꿔 말하면, 같은 팀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공공선(Public Good)이랄까? 그런 것이 존중되었던 셈이다. 그래서 그들과 일했던 그 순간이 참 마음이 편했고, 마음이 편했던 그 시절을 늘 그리워한다. 능력과 인정과 성공이라는 것에 눈을 뜨고 일하고 있는 요즘 더 그 시절이 그립다. 아마 2013년 무렵인 것 같다.


마이클 샌델 교수의 신작 <공정하다는 착각>은 여러 의미로 아주 각별히 내 마음 여러 곳을 쓸어내렸다. 마 교수가 한국에서 큰 인기를 얻은 조금 뒤에야 그의 책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의 베스트셀러인 <정의란 무엇인가> 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읽으며 아주 큰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옳은 것을 믿는 공동체를 강조하지만, 옳음을 강제하지 않고 우리가 스스로 고민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정말 좋았다.


오랜만에 그가 펴낸 신작이라 반가웠다. 무엇보다 올 한 해 내가 능력과 인정과 성공이라는 달콤한 덫에 빠져 회사 생활에 몰두했던 터라 과연 그것이 옳은 것인가 묻는 마 교수의 질문이 더없이 날카로웠다. 가장 인상적인 구절은 이런 것이다. "능력주의에서 중요한 건 '모두가 성공의 사다리를 오를 평등한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능력주의의 이상은 불평등을 치유하려 하지 않는다. 불평등을 정당화하려 한다." 이 문장을 몇 번 읽으며 소름이 돋았다. 실제로 우리의 삶은 점차 불평등해지기만 한다. 간극은 좁혀지지 않는다.


흔히 결과의 평등은 공산주의, 기회의 평등은 그나마 인정할 수 있는 자유주의라는 우스갯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그러나 기회의 평등이라는 원칙 자체가 옳은 것인지 돌아본다. "야 너도 노력하면 좋은 대학 가고, 좋은 대학 가면 좋은 직장에 가서 돈과 명예를 얻을 수 있어. 그건 네가 당연히 얻어야 할 몫이야. 그러니까 야 너도 능력만 갖추면 할 수 있어 우리처럼 나처럼."이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루저를 불명예스럽게 만들고 위너를 피폐하게 만드는 것인지,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틀을 깨는 책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생각이 든다. '야너두'와 '야나두' 중에 뭐가 더 폭력일까? 너도 노력하면 나처럼 계층 이동을 할 수 있다고 내려다보는 것과 (야너두), 나도 노력하면 저곳까지 갈 수 있다고 희망을 품은 채 올려다보는 것 (야나두) 둘 중에서 어떤 것이 더 폭력적일까? 그러고 보면 이 책을 읽으며 내가 감동을 느끼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4년제 대학을 나오고 자산 규모로 국내 3위의 그룹에서 밥벌이를 하고 있는 나의 이 감정은 위선인가 아니면 뒤늦은 자각인가. 책을 읽고 난 뒤에도 오랜 생각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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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황제 J. P. 모건
진 스트라우스 지음, 강남규 옮김 / 이상미디어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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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의 모 선배가 "금융시장을 이해하고 싶다면 무조건 읽어야 한다는" 존 피어폰트 모건의 자서전을 읽었다. 사실은 모 선배 역시 모 선배의 선배로부터 들었던 말이었지만. (정작 나의 모 선배는 나에게 이 말을 전해주고도, 본인은 아직 읽지 않았다고 함)


1,200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요약하면 J.P.모건은 런던에서 금융가로 활동하던 모건 가의 금수저로 태어나 응당 그래야 할 필요성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장의 위기를 막기 위해 자신이 가진 부와 권력을 최대한 활용했던, 그러니까 금융황제로서의 밥벌이를 아주 충실하게 하다간 위인이었다. 중요한 키워드는 "응당 그래야 할 필요성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라는 대목이다. 경제적 부를 소유하고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꼭 그 경제적 자유를 공공선을 위한 방향으로 쓸 책임은 없다. 매일 쇼핑을 하며 예술품이나 모으고 감상하며 즐거운 개인의 삶을 살아도 그건 그 사람의 자유니까.


그렇지만 이 책에서 끊임없이 강조하는 건, J.P.모건은 그럴 책임이 없었음에도 기꺼이 시장과 사회의 안정을 위해 자신의 경제적 책임을 자각했다는 점이다. 이 책에 등장한 "도덕적 지배" 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편하게 살기 원한다면 가진 돈을 펑펑 쓰며 얼마든지 편하게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라는 신흥 국가가 남북내전을 이겨내고 강한 국가로 발돋움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 세상과 인류의 발전을 위해 가진 자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고민했던 것, 그것이 금수저가 믿었던 도덕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다만 착한 사람 행세는 하지 않는다. 더 강하고 무섭게 다그치고 최고의 지위를 향해 달려간다. 최고가 되어 사회에서 지배적 위치가 되려는 세속적인 욕망이 있다. 현실적이다. 때문에 "도덕적 지배" 라는 말이야말로 존 피어폰트 모건을 가장 잘 나타내는 표현이다.


J.P.모건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다양한 산업에서 강력한 트러스트(Trust)를 구성했다. 트러스트는 요즘의 재벌 기업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강력한 단일 Entity를 의미한다. 철강은 US스틸, 철도는 노던 시큐리티스, 해운은 IMM(International Marcantile Marine)이라는 강력한 트러스트 설립을 주도하며 금융 제국을 만들어 간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 한 것은 20세기 초에 독점을 규제하는 셔먼법이 입법된 뒤로 모건 제국을 둘러싼 바람의 방향이 정 반대로 바뀌게 된다는 거다. 독점적 기업 결합으로 성공한 그에게 독점은 위법이니 결합을 해체하라는 압박이 들어온다. 독점으로 흥한 자 독점으로 망했다고 해야 할까.


내가 다니는 그룹의 오너 일가 중 어떤 한 분이 "순풍 속에서 장사해야 한다" 라는 말을 얼마 전 구성원에게 남겼는데, 이 책을 읽으며 그 말이 계속 떠올랐다. 비즈니스를 하면서 또 사회 생활을 하면서 바람이 바뀔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지금까지 성공 방정식이라고 믿었던 것이 응 아니야 라고 부정 당하면, 지금까지의 순풍은 역풍으로 바뀌는 것인데 그러면 바뀐 바람 방향을 따라서 새로운 길을 걸어야 할까, 아니면 조금 더 참고 견뎌야 하는걸까? 바람의 변화가 일시적인지 영속적인지 그 시점을 통과하며 직접 따지기란 쉽지 않다. 뒤늦게, 멀리서 바라봐야 비로소 보일 뿐이다.


J.P. 모건은 순풍 속에서 때로는 순풍을 직접 만들어내며 강력한 제국을 만들었다. 세기가 바뀌고 순풍이 역풍으로 바뀌었을 때 그는 늙어 있었고 강력한 제국은 조금씩 해체되기 시작했다. 다시 처음의 <도덕적 지배>라는 단어를 떠오르게 된다. 칸트가 말한 정언명령도 아니고, 시대를 불문하여 절대적으로 옳은 도덕이라는 건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긍휼히 여겨라, 거짓말 하지 마라, 다른 이를 사랑으로 대하라 ...... 이 정도의 보편적 윤리란 그리 많지 않다. 약 100년 전에 J.P. 모건이 믿은 윤리란 <시장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 가장 강력한 기업 결합체를 결성하고 금융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 이것 아니었나 싶다. 금수저로 태어나 돈의 권력을 제대로 활용해야 한다고 믿은 이 사람의 가치관은 아주 흥미로웠다. 적어도 그가 믿은 가치관이 도덕으로 통용되던 시대가 있었던 거다.


모건 :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철도회사의 증권이 모두 우량한 것은 아닙니다.

언터마이어 : 그렇다고 철도회사의 증권을 인수한 투자은행이 채권의 가치를 법적으로는 책임지지는 않습니다. 그렇지요?


모건 : 투자은행이 책임지지 않습니다만, 더 중요한 기능을 합니다. 질문하시는 분이 살아 있는 한 보호되어야 하는 도덕적 책임을 집니다.


언터마이어 : (아주 냉소적인 어투로) 도덕적 책임이 돈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지요. 그렇죠?

모건 : (투자자에게 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하며) 도덕적 책임은 돈이 됩니다. 회사는 워크아웃에 들어가거나 다시 설립되어 채권을 발행합니다. 투자자들은 원금과 이자를 받습니다.


- J.P.모건이 증인으로 소환되어 독점적 기업 결합에 대해 해명해야 했던 1912년 '푸조 청문회'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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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만난 물고기
이찬혁 지음 / 수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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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기원을 다루는 여러 가설 중 가장 오래된 것 중 <원시 수프> 가설이 있다. 지구 상에 존재했고 현재 살아가고 있는 모든 생명은 수많은 무기물이 뒤섞인 원시 수프와 같은 형태에서 출발했다는 가설인데, 무기물이 유기물로 진화하고 유기물이 형태를 지닌 생명으로 진화한다는 상상이다. 심연의 청색 혹은 아직 빅뱅의 열기가 식지 않아 부글부글 끓고 있는 적색의 바닷속에 DNA 형태로 끝없이 부유하고 헤엄치는 무수한 무기질과 유기질들. 어느 것이 어떻게 진화하여 최종적으로 어떤 질료(質料)로 나아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분명한 것은, 생명의 기원이 될 가능성을 모아둔 거대하고 총체적인 집합체가 있고, 그 집합체에서 꺼내어진 개별적인 존재가 생명으로 진화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집합과 개별이 있는데, 우리에게 직접 다가오는 것은 개별이지만 결국 개별은 집합에서 비롯된 것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생명 이전에 생명으로 넘실거리는 거대한 '집합'이 있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무엇으로도 태어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으로 응집된 ......

2013년 악동뮤지션으로 데뷔하고 올해 9월 정규 3집 앨범을 발표한 이찬혁 작가의 <물 만난 물고기>를 읽으며, 소설 속 군상들은 거대한 원시 수프 위를 항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아주 흐뭇한 생각이었다. 악동뮤지션 시절에 톡톡 튀는 노래와 가사로 주목받았던 그였지만 그런 재기발랄함은 동시에 저것이 내면 깊숙한 곳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스쳐 지나가는 현상에 불과할까? 이런 의문을 가져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9월에 발매한 정규 음악 앨범과 그 앨범의 예술적 기원이 되었던 이 소설을 교차하며 동시에 읽어보니 그런 의문은 점차 기우에 가까워진다는 확신이 든다. 악뮤라는 음악가 내면에는 조용하고 깊숙하게 흐르는 예술의 원시 수프가 흐르고 있다. 그 원시 수프로부터 꺼내어진 것이 어떤 예술로 진화해 갈 것인지는 쉽게 단언할 수 없다. 어떤 경우에는 음악으로 어떤 경우에는 이처럼 텍스트로 표현될 것이니, 그렇게 보면 이들이 회화나 조각이나 건축에 이르기까지 많은 예술을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 삼을 수도 있다는 상상은 전혀 놀랍지 않다. 중요한 건 어떤 도구로 표현하느냐가 아니라, 그들 마음속에 흐르는 거대한 예술의 바다니까. 그들은 바다를 지닌 예술인으로 자라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나를 사로잡은 문장은 이런 것이었다. <"노래만 잘해도 가수는 될 수 있어. 하지만 무언가를 표현하는 사람을 우리는 예술가라고 해."> 노래를 잘하는 가수. 그걸 생명을 지닌 개별의 존재라고 생각해보자. 반면 무언가를 표현하는 사람. 그건 표현해야 할 것이 있는 무언가를 끝없이 보유한, 집합의 존재에 가깝다.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름답고 위대해 보이는가? 그렇다면 반드시 그것이 태동한 예술인의 뿌리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지금의 위대함이 어떤 묶음에서 풀려나와 밖으로 던져진 것인지 그 기원을 궁금해해야 한다. 그 궁금함에 언제나 다양한 표현 방식으로 답을 해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우리는 예술가라고 한다. 아마 저 문장은 이찬혁 작가의 자기 선언문이라고 봐도 좋겠다. 어떤 음악 색채를 보여줄 것인지 고민하기 보다는, 끝없이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의 바다를 마음에 품고 살아가겠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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