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 시인선 490
허수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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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다는 건 거짓이나 숨김이 없이 바르고 곧다는 거라고 했다. 올해 많은 시집을 읽으며 솔직함은 나이와 반비례하는 것 아닐까 생각했다. 올 해 읽은 시집 중에는 젊은 나이에 등단하여 시작 활동을 하는 작가부터, 한창 감정이 불타오르는 서른, 마흔 나이의 작가들, 원숙해진 시어를 들려주는 원로 작가까지 다양했다. 시인의 나이는 다양했다. 젊은 시인들 혹은 서른과 마흔 나이의 시인들은 자기 자신에 솔직했다. 솔직하다고 느꼈다. 거침없이 자신의 감정을 파헤치고, 드러내고, 방향 없이 발산했다. 반면 원숙한 시인의 원숙한 시어는 에둘러간다고 느꼈다. 출발선에서 달리기를 시작해 결승선에 도착하기 직전 돌아본 삶은 마치 아무런 후회와 원한과 욕망이 없는 것처럼 보여졌다. 처음에는 삶을 포용하는 시어가 따스했으나 이어 솔직하지 않다고 느꼈다. 사람으로서 솔직하지 않아 보였다. 어쩌면 시인의 나이가 시인을 대하는 나에게 편견을 심어주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제일 솔직하지 않은 건 나인가 싶었다.

10월에 허수경 시인의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를 읽자고 결심하고 며칠 뒤 시인의 부고를 접한 것은 묘한 긴장감을 주었다. 시인은 등단 뒤 이십 대 나이에 시집을 두 권 내고 독일로 건너가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살다 암 투병 끝에 별세했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가 출간된 것은 2016. 시인의 나이도 오십을 넘겼고 어쩌면 몸도 조금씩 병들기 시작했을 무렵에 탄생한 작품일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삶보다는 삶 아닌 죽음에 눈을 돌리고 삶은 그만큼 여유롭게 바라볼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시인이 들려주는 시어는 반대의 감정으로 가득했다. 시인이라는 연필 한 자루가 점점 짧아지면서 떠난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 잊혀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아름다웠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 당신은 나쁘기도 하고 이쁘기도 한 복잡한 감정 ...... 삶과 죽음 사이 어느 지점에 있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시인은 끝까지 솔직해지고 싶어 했다. 오래된 과거를 돌아보는 시인의 솔직함은 묘하게 감동적이었다.

삶과 죽음 사이 어느 지점에 서서 지나온 길을 돌아봤다고 했다. 계절로 치면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접어드는 순간을 통과하고 있는 셈이다. 시인은 아주 많은 시에서 여름이라는 계절을 언급했다. 그 봄, 가을, 겨울 시인은 당신과 함께 있었으나 한 번도 노래를 한 적이 없다고 했다. 우리의 계절은 시퍼런 빛들이 무작위로 이마를 짓이기는 여름이라고 했다. 그리고 레몬향이 거미줄처럼 엉킨 여름밤 속에서 사랑을 한다고 했다. 아니, 사랑을 했을 것이다. 이것은 과거의 일이다. 삶에 대한 미련, 집착, 후회, 그리움에 솔직해질 수 있는 사람이 가장 그리운 계절은 아마 여름일거다. 여름처럼 태양이 작열하는 삶의 정점은 다시 시인에게 허락되지 않기 때문일거다. 나는 아직 여름보다는 가을과 겨울을 좋아했다. 한 해가 끝나고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된다는 감정이 좋았다. 그렇게 보면 나는 아직 삶과 죽음 중 삶에 더 가깝다고 믿었던걸까. 그래서 아직 더 많은 여름이 내 앞에 놓여져 있을 것이라 생각한걸까. (2018. 10. 26)


지난 여름 속 당신의 눈, 그 깊은 어느 모서리에서 자란 달에 레몬 냄새가 나서 내 볼은 떨린다 레몬꽃이 바람 속에 흥얼거리던 멜로디처럼 눈물 같은 흰 빛 뒤안에서 작은 레몬 멍울이 열리던 것처럼 내 볼은 떨린다

달이 뜬 당신의 눈 속을 걸어가고 싶을 때마다 검은 눈을 가진 올빼미들이 레몬을 물고 레몬향이 거미줄처럼 엉킨 여름밤 속에서 사랑을 한다 당신 보고 싶다, 라는 아주 짤막한 생애의 편지만을 자연에게 띄우고 싶던 여름이었다 

- 허수경 시인의 <레몬>중에서

 

http://blog.naver.com/marill00/221385313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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