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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 - 문학동네시인선 100 기념 티저 시집 ㅣ 문학동네 시인선 100
황유원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2월
평점 :
어두운 밤이었다. 딸 아이는 내 손을 잡고 졸망졸망 걸어가는 것인데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손가락을 들어 밤 하늘을 가리킨다. 저것 보라고 했다. 밝은 가로등이 하나 서 있고 가로등 옆에는 소나무인지 향나무인지 동백나무인지 모를 사철나무 하나가 나란히 서 있었다. 아이는 저것을 보라고 했다. 저것의 색깔이 변했다고 몇 번이고 말했다. 처음에는 가로등 불빛이 밝은 것을 보고 놀랐다고 생각했지만 손 끝을 따라 시선을 옮겨 보니 사철나무의 끝이 갈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러니까 사철나무라고 생각했던 것은 계절이 바뀌며 색이 변하는 것이니 사실 사철나무는 아니었던 거다. 녹색이 미묘하게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쉽게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아이의 눈이 참으로 매섭고 신기했다. 우리는 다시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와 걸었던 길을 오늘은 나 혼자 걸었다. 회사에서 늦은 날이었다. 집에 거의 도착한 순간 걸음을 멈추고 어제의 나무를 올려 보았다. 여전히 갈색이었다. 나는 아이를 생각했다.
아이에 대해 생각했다고 했다. 아이는 태어난 지 두 해 반을 지나 걷고, 뛰고, 말하고, 웃고, 울고, 사랑스럽게 다가와 안기고, 또 세상에 혼자인 것처럼 자기만의 시간을 보낸다. 아이가 말을 한다고 했다. 아이는 두 돌이 지나면서 폭발적으로 단어를 배우고 습득한 것을 정확하게 발음하기 시작했다. 가끔 아이가 자기 자신에게 나에게 아내에게 하는 말을 듣다 보면 가슴 한 켠이 섬뜩해질 때가 있다. 이 아이가 언제 이런 단어를 배웠는가. 이 아이가 언제 이런 표현에 눈떴는가. 이 아이가 어쩌면 이렇게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표현 방식으로 이토록 세상을 아름답게 묘사해내는가, 그런 것에 섬뜩해질 때가 있다. 속으로 생각한다. 이 아이의 지금 이 말들을 기억하겠다고. 그리고 돌아서서 깨닫는다. 순간의 섬뜩한 기쁨은 언제나 돌아서면 까맣게 잊혀지는 법이라고. 그래서 아이의 말이 정확하게 기억되는 것은 거의 없다. 남는 것은 그 순간 품었던 경이로운 감정뿐이다. 말은 사라지고 아름다움이 남았다.
여행을 가기로 했다. 아이와 여행을 가려니 챙길 것이 많아 자연스럽게 가지고 가지 못할 것들도 많아진다. 책을 놓고 가기로 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세 번째를 읽던 참이었다. 가방은 가득 찼고 책은 무거웠고, 머리도 가득 찼고 무거웠다. 책을 읽지 않기로 했다. 여행을 하며 느끼는 순간의 것들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여행을 하며 느끼는 순간의 것들은 사진으로 담아내기도 하겠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차 휘발되어 집에 돌아오면 까맣게 잊혀지는 것이 더 많았다. 그래서 여행의 경험이 정확하게 기억되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그런 것들이 좋았다는 주관적인 감정 몇 개만이 떠오른다. 언제 어디에 여행을 다녀왔는지 정도를 기억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여행은 아이의 말과 같다. 돌아서면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설레고, 경이롭고 삶이 온전하게 구슬려지고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너는 아름답다. 나는 너의 아름다움을 기록하지 않되 최대한 기억하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