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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단어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393
유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6월
평점 :
라디오를 듣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아주 오래 전. 공부하려고 책상에 앉아 작은 오디오 전원을 켜면 라디오가 흘러나왔는데 아주 어릴 적에는 그게 무슨 채널인지, 채널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방송이 무엇인지, 방송을 진행하는 DJ는 누구인지 궁금하지도 않은 채 그저 흘러나오는 것을 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라디오 DJ와 방송 프로그램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 중학교 진학을 앞둔 무렵. 11년 동안이나 별밤지기를 맡았기 때문에 지금도 별밤지기라고 한다면 나와 내 위의 세대는 이문세를 떠올리겠지만, 내가 라디오 너머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주파수를 더듬던 시절에는 이휘재가 MBC 표준FM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진행하던 시절이었다. 그가 전창걸과 함께 ‘영화공작소’ 라는 코너를 진행한 적이 있다. <쉬리>, <타이타닉> … 영화 주요 장면을 재미있게 소개하는데 지금까지도 그 대사를 외우는 걸 보면 아마 그 무렵을 기점으로 라디오가 본격적으로 나의 생활을 장악하기 시작했던 듯 싶다.
하루 종일 라디오를 듣다 보니 시간대 별 프로그램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라디오 프로그램이 사람의 감정에 내려 앉는 결은 시간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저녁의 라디오는 깊은 호수와 같았다. 조용한 밤 DJ의 목소리가 고요하게 들리는 가운데 타인의 사연 속으로 깊게 빠져들었다. 낮의 라디오는 시장이었다. 겉잡을 수 없는 흥겨움 속에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타인의 사연은 깊게 파고들 것이 아니라 얇게 이해되고 소비되는 재료였다. 그러나 누군가의 감정과 사연에 동화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때로 감사하기도 했다. 이제 아침의 라디오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들었던 아침의 라디오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아침이라며 억지로 생글거리는 활기를 강요하지도 않았지만, 하루를 출발한다는, 시작한다는 적당한 템포와 세기를 전해 주었다. 가끔 누군가의 사연이 소개되기도 했으나 DJ의 목소리는 건조한 편이었다. 아침의 라디오는 분명 가까이 살고 있으나 좀처럼 살갑게 인사한 적 없는 옆 집 이웃과 같았다.
그러므로 유희경의 첫 번째 시집 <오늘 아침 단어>를 읽을 때 나는 생각한다. 이 시인은 아침이면 분명 방송국 어디선가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을 거라고. 그의 목소리는 비교적 나지막할 것이라고. 그리고 그의 라디오 채널은 그의 목소리처럼 담담하면서도 너무 가깝게 다가서지 않을 것이라고. 하여 적당한 깊이의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앉아 가만히 앉아있을 것이라고. 다가서지도 물러서지도 않는 알맞은 거리감이 나와 유희경 시인 사이에, 시인과 세상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여있을 것이라고. 나는 유희경의 시집을 읽으며 생각하게 된다. 그의 시집 제목처럼 그만의 건조한 서정은 낮도 아니며, 저녁도 아니며, 너무 늦은 밤도 아니며, 비교적 아침에 떠올려지고 회자될 성격이었다. 그는 우산에 대해서라면 오래오래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우산은 기본적으로 혼자 쓰는 것이었다. 나는 우산 아래 숨을 수 있고 숨은 공간 너머로 타인과 알맞게 교류할 수 있다. 핵심은 ‘알맞게’ 였다.
최근 몇 개월 동안 내면에 끝없이 파고드는 시어를 가까이 했다. 황혜경, 이제니, 김이듬 …… 서로 다른 시인들은 유사한 시어를 내세우며 나를 한없이 깊은 감정의 골짜기로 데려갔다. 그들의 사연이 녹아있는 시어를 가까이 하며 깊은 계곡을 내려갈 때는 황홀했으나 다시 나의 세계로 돌아오는 일은 요원한 것처럼 보였다. 떠남보다 돌아옴이 버거웠다. 그리하여 유희경 시인의 시집을 읽고 서점을 거닐다가 류근 시인의 산문집이 눈에 들어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어떤 슬픔에 대해서 천천히 이야기한다고 했다. 함부로 사랑에 속아주는 버릇. 그리고 함부로 인생에 져주는 즐거움. 사랑에 속아준다는 것은 타인에 대해 어려운 마음을 갖지 않겠다는 결의였다. 류근의 바로 대척점에 유희경 시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 모두는 우산을 쓰는 일 같이 꽤나 혼자인 셈이라, 남의 사연과 감정에 깊게 끌려들어갈 시간과 자신이 없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는 함부로 사랑에 속아주지 않는 버릇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
우산에 대해서라면 오래오래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검은 빛이고 나는 펼쳐진 시간을 사랑한다.
예를 들어 점점 어두워져 가는 거리, 어깨를 감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 가로등 켜지고, 그림자 사라지고, 나는 머뭇거릴 때,
검은 물로 태어나는 것 혹은 젖은 몸으로 살아가는 것 쉽게, 자신을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리는 방법 혹은 혼자서 걸어가는 일
- 유희경 시인의 <우산의 과정>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