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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1~4 세트 - 전4권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레프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평점 :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말에 대해 생각한다. 1812년으로 돌아가보자. 볼콘스키 가문의 첫째 아들,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은 나폴레옹에 맞서 러시아의 운명이 걸린 보로디노 전투에 참가한다. 전투는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의 승리 아닌 승리로 끝났고, 볼콘스키 공작이 속한 러시아는 패배 아닌 패배를 경험했다. 전쟁은 참혹했고 주변에는 부상자들이 가득했고 볼콘스키 그 자신도 심각한 부상을 입고 사경을 헤맨다. 그도 알고 있는 바실리 가문의 차남 아나톨이 다리가 잘려 나가는 광경을 지켜본다. 그런데 인간과 인간의 삶이 부서지는 참혹한 순간에 안드레이 공작은 역설적으로 사랑의 위대함을 각성한다. 형제에 대한 사랑, 적에 대한 연민, 주변을 사랑하라는 신의 섭리. 사실 전쟁터는 사랑의 위대함을 각성하기에 적합한 지점은 아니다. 살갗이 뜯어져 나가는 현실의 순간에 사랑에 대해 곱씹어 볼 여유가 어디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결고리야말로 톨스토이의 문학을 톨스토이만의 것으로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말은 두 가지를 연결시키고 있다. 먼저 어떤 현실에 처해있고, 또 그 상황이 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지각하지만 다른 길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는 운명을 매개한다. 즉 거부하고 싶은 현실과 거부할 수 없는 운명 사이에 그럼에도 불구하다는 말이 위치해 있다. 매개되어 있는 것 사이에 우리는 보통 주인공들이 앞으로 어떤 운명을 선택하고 개척해 나갈 것인지 미래에 초점을 맞춘다. 현재의 삶이 얼마나 초라하거나, 혹은 얼마나 위대하거나 관계없이 현실을 관통하는 주인공의 각성 이후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어한다. 각성 이후의 지점에 작가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믿는다. 이 말은 분명 옳다. 톨스토이가 안드레이의 입을 빌어 그럼에도 사랑이다, 라고 말을 했을 때에는 그의 진심이 사랑, 선(善), 땀으로 가득한 성실한 삶, 이런 것에 있음을 우리는 안다. 피예르를 통해, 레빈을 통해, 네흘류도프를 통해, 그리고 이들이 겪은 다양한 군상을 통해 톨스토이는 자신의 생각을 드러낸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사랑과 선(善), 아니 작가의 무엇이라도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 재구성될 삶이 공허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삶 역시 진정성 있게 다루어져야 한다. 지금까지의 삶이 진실되게 다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은 현실을 긍정해야 한다는 당위가 아니다. 오히려 지금 발 밑에 깔려있는 현실의 부조리함과 참혹함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보여주고 경험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길을 걸어가려는 삶에 당위가 생긴다. 말이 길었다. 톨스토이의 문학은 현실과 운명 어느 것 하나 가볍게 다루지 않는다. 작품 내내 휘몰아치는 다양한 군상들의 생생한 목소리는 현실이 얼마나 우연으로 가득하며 매번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전개되는지 알려준다. 모두가 혼란스러운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엔트로피의 삶을 살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비단 1805년부터 1812년 모스크바의 함락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시간만이 전쟁이 아니라, 삶 전체가 끊임없는 투쟁과 전쟁의 연속이다.
톨스토이는 우리에게 현실과 운명 두 가지에 대한 고민을 요구한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 크고 작은 각성의 순간을 경험하며, 끊임없이 좋은 방향으로 삶을 만들어 가려고 노력한다. 사람의 본성이라고 믿고 싶다. 그러나 어느 순간 굳은 결심은 약해지고 주변의 사람은 통제되지 않고 지배할 수 없는 사건이 늘 발생한다. 삶은 쉽게 부서지고 허물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새로운 삶의 가능성에 대해 도전하고 생각을 품는 존재이기도 하다. 사람의 특권이라고 믿고 싶다. 비록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참혹한 현실에 기인하지 않고 불연속적이라 하더라도, 비록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톨스토이가 말한 사랑과, 선(善)과는 다른, 각자의 것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런 것이었다. 우리는 삶이라는 전쟁을 겪고 있기도 하며, 동시에 아주 우연히 그와 반대의 삶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것. 우리가 꿈꾸는 평화라는 것이 도달할 수 없는 신기루라 하더라도 말이다. 이 역설을 이해한 순간 나는 본질적으로 행복해졌다.
(2018.10.22)
덧. 톨스토이의 장편 세 편을 쓰여진 시간과는 반대로, <부활>, <안나 카레니나>, <전쟁과 평화>순서로 읽었다. 작품의 분량은 점차 늘어났고 작품의 세계관은 점차 깊어졌다. 톨스토이를 만난 것만으로도 2018년은 본질적으로 행복했다, 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