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한 생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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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4. 24 

 

파스칼 키냐르가 도대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읽을려고 빌렸지만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이제야 읽게 되었다. 망설인 이유는 누군가가 읽기 힘들었다고 지나가는 말로 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파스칼 키냐르는 영화로도 상영이 된 <세상의 모든 아침>의 원작자로 프랑스에서 1948년에 태어났다. 그는 <떠도는 그림자들>로 공쿠르 상을 받은 작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 첼리스트, 오페라 작곡가라고 한다. 참 대단하군.



은밀한 생>은 1993년 6월로 거슬러 올라가서 시작된다. 장편소설로 분류되어있지만 잠언 같고 시 같은 문장들은 그 자체로는 온전히 내게 다가오기 어려웠다. 그것은 내 머리속에서 형태를 갖지 않은 채 피어나는 수 많은 이미지들을 채워서 내가 짐작할 뿐이다.



화자가 사랑했던 네미 사틀레와의 사랑이 구체적으로 보이는 전반부는 그래도 읽기가 수월하고 재미도 있었지만 뒷 부분으로 갈수록 읽기가 어려워졌다. 나는 "아이구, 자폐증에 걸린 영감탱이의 주절거림 같다"라고 중얼거리면서 어렵게 읽었다.



잘 읽히지 않는 것은 그의 글을 글 자체로 읽기에는 우선 내가 역량미달이라는 것을 인정해야한다. 왜냐하면 그의 글은 문장 자체로 이해하려고 하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집'이라는 단어가 있다면 일반적인 '집'이라는 단오로만 읽을 수가 없다. '집'이라는 단어가 피워내는 많은 이미지들 중 적합한 이미지를 가져와야한다. 키냐르가 쓴 단어, 문장들의 나머지 반은 내가 채워가며 읽어야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나의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하고 시적인 감성이 필요하다. 오죽 읽기가 팍팍했으면, 박상륭을 떠올렸을까.



소설이라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깊은 사색의 순간을 그대로 기록한 것 같은 이 작품은 여러 면에서 흥미롭다. 차례와 본문의 각 장에서 제목이 약간씩 다르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차례에서 제 1장은 제목을 괄호 속에 '아트라니'를 넣어두었는데 본문에서는 그냥 제 1장, 이런 식이다. 이것을 역자는 작가가 반복하여 말하고 있는 침묵의 의미와 연관이 있다고 설명한다. 키냐르는 말보다 침묵을 요구하고 소리나지 않는 연주에 감동하기를(자신의 책을 읽는 독자에게 혹은 연주를 듣는 청자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음악은 사랑이며 문학이다.

책 말미에 역자는 이렇게 말을 하고 있다.



‘은밀한 생’이라는 제목은 사회의 사각(死角)지대에서 사회의 중재 없이 살아가는 삶의 한 형태, 전류에 비유하자면 정상적인 흐름에서 단락(短絡)된 상태로 살아가는 방식을 의미한다. 집단의 동의 없이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 살아가는 방식, 즉 결혼이 아닌, 번식의 목적성이 배제된 철저하게 반사회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은밀하게 살아가는 방식이다. -480쪽.



번역을 하는데 3년이나 걸렸다는데도 나는 읽어내려가면서 문장이 턱턱 걸릴 때마다 불평했다. 도대체 무슨 말이냐구. 키냐르 잘못이냐구, 번역자 잘못이냐구. 이런 문장을 볼까.



최초의 의존 상태에서 눈금이 새겨진 모든 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끌어당기는 각인을 향해 역류하려는 경향이 있다. -13쪽.



최초의 의존 상태는 뭐고 눈금이 새겨진 모든 것은 뭐란 말일까. 끊임없이 자신을 끌어당기는 각인은 또 뭔가. 각인? 각인. 그리고 그 각인을 향해 눈금이 새겨진 모든 것이 역류한다?  

프랑스어 문장에 꼭 맞는 우리문장 대체가 어려운 건지, 키냐르의 사고를 내가 따라잡기 어려운 건지 잘 모르겠다. 마치 번역된(서투른) 논문을 읽을 때의 불편함을 느꼈다.  

고백하자면 나는 책을 읽는 도중에 다른 사람이 번역한 책이 혹시 있나 열심히 검색을 해보았다.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파스칼 키냐르의 책들은 모두 송경의씨가 번역을 한 모양이다. 이럴때 나는 힘이 빠진다. 비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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