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하쥐 털가죽
미야자와 겐지 지음, 이경옥 옮김, 김선배 그림 / 우리교육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신화의 시대. 사람과 자연이 진정 소통하며 살던 시대. 사람과 동물 사이에 ‘대칭’적인 관계가 형성돼 있던,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던 시대. 그 시대 사람들은 동물을 잡아먹기 전에 동물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꼭 죽은 동물의 영혼을 기리기 위한 제의를 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대칭성의 사회를 살던 사람들은 철학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신화로써 그러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후대에게 가르쳐왔다고 한다. 일본의 인문학자 나카자와 신이치는 ‘야생적 사고의 산책’이라는 뜻의 ‘카이에 소바주 Cahier Sauvage’ 씨리즈 중 하나인 『곰에서 왕으로-국가, 그리고 야만의 탄생』(동아시아)에서 그러한 시대와 단절된 지금을 야만의 시대로 규정한다. ‘문화’는 없고 ‘문명’만 남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동물을 죽이고 자연을 죽이는 야만의 시대. 나카자와 신이치는 잃어버린 대칭성을 찾아나서는 지적인 여행을 열어 야만의 시대를 벗어날 지혜를 들려준다.

이 책에서 나카자와 신이치는 미야자와 겐지의 작품 「빙하쥐의 털가죽」 내용을 모두 소개한 뒤, 미야자와 겐지가 다른 작품들을 통해서도 인간과 동물의 비대칭적 관계를 뒤엎는 통쾌한 이야기를 써왔다고 말한다. 신화적 사고를 바탕으로 야만의 문명을 쌓아온 인간세계에 도전하는 문학을 해온 작가로 평가하면서.

동화작가는 샤먼과 같다는 이야기를 어느 어린이문학평론가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사람과 자연의 소통이 가능하던 시대의 이야기인 신화를 읽고 공부하는 것이 어린이책 관계자들, 특히 작가들에게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도 그러한 인식 때문일까. 이들에게 신화가 담고 있는 상상력은 그저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위한 것만이 아닌, 사람과 자연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그 회복된 관계를 이야기로써 아이들과 나누기 위한 상상력이기도 할 터. 나카자와 신이치가 소개한 미야자와 겐지의 작품이 이 책 『빙하쥐 털가죽』(우리교육)이라는 그림책으로 되살아났는데, 샤먼으로서의 동화작가가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어떤 것일지를 잘 보여주는 책이 아닐까 한다.


이 책은 이야기의 분위기 자체가 신화적이다. “머나먼 북쪽 추운 곳”으로부터 “드문드문 바람결에 실려 온” 이 이야기는, 베링이라는 상상의 장소로 가는 열차를 무대로 펼쳐진다. 미야자와 겐지는 바람결에 실려 온 이야기 중 하나를 전해준 셈인데, 열차에는 수많은 동물의 털가죽을 벗겨 만든 외투를 입은 뚱보 신사, 뻣뻣한 천으로 만든 옷만 걸친 젊은이, 그리고 붉은 수염이 난, 북극여우처럼 생긴 사람 등 여러 명이 타고 있다. 이들은 덜컹거리는 기차를 타고 점점 더 깊이 신화의 장소로 들어선다. 그러다 동쪽 창이 눈부시게 빛나는 새벽, 열차가 느닷없이 멈추고 스무 명쯤 되는 무시무시한 사람들이 총을 들고 객실로 들어온다. 이들은 마치 흰곰, 흰여우 같이 생겼는데, 열차에 타고 있던 붉은 수염 사나이도 총을 든 채 그 맨 앞에 서서는 뚱보 신사를 잠에서 깨운다. 그 뚱보는 자기가 얼마나 많은 동물을 죽여 만든 털가죽 외투를 입었는지를 밤새 자랑했던, 검은 여우 털가죽을 900장이나 벗기러 베링에 가는 사내다. 총을 든 사내들이 뚱보를 밖으로 떠밀어 내보내는 사이, 갑자기 탕! 총소리가 난다. 그러면서 뻣뻣한 천으로 만든 옷만 걸인 젊은이가 나타나는데…….


미야자와 겐지는 추억의 만화 「은하철도 999」의 바탕이 된 「은하철도의 밤」을 쓴 작가라는데, 나는 그의 작품을 읽어본 것이 하나밖에 없다. 그것도 그의 단편에 그림을 많이 넣어 만든 어린이책인데, 『첼로 켜는 고슈』(보림)라는 작품으로, 여기서도 주인공 소년 고슈는 밤마다 동물들을 만나 첼로 연주를 들려주는, 동물과 인간이 소통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마침 비슷한 때에 미야자와 겐지의 두 단편이 그림이 들어간 책으로 나와 흥미로웠던 데다가, 『곰에서 왕으로』를 읽고 알고 있던 이야기인지라 관심을 갖고 얼른 이 책을 본 것이다.

그림과 함께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은 ‘이야기를 보는 맛’을 한껏 전해준다. 추운 북쪽으로 가는 열차가 이야기의 무대라 그런지, 차가운 서리가 어린 창문을 통해 이야기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그런 느낌이 일러스트로 잘 표현되었다. 그러면서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익살스럽기도 한 분위기도 한껏 잘 나타냈다. 설명하는 그림이 아닌, 이야기의 분위기를 잘 살려 독자들의 상상력을 이끌어내는 그림이랄까. 글과 그림의 관계도 단조롭지 않게, 구성력 있게 잘 엮여졌고, 캐릭터도 매력적이다. 그림 그린 분은 책에서 처음 만나는 화가인데, 앞으로 어떤 일러스트레이션을 보여줄지 무척 기대된다. 그동안 기존의 단편 작품을 그림책으로 만드는 작업이 어린이책 판 안에서 많이 돼 왔는데, 이 책은 그런 책들 가운데 단연 그림책의 특성을 잘 살려 만들어진 책으로 돋보인다고 평가하고 싶다.


이 책을 아이들이 많이 보았으면 좋겠다. 권정생 동화집 『하느님의 눈물』(산하)이 떠오르기도 하니, 아울러 그 책도 아이들이 같이 읽었으면 좋겠다. 풀을 먹어야 사는 토끼가, 자기가 먹으면 죽게 될 수밖에 없는 풀이 가여워 풀을 먹지 못하는 이야기 「하느님의 눈물」. 자기 목숨을 유지하려면 다른 생물을 죽여 먹을 수밖에 없는, 서로 먹고 먹힐 수밖에 없는 자연의 섭리는 저 토끼처럼 내 목숨을 어떻게 유지해야 되나 고민을 주지만, 미야자와 겐지가 말한, 그의 작품을 통해 나카자와 신이치가 말한 인간과 자연의 대칭성 회복은 그런 고민을 해결해나갈 주요한 인식 가운데 하나이지 않을까 한다. 신화적 사고가 잘 담긴 이런 이야기가 아이들에게 새로운 상상력을 불어넣어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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