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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나가는 문 - 아르헨티나문학 ㅣ 다림세계문학 5
아나 마리아 슈아 지음, 조영실 옮김, 아나 루이사 스톡 그림 / 다림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세상에서 나가는 문’이라, 제목부터 심상치 않았다. 그렇다면 이 세상 바깥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건가? 거기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걸까? 만약 나갈 수 있다면, 거기서 우리는 무엇을 겪을 것인가. 생각이 꼬리를 물었기에, 또 생소하기만 한 아르헨티나 어린이문학이라는 점에도 이끌려 결국 이 책을 읽었다.
세상에서 나가는 문이 우리 앞에 있다면 우리는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그 문고리를 잡아보지 않을까 한다. 이 두 마음은 어쩌면 하나일지 모르겠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둘이면서 하나인 마음.
헌데 세상에서 나가는 문은 그 문을 깊이 갈구하는 사람 앞에 나타나기 마련일 듯하다. 엄연히 존재하여 우리가 찾아가거나 말거나 하는 문이 아닌, 적극적으로 불러내는 문. 이 세상에서 나가고 싶은, 혹은 다른 세상을 꿈꾸는 사람은 그 문을 소망할 테고,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그 문을 통과하고 싶어 할 것이다.
만약 우리 아이들이, 아니 내 아이, 당신의 아이가 지금 그 문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면? 호기심은 곧 두려움이기도 하니, 바깥세상으로 가든 이 세상에 계속 있든 ‘살아가기’는 어차피 마찬가지일 거라고 충고할 것인가. 아니면 왜 다른 세상을 꿈꾸는지 대화해볼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아예 그 문을 아이 앞에 불러내줄 것인가.
이 책을 쓴 작가 ‘아나 마리아 슈아’는 아마도 아이들이라면 세상에서 나가는 문을 찾고 있다고 믿는 듯하다. 책을 다 읽고 나니 그 믿음은 작가도 어릴 때부터 간직해온 깊은 믿음이 아닐까 싶다. 자기도 어렸을 때부터 이 세상에서 나가는 문을 찾으려 했고, 그럴 수 없는 세상에서의 삶을 살아오면서도 그 바람만은 잃지 않고 살아온 것 같다.
세상에서 나가는 문을 찾고 있을 아이들에게 보낸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세상에서 나가는 문’이 되었다. 고작 손바닥 안에 놓일 작은 문이지만, 아이들의 적극적인 부름에 호응하여 불러내준 문이다. 펼쳐봐야 글자랑 그림밖에 없고 얼굴 하나 가릴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작은 문. 바로 이 책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보자.
이야기 시작부터 흥미로운 말 걸기가 시작된다. 작가는 문을 열자마자 “네가 어렸을 때 있었던 일이란다”라며 책 읽는 ‘나’를, ‘내 경험’을 끌고 나와 앉힌다. ‘나’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숱하게 많이 봤어도 이렇게 ‘네’ ‘너’를 지목하며 책 읽는 나를 불러들이는 이야기는 별로 보지 못한 것 같다. ‘오~ 쎈데?’ 하면서 읽기 시작한 이야기는 점점 우리를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문으로 드나들게 한다. 이 책 띠지에 있는 문안처럼 “현실과 닿아 있는 ‘환상의 문’이 열리는 순간”을 줄곧 만들어내는 것이다.
물론 그 중심에는 ‘아이들’이 있다. 어쩌면 이렇게도 현실의 아이들, 그리고 우리가 아이였을 때 느끼고 겪었음직한 것들을 잘 불러 모아 그것을 현실과 환상을 직조해내는 가운데 무늬로 박아 넣을 수 있었을까. 아이들에게 세상으로 나가는 문을 적극적으로 불러내주는 작가의 면모가 잘 살아 있는 대목이다. 어디까지나 아이들 편에 서려는 태도. 이 책을 읽다 보면 단편 한 편 한 편에 나오는 주인공 아이들의 경험이 우리 둘레 아이들의 경험으로 전이되는 느낌을 받는다. 아, 그 녀석이 지금 얘처럼 이런 경험을 했기에, 이런 상태에 있었기에 그때 그랬구나, 하며 현실의 아이를 이해하게끔 돕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이끌어낸다. 어른들의 거짓에 속이 타는 아이, 지저분한 물건 하나를 애지중지 간직하며 혼자 말을 거는 아이, 눈에 안 보이는 친구가 있는 듯 혼자 중얼거리는 아이,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아하는 걸 혼자서만 무서워하고 왠지 모를 두려움에 혼자 떠는 아이…….
이 책의 미덕은 또한 넘치지 않는 익살에도 있다. 대놓고 ‘너’한테 말을 걸며 이야기를 시작한 작가는 줄곧 이야기 속으로 너무 깊이 빠져들지도, 또 한발 물러나 팔짱만 끼고 있지도 않은 채 담담하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런데 그런 가운데 그때그때 발휘되는 익살이 웃음을 짓게 한다. 이야기 자체로, 또 언어감각으로도 익살을 준다. 물론 가끔은 익살을 들려주기 위해 어른이 아이에게 말을 거는 듯한 태도도 보여 작가와 아이들 사이에 거리감을 느끼게도 하지만,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이 어차피 어른이 들려주는 이야기 식으로 전개되니 그리 문제될 건 없다고 본다.
모두 2부로 나눠진 듯한 구성에서, 뒤에 놓인 이야기 세 편은 아르헨티나의 전설에 바탕을 둔 것들이다. 아르헨티나의 전설이라, 우리에게는 생소한 것인지라 호기심이 일기도 했지만 이질감이 느껴질까 살짝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작가는 이야기 세 편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자기는 아르헨티나 전설에 바탕을 둔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며, 그 전설을 어떤 식으로 이용할지를 밝힌다. 이야기 사이에 작가의 말이 들어가 있는 건데, 그게 독특하면서도 재미있고, 작품의 이해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돕기도 해서 우리 아이들이 읽기에 나쁘지 않겠다.
사실 이 대목은 이 책 작가에게 믿음을 갖고 지지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기 나라의 전설을 적극적으로 현대 이야기로 불러들여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는 건 전통을 새롭게 이어가고자 하는 시도라 좋게 평가하고 싶다. 또 그런 시도에는 일방적인 문화제국주의에 대한 대응의 의지도 들어 있어 더욱 믿음을 준다. 다양한 언어와 이야기가 아이들에게 전해지기는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단단하다.
이런 의도로 씌어진 이야기가 재미도 쏠쏠하다. 현대 아이들의 보편적인 삶에 불러들인 전설이기에 이질적이지 않고 참신하다. 어디까지나 지금 아이들의 삶에 밑닿아 그들 편에 서려는 태도를 잃지 않으면서 아이들 스스로 이야기를 읽으며 자기 삶을 돌아보게도 한다.
오랜만에 아주 재미있고 의미도 있는 작품을 읽었다는 기쁨이 크다. 영미권이나 일본의 작품, 또는 유명 작가의 작품이나 상받은 작품만 그저 쏟아져 들어오는 우리 어린이책 출판계에, 이렇게 적극적으로 그 바깥 나라의 작품을 소개하려는 출판사의 의지도 돋보인다. 앞부분에서 번역투 문장이 몇몇 눈에 띄긴 했지만 전반적으로는 잘 읽혔고, 책 속 그림도 설명적이지 않고 이야기 속에 잘 들어가 있어 좋았다. 이 책이 좀더 많은 이들에게 소개되어 아이들에게 현실 속 환상의 문, ‘세상에서 나가는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보도록 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