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뇌과학』(『감정 뇌』)을 펼쳐든 것은 이 책이 (현 시점 내 인생 책 중 하나인)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리사 펠드먼 배럿, 이하 『감정은』)의 핵심 이론인 ‘구성된 감정 이론(Theory of Constructed Emotion)’을 기반으로 쓰였다는 이야기를 주워들었기 때문이다. 구성된 감정 이론이 인간 이해의 중요한 열쇠가 될 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이 책을 통해 이해를 더해보자고 마음을 먹었더랬다. 


하지만 조금은 당황스러운 반전이 있었으니, 『감정 뇌』가 내 짐작과 달리 배럿의 구성된 감정 이론을 지지하면서도 그것을 주된 소재로 삼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아, 이거 괜히 읽기 시작한 건가 싶으면서도, 저자의 필력과 책의 논의가 재미가 없지 않아서 계속해서 이 책을 읽어가던 와중에, 얼마 지나지 않아 계획과는 다른 방식으로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끝까지 들어봐야 하는 한국말 같은 책이었달까.


이 글은 뇌과학 책에 대한 서평이지만, 동시에 뇌과학을 넘어선 (누군가에게는 장황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장엄한) 이야기를 펼쳐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과연 나는 어느 방향을 향해 걸어 나갈까?


📚 우리는 사실 감정을 몰랐다

『감정 뇌』는 코로나19로 아버지를 잃은 저자가 고통스럽도록 슬펐음에도 겉보기에 충분히 슬퍼 보이지 않은 자신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뜻하지 않게 부모님을 잃은 사람이 보일 법한 반응(예를 들면 오열이라든지)이 자신에게서 전혀 나타나지 않아서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내가 울지 못한다거나 내 감정을 인식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p.53) 다만 이 책에서 확인 가능한 가장 확실한 사실은 겨우 58세였던 “아버지를 만나거나 제대로 작별 인사를 하지도 못한 채 그 여파를 혼자서 견뎌야 했”던 경험은 “지금까지 삶에서 최악으로 꼽힐 만한 감정적 고통과 트라우마였다”는 것이다(p.9).


신경과학자로서 자신의 감정 상태를 이해할 수 없었던 저자는 본격적인 감정 연구에 돌입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당황하고 만다. 신경과학자로서 다른 이보다 감정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아는 게 많지 않았는데, 심지어 “놀랍게도 여러 세기에 걸친 연구와 논쟁에도 감정이 정말로 무엇인지에 대한 확고한 합의는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 대부분들은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을지도 모르겠다. 하루에도 수없이 감정적인 순간을 맞고 있는데, 그걸 모른다는 게 말이 된다고? 하지만 “감정은 우리와 무관하거나 주변적인 존재가 아니라 우리 존재의 모든 것”(p.10)이란 설명을 들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기원전 3세기, 스토아학파가 “모든 상황에 논리와 이성을 적용하라”고 주장한 이래로, 우리는 그들의 정신적 후예로서 이성을 신 이상으로 숭배해왔으니까. 감정이 격해질 때마다 많은 이들이 “감정적으로 굴지 마”라는 말을 꺼내는 것이 우리가 감정을 제대로 모른다는 증거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감정은 우리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감정을 모른다는 사실에서 출발하는 저자는 감정이 (우리 모르게) 하는 일들을 다양한 일상에서 과학적인 원리를 추적해간다. 이 책의 주된 목표이자, 독자가 얻을 가장 유용한 정보다. 하지만 내가 너무 산만한 탓이었을까?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는 동안 나는 자꾸만 곁눈질을 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데? 특히 몇몇 사례는 사회적 이슈에 대한 힌트처럼 보이기 시작한 걸 보니, 이건 잘 읽으면 몰입, 잘못 읽으면 망신의 경계선을 걷는 느낌까지 들었다.


📚 감정, 우리 존재의 모든 것

저자가 소개하는 감정의 일 중 내가 주목했던 몇 가지만 살펴보자. 일단 ‘회사’다. 우리는 거의 모두 회사를 싫어하며 그 이유를 딱히 찾을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 보니 회사를 싫어하는 이유가 재미있으면서도 흥미롭게 다가왔다. 책에 따르면 일단 회사 일이 싫은 이유 중 하나는 동기부여다. “과학적으로 말하면 동기부여란 우리가 특정 행동이나 활동을 하고 싶게 만드는 인지적 ‘에너지’다.”(p.70) 이 동기부여는 보상이나 처벌이 따르는 ‘외재적 동기’와 성과를 보여주고 싶어서 시작하는 ‘내재적 동기’로 분류할 수 있는데, 자, 여기에서 우리를 이끄는 힘 센 동기는 무엇일까? 누구라도 내재적 동기를 고를 것이다. 그리고 “내재적 동기는 감정적인 차원에서 우리를 자극할 때 분명히 발생한다.”(p.79) 


그럼 회사 일은 왜 우리 감정을 자극하지 않는 걸까? 저자에 따르면 “업무 환경에서 감정이 제대로 고려되지 않기 때문이다.”(p.225) 실제로 대부분의 회사원들은 “직장에서 자율성 상실, 사회적 지위 상실 (…) 등을 비롯한 많은 것들을 일상적으로 경험한다.”(p.225~226)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뇌가 좋아하지 않는 것들이기 때문에” 회사 일에는 “부정적 감정이 확실히 뒤따른다.”(p.226) 심지어 “대부분의 직장에서는 이런 감정들을 제대로 처리하거나 다룰 기회를 주지 않는다.”(p.226) 내재적 동기가 생기기는커녕, 번아웃에 빠지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 정리해보면, 회사 업무에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데, 해야만 하는 일이다 보니 출근이 ‘괴로운’ 것이다.


한편 감정은 정보 저장, 즉 기억과 관련해서도 ‘열일’을 한다. 가령 대부분 사람들은 시험을 준비하면서 죽어라 암기했던 내용들을 시험 종료와 동시에 잊어버리는 일을 경험해봤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뇌는 그런 정보를 기억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설명하는데(p.131~132), 여기에서 ‘그런 정보’란 ‘감정적인 요소가 없는 정보’를 뜻한다. 반대로 “공감대를 살 만한 캐릭터들이 있다면 (…) 우리의 뇌가 몰입하는 방식 덕분에 사건, 환경, 상황에 이입하기보다는 또 다른 생각이나 느낌을 가진 개인과 감정적으로 연결되고 공감하기가 훨씬 쉽다.”(p.337~338) 특히 어린이들의 경우 “그들이 좋아하는 친숙한 캐릭터가 가르칠 때 수학 지식을 더 잘 배웠다”고 한다(p.339).


지금까지 소개한 것은 일부 사례에 불과하지만, 책의 어떤 사례를 보더라도 결론은 달라지지 않는다. 동기부여와 기억, 의사결정, 그 외에 우리가 하는 ‘거의 모든 일’들은 감정 없이 해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과학자들은 해부학적·생리학적·신경심리학적 증거에 의거해 오랫동안 뇌의 기능적 분열을 명확하게 배제해왔”으며, “뇌는 서로 다른 영역의 복잡하고 광범위한 네트워크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다(p.121). 다시 말해 “감정과 이성적인 사고를 분리하여 후자에만 의존한다는 개념은 비현실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매우 현명하지 못하게 보인다.”는 것이다(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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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보가 지각, 감정, 신념이 되어가는 과정

앞서 나는 『감정은』에서 이해한 감정을 보강 내지는 확장하기 위해 이 책을 골랐으며, 내 예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감정 이해의 깊이를 더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두 책을 따로 놓고 꺼낸 말은 아니었다. 두 책은 각자의 방식으로 감정에 대한 이해에 깊이를 더했지만, 그 과정에서 서로 긴밀하게 이어졌고 작지 않은 영감이 되었다. 내가 몰입과 망신의 경계선에서 외줄타기를 시작하는 시점이기도 하다.















일단 『감정은』에서 주장한 구성된 감정 이론에서 주변 환경에 따라 감정이 ‘그 자체’로 달라질 수 있다는 정보를 접했다. 간단히 말해 감정이 내수용 신호·과거 경험·문화적 개념이 통합된 뇌의 능동적 예측 과정에서 구성된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다(구성된 감정 이론의 반대편에 폴 에크먼의 ‘기본 감정 이론’이 있는데, 이 이론은 사람이 다섯 가지 기본 감정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주장한다. 나도 감동받으면서 본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의 뼈대가 바로 기본 감정 이론이다). 이는 특정 사건 등에 대한 감정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넘어(가령 축구를 보면서 열광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태어난 이후의 환경, 정보 등으로 인해 기본적인 감정의 종류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비단 감정만 환경의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다. 『감정은』에 대한 서평에서도 썼지만 많은 신경과학자들이 인간의 지각이 ‘예측 처리’를 기반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이전의 경험에 기반해 지각 정보를 ‘해석’한다는 것이다. 신경과학자 아닐 세스가 인간 의식을 ‘통제된 환각(controlled hallucination)’이라고 부르는 것도 우리가 실재와는 별개로 사물 사건을 지각하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유전자와 문화가 함께 진화한다는 문화-유전자 공진화론(Dual Inheritance Theory, DIT)이나 최근 생물학계의 뜨거운 이슈인 후성유전학(다양한 맥락 또는 상황에 따라 유전 물질이 활성화되거나 비활성화되는, 즉 발현되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을 연구하는 생물학의 분과 학문) 또한 문화와 환경이 인격의 후천적 형성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다는 점에서 감정 구성의 논의와 맥락을 같이 한다(후성유전학의 경우 환경이 외모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이 과정을 (맛보기로라도) 살펴본 나는 모든 인간의 지각, 지식, 감정을 아우르는 ‘절대 정보’가 성립 불가능할 거라는 (현시점 기준 주관적이지만 나는 이제 믿을 수밖에 없는) 결론을 내렸다. 실제로 사실 관계에 대한 합의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지 않나. 사실 관계를 두고도 이런 마당에 도덕, 윤리 같은 가치들은 오죽할까. 물론 살인처럼 몇몇에 대한 절대적인 합의에 다다르긴 했지만, 지금도 어떤 지역에서는 학살이 공공연히 자행되고 또 그것을 ‘정당방위’로 받아들이는 이들을 보면, 보편적·절대적 가치에 대해 회의할 수밖에 없게 된다.


⛔ 주의: 다만 강조하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인간의 지각, 생각, 감정, 신념은 사람마다 다르게 구성된다는 것이다. 즉,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으며 그러므로 옳은 것은 없다’는 허무주의를 설파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과학의 경우 지각의 상대성을 인정하고 있으며, 관찰(지각)의 차이를 합의 과정을 통해 줄여나간다(당연히 그 차이가 완벽하게 소거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신념이나 윤리 또한 과학의 방법으로 줄여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가치는 상대적으로 형성되지만, 사회적 합의를 통해 객관화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나는 생존을 위한 만인에 대한 투쟁보다는 공존이 개인과 집단에게 훨씬 나은 방법이자 가치라고 믿는다.


📚 감정 없는 신념이라는 모순

한편 『감정 뇌』를 읽으면서 기억의 형성에 있어 감정의 기여가 100%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책은 아버지의 죽음에서 시작해 우리 인생에 일어날 법한 일에서 감정의 일이 얼마나 크고 중요한지 설명하지만, 이런 일상이 우리의 인격, 신념의 형성으로까지 이어진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책의 감상을 앞서 언급한 신경과학 이론과 연결 지어 정리하는 것은 비약이 아닐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너무나 많은 정보, 그중에서도 도덕·윤리 같은 가치가 감정에 대한 고려 없이 전달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그러니까 ‘내면화’가 어렵다는 말이다. 가령 소셜 미디어에서 상식적인 윤리조차 알지 못했던 이들에게 “모르면 외우라”라고 면박 주며 말하지만, 짐작컨대 이 말을 들은 이들은 외우기는커녕 도리어 외면하려고 기를 쓰고 노력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 듣는 이들의 입장에서 ‘외워야 하는 윤리’는 교조화된(감정이 섞이지 않은) 지식일 뿐인데, 그 지식을 모욕과 함께 주입받았다면, 그것은 내가 싫어하는 지식이 되어버릴 뿐이니까. 


한 가지 사례로 ‘정치적 올바름(PC)’을 들어보자. 나는 PC주의를 (속으로나마) 지지했고, 또 그 내용에 대해서는 지금도 매우 공감하는 편이다. 그리고 PC 진영의 소통 방식에 대해서도 지지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PC 진영에 대한 적개심은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했고, PC의 희망을 비웃듯 세계는 극우의 광풍 앞에 불타는 촛불처럼 보인다. 마침 얼마 전 읽었던 『집단 망상』에서 이와 관련한 대목을 읽었는데, “정체성 기반 양극화는 단순한 감정적 반감뿐 아니라 혐오와 반감 같은 신체적 반응까지 포함”하며, “우리의 정치적 성향과 호불호가 이성적인 것보다는 ‘본능적인’ 것에 훨씬 더 가깝다고 한다.”(『집단 망상』 p.314) 요즘의 갈등이 올바름을 관철하기 위한 정체성 공격 때문은 아니었을까? 나는 반드시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감정 연구가 그리는 인간

지금까지 나는 감정의 두 가지 속성에 대해 말했다. 하나는 감정이 태어난 이후에 구성된다는 것, 그리고 감정이 사람의 지각과 기억, 신념 형성에 크게 기여한다는 것. 아직 읽을 책이 아주 많이 남았지만, 이 두 가지 사실은 인간 이해의 열쇠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째, 자신이 믿는 특정 신념을 타인과 공유하고 싶다면, 전달 방법까지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윤리를 고민할 때, 우리는 무엇이 옳은 윤리인지 고민했을 뿐 그 전달 방법에 대해서는 크게 고민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앞서 언급한 PC가 대표적이지만, 꼭 PC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최근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극우화에서 작지 않은 위기를 느끼는 나는 이 작업이 그동안 우리가 짐작해왔던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기술’에 가까운 수학 지식조차 전달 방법에 따라 성취도 차이가 크게 나는 마당에 소셜 미디어를 숙주 삼아 퍼지는 극우 메시지를 보라. 우리 일자리를 빼앗고 문화를 침범하는 외국인 노동자 같은 구호는,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너무나 ‘직관적’이다. 


둘째, 최근 세계의 혼란을 인간 본성에 기인한 결과인 양 말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와중에, 본성론에 대한 가장 중요한 반박 논리라는 점에서 의미 있는 열쇠가 된다. 신경과학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반박이었고, 그래서 반드시 참고해야 할 과학의 성과라고 생각했다. 거기에 추가로, 깊어가는 혼란 속에서도 냉소를 거둘 수 있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이론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 덧붙임: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회색독자’

여전히 나는 내 글이 설득의 수단으로 쓰일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과학책을 읽고 떠오른 생각을 내 나름의 방법으로 인문학 영역으로까지 확장해보겠다며 새로운 시도를 해보았지만, 이제 두 학기를 마친 학부생이 시간과 공력을 낭비해가며 화학의 모든 것을 읊어대는 모습을 바라보는 기분도 든다.


그럼에도 나는 과학과 인문학을 맘대로 오가는 회색분자가 되어 보기로 했다. 과학과 인문학을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과학과 인문학 그 누구도 윤리와 같은, 가치를 입증하기 위한 그 어떤 시도도 ‘혼자’ 성공해낸 것 같지는 않아서다. 가령 21세기의 사반세기를 넘긴 지금까지도 적지 않은 인문학자들이 윤리를 현실 세계에서의 실체적 가치로 여기기보다는 윤리의 존재를 ‘논증’하는 데 몰두하는 것 같은데, 실체로서의 윤리 존재를 입증하는 방법으로 논증은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지만, 논증을 통해 그것의 실체를 증명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지금 이 주제를 다루기에는 이미 너무 긴 글을 써버렸으므로,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한다).


과학이라고 상황이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앞서 말했듯 인간의 지각, 감정, 신념은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되는데, 여기에서 환경은 대개 문화를 의미하더라. 앞서 잠깐 언급했던 문화-유전자 공진화론의 대표 주자 중 하나인 조지프 헨릭은 자신의 책 『호모 사피엔스』에서 문화를 “우리 모두가 성장하는 동안 주로 다른 사람에게서 배우는 방법으로 습득하는 관행, 기법, 발견법(휴리스틱), 도구, 동기, 가치, 믿음 따위로 이루어진 커다란 덩어리”로 정의한다. 그리고 이 영역은 전통적으로 인문·사회 분야에서 다뤄왔으며, 그 분야에서 누적된 결과물만 해도 한 사람이 평생을 쏟아부어도 다 읽을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하다. 이런 결과물을 모른 척하고 문화 연구를 하겠다는 건, 내 생각에 TV, 태블릿, 스마트폰 없이 드라마를 보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런 과학과 인문학 사이를 마음 끌리는 대로 오가는 ‘회색독자’(a.k.a 박쥐)가 되어보고 싶었고 이번 서평을 계기로 숙원처럼 남겨둔 도전을 마무리했다. 이 글에 얼마나 큰 정보값이 녹아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내 안에서 오랫동안 따로 놀던 과학과 인문학이 처음 조화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나름 의미가 없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므로 이 의미를 더욱 키워줄 다른 의견과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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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에는 사고 싶었던 책 여섯 권, 지금 아니면 데려올 수 없을 듯한 책 세 권을 책장에 들임. 



📚 7월에 들여온 책들




📘『AI 지도책』

요즘 관심사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리스트인데(특히 사고 싶었던 책들은 더더욱), 몇몇은 아마 다른 분들도 관심이 많으셨을 것 같음. 특히 AI 관련해서 할 말이 많아지는데, 아니, 해야 할 말을 많이 쌓아두어야 할 것 같다는 쪽에 가까운데, 그래서 『AI 지도책』은 꼭 읽어봐야 할 것 같음(아니, 나한테만 왜 이렇게 늦게 나타났을까 싶었던 책). 전에 『사고외주』의 서평을 쓰면서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았는데, AI 발전의 가장 큰 걸림돌이 전력이었고 AGI 수준에서는 국가의 연 단위 소비량에 육박할 것으로 전망했는데, 과연 AI의 혁신에 사회적 자원을 쏟아부어야 할 필요가 어디에 있으며, 그 사회적 결정을 위해 시민들이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음. 심지어 팔란티어는 러-우 전쟁 지원을 통해 전쟁 데이터를 AI에 쏟아붓고 있다고 하는데, 사람의 결정 없이 살상 가능한 AI의 출현을 지켜볼 것 같아 대단히 우려가 됨. 대부분 언론은 성능 이야기만 떠들고 있는데, 그렇기에 지금 더더욱 읽어야 할 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늦게 들인 것 같기도 하고…).


📘『차별하는 데이터』

얼핏 기술은 그 자체로 편향 없는 가치중립적 수단으로 여겨지고 있음. 가령 사회 통념에서 크게 빗겨선 판결이 보도될 때마다 판사의 편향을 문제삼으며 앞으로는 AI에게 재판을 맡겨야 한다는 이야기가 크게 들리는데, ‘기술=가치중립적’이란 전제가 깔려 있을 것. 하지만 문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 『박태웅의 AI 강의 2025』에서 소개한 네이버 뉴스 편집이 대표적인 사례인데, 편집 알고리듬을 만들기 위해 목적함수를 설정해야 하며 그 기준은 사람이 정해야 한다고 함. 입력하는 데이터의 편향성과 기술의 특성도 문제인데, 이게 바로 『차별하는 데이터』가 제기하는 문제. 가령 데이터 입력 시 인종, 성별 등 차별 요소를 제거하더라도 기계가 거주지, 소비 패턴 등 잠재된 패턴을 유추함으로써 차별로 이어진 사례가 있는데, 이는 알고리듬의 기본 공리인 상관관계와 동종선호에 기인한 것이라고 함. AI라는 기술이 편향 없는 판결을 내리게 하려면, 기술과 문화에 강렬하게 관여해야 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관여해야 할지 고민하기 위해 들여온 책.


➕ 내맘대로 독서리스트1️⃣: :  어둠의 AI 세계, 혹은 디스토피아를 다루는 책들.





























➕ 내맘대로 독서리스트 2️⃣: AI가 흉내내기 어려운 인간 지능 특성에 관한 책까지 추가해봄





























📕『창조적 사고의 놀라운 역사』

얼마 전 서평을 쓴 『사고외주』를 읽으면서 궁금해지는 것들을 따로 서치하던 와중에 AI와 관련해 반전에 가까운 정보 하나를 찾게 됨. 거의 모든 AI 모델들이 2026년 현재 시점에  문제가 주어진 테스트에서 인간 대비 70~80점 전후까지 점수를 올렸으나, 설명서(가이드)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직접 규칙을 알아내야 하는 시험에서는 인간 대비 0~0.4%만 해결했다는 것(기사 보러가기). 나는 전부터 ‘가설 설정’ 능력만은 AI가 인간을 쉽사리 앞서지 못할 거라고 짐작했는데(몇몇 지인에게는 직접 말하기도 했지만 기록이 없어서 너무나 아쉬움), 내 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라는 생각에 혼자 흐뭇해하고 있다. 『창조적 사고의 놀라운 역사』는 얼핏 특별한 인간의 창의성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이게 바로 설명서 없이 규칙을 알아내는 능력이라고 생각했고 결국 들여옴. 나중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이 능력은 인간이 감정, 욕구를 가진 존재이기에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AGI의 출현에 회의적인 것도 이런 이유 때문.


➕ 내맘대로 독서리스트: 인간의 지식, 인간다움, 호기심 에 관해 설명하는 책들







 









📗『편견 없는 뇌』

이 책은 홧김에(!) 지른 책인데, 직전에 읽은 『감정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뇌과학』에서 인용한 중요한 대목 때문임. 그 인용한 대목이란 남녀의 뇌는 (해부학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것이었는데, 그럼에도 특정 감정에 대한 반응이 성차를 보이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진 것. 짐작하기로는 문화에 밴 성 역할에 따른 차이가 아닐까 싶지만, 일단 『감정 뇌과학』에서는 가설을 가능성 수준에서 체크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말기에 이 책을 더 읽어보기로 함. 나는 뇌과학이 사람을 이해하는 데 작지 않은 도움을 줄 거란 심증을 굳혀가는 중인데, 바로 그 점에서 『감정 뇌과학』은 참 좋았던 책.


➕ 내맘대로 독서리스트: 뇌가 정보(기억, 감정 등)를 구성하는 방식과 구성한 이후의 사고에 대해 말하는 책들




























📙『자유와 평등』

존 롤스의 『정의론』에 대한 21세기적 재해석 정도로 소개되는 책. (정의라는 키워드는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날로 심각해지는 불평등에 기름을 유조선째로 부어버릴 듯한 기세로 AI가 발전하는 와중에,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으로서 나름의 비전을 가져야 할 것 같아 들여옴. 대니얼 챈들러라는 경제학자/정치철학자가 쓴 책이라고 하는데(처음 들어봄), 솔직히 『정의론』 한번 안 읽고 이 책을 읽는 게 맞나 싶지만, 한편으로는 그 책을 읽을 엄두가 나질 않음(보통의 벽돌책과는 확연히 다름. 책장을 펼치면 알게 됨).



➕ 내맘대로 독서리스트: 이 주제와 연관 있는 다른 책 추천 부탁드려요 🙇‍♂️

















📕『어머니 내게 오시네』

솔직히 (특히 X라는 이름의 트위터) 초반 물량 공세 외에는 나도 고른 이유를 딱히 설명하기가 어려움. 인도 여성 인권의 대모 격인 어머니로부터 학대에 가까운 대우를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낸 소설가 아룬다티 로이의 자전적 에세이라고 함. 나는 언젠가부터 인생의 아이러니에 굉장히 끌리기 시작했는데, 작가의 어머니가 보여준 아이러니는 그녀뿐 아니라 누구나 어떤 형태로든 가질 수밖에 없는 필연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그리고 타인의 아이러니를 껴안을 때, 우리는 결국 서로를 구원할 수 있을 거란 (다소 근거가 희박하지만, 왠지 확신해도 될 것 같은) 믿음이 생겼기 때문.


➕ 내맘대로 독서리스트: 옆의 두 권은 선물 받은 에세이인데, 올해 안에는 읽기로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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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일기』 / 『숨쉬는 과학』 / 『도시의 보이지 않는 99%』

특가 코너를 돌아다니면서 담아두었던 책 두 권, 저작권 종료를 앞두고 특가에 나왔다기에 냉큼 데려온 책 한 권. 요즘 내 관심사에 관한 책들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 호기심에서 기차 탈선 수준으로 벗어난 책이 아니었고 지금이 아니면 나중에 구하기 어려울 수 있을 것 같아(사려고 보관함에 담아뒀다가 절판되었을 때, 심지어 중고서점에도 없을 때 황망함이란) 여유 있을 때 냉큼 들여옴. 세 권 모두 몇 페이지를 읽어봤는데, 들여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머리 꼭대기까지 차오름.

















7월 책장 정리 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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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삼국지 - 군웅할거에서 통일전쟁까지 184~280
최진열 지음 / 미지북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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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연의』(이하 『삼국지』)는 아마도 재독을 제일 많이 한 책일 거다. 고등학교 1~2학년 두 해 동안 7~8번을 읽었고 스무 살을 넘긴 후에도 적어도 2~3번은 읽었을 텐데, 이만큼 읽고 보니 조운이 조조의 강남 정벌 때 유비의 아들인 아두(유선의 아명)를 품에 안고 적진을 누비다 우연히 얻은 청명검으로 목을 벤 적장이 하후은이었다는 디테일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고 편의점에서 신분증을 내어놓을 필요가 없을 때에도 『삼국지』는 내 기억 한 구석에 펼쳐놓은 자리를 뺄 기색이 없었다. 다만, 이때의 삼국지는 스펙터클보다는 미스터리에 가까웠는데, 이문열이 남긴 수많은 평론조차 놓친 팩트가 무수히 많다는 걸 알아차린 탓이다. 그렇다고 2800페이지가 넘는 『정사 삼국지』를 읽을 여력은 없어서 보낸 세월이 수십 년. 오랫동안 자외선과 비바람을 번갈아 맞은 탓에 닳을 대로 닳아 버린 삼국지 미스터리를 다시 파헤친 것은 『역사 삼국지』라는 책 덕분이었다. 전자책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한 나는 갑자기 그 시절의 열정이 솟아오르는 걸 느꼈고, 그 순간 대여해 다음 날 아침이 오거나 말거나 책을 새벽까지 읽었다. 그렇게 나는 ‘삼국지’의 세계로 다시 한번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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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제일 큰 수확은 ‘팩트체크’가 체계적으로 가능했다는 점이다. 그 어떤 기록에서도 찾을 수 없는 도원결의부터 시작해 조조의 여백사 살해, 동탁과 여포 사이를 이간질한 세기의 미녀 초선의 존재,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정말 좋아했던 전위와 허저의 낮은 존재감, 적벽대전에서 제갈량의 대활약 등등. 이 책에 정리된 ‘팩트 체크’를 일일이 정리하려면 끝이 없을 테니 여기에서 멈춘다. 1천 페이지 넘는 벽돌책을 읽는 내내,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꼈다. 『삼국지』만 읽어도 다른 오락이 필요 없던 그 시절 말이다.

 

이것만 해도 충분히 의미 있는 독서 경험이었는데, 책은 여기에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이 책은 『삼국지』가 비틀어놓은 사실관계를 바로잡는 것 이상의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역사를 처음 배울 때부터 시작해 지겨워하는 것조차 지겨워진 그 말,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었다.

 

이 책을 읽을 때만 해도 나는 『정사 삼국지』만으로 모든 ‘소설’을 바로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그렇지 않았다는 게 반전이었달까. 저자에 따르면 “진수의 『(정사) 삼국지』는 사실을 그대로 기록한 책이 아니어서 논문을 쓰기에 적합한 사료가 아니었다”는 것이다(p.9). 실제로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송나라 때 역사가인 배송지의 주석과 『후한서』, 『자치통감』 등을 번갈아 확인해야만 했다고 한다. 이상했다. ‘정사(正史)’라는 말을 내가 잘못 이해한 걸까? 미스터리 하나를 풀었더니 더 큰 미스터리가 날 기다리던 셈이다.

 

의문은 『정사 삼국지』 편찬 배경과 함께 스르륵 풀렸다. 정사를 집필한 진수의 목표는 서진(西晉)의 정통성 확보였고, 서진의 전신이었던 위, 촉, 오 가운데 위나라만을 정통으로 인정했으며, 정통성 확보에 방해되는 사실은 제외하고 띄울 만한 일은 만들어서 끼워넣었는데, 특히 사마의에 관한 서술이 그랬다. 이문열은 사마의의 수비를 뚫지 못한 제갈량을 두고 “지략이 부족했다”고 평가한 진수(『정사 삼국지』의 저자)의 서술을 그대로 인용하지만, 정작 다섯 차례 북벌 중 3차까지 제갈량과 대적한 것은 (소설에선 한끗 모자라 보이던) 조진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4~5차 북벌에서 사마의의 전적도 초라하기 짝이 없더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마의는 서진의 시조 격으로 『정사 삼국지』의 주인공이 되어야 했고, 그렇게 제갈량 필생의 라이벌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정리해보면 『정사 삼국지』는 사실을 충실히 기록했다기보다는 정통성을 국가로부터 공인받았다는 의미에서 정사(正史)로 불리는 게 타당해 보인다. 아주 조금 과장을 더해보면 정부가 홍보를 위해 운영하는 KTV 채널에 업로드된 영상 수준의 기록물이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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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수가 『정사 삼국지』를 쓰던 시절이나, 그로부터 2000년이 지나 내가 책스타그램에 올릴 서평을 쓰는 지금까지 역사에 대한 논쟁은 끊이질 않는 걸 보니, 이거 하나는 정말 잘 알겠다. 어떤 이들은 ‘정확한 팩트 복원’을 역사학의 유일한 목표인 것처럼 떠들지만, 결국 역사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었다는 것이다. 그 ‘팩트 신도’들조차 자신의 논거를 강화하기 위해 팩트를 선택적으로 꺼내들거나 인과를 곡예 수준으로 끼워 맞추는 이유도 이것 때문일 거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고 말했던 E.H.카 선생의 통찰력은 지금에 와서 보면 눈이 부셔서 쳐다보기 어려울 만큼 밝게 빛나는 것 같다.

 

그리고 하나 더. 나를 포함한 『삼국지』의 독자들에게 그 시기는 ‘영웅의 시대’였을 터. 하지만 『역사 삼국지』를 읽으면서 깨달은 진실은 중국의 역사에서 흔하디흔했던 분열과 전란의 시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는 거다. 별다른 문화적 성취를 찾아보기도 어려운데, 서진의 건국을 주도한 사마 씨 왕조의 정통성과 비전 부재, 여기에 무능까지 더해지면서 빠져 버린 수렁의 시간이었달까. 다시 말해 이 시대는 권력 투쟁의 장이었으며 영웅으로 칭송받던 이들은 그저 그런 기회주의자였을뿐. 그 시기에 감소한 인구만 헤아려 봐도 그 시대를 도저히 곱게 봐줄 수가 없다.

 

이런 시대를 붙들고 현자 놀이를 할 일은 (이전에도 없었지만)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다른 삼국지 마니아들도 꼭 생각해보셔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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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 민심을 얻는 왕도정치의 고전 ㅣ 명역고전 시리즈
맹자 지음, 김원중 옮김 / 휴머니스트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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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을 읽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유교에 대한 관심 자체가 없었고, 여기에서 배울 것도 없다고 생각한 탓이다(사실 고전 자체를 잘 읽지 않는 편이다). 적어도 ‘책 추천’에 있어서만큼은 절대적으로 믿고 보는 유시민 작가가 무려 『청춘의 독서』에서 『맹자』를 ‘자신의 인생 책’으로 소개하며 긴 감상을 썼는데도 ‘뭐 그런가 보네’ 싶었으니. 지금 이 순간에도 출간될 숨은 책들을 읽을 시간이 부족한 마당에, 2,300년 전 성현의 이야기를 읽고 있을 시간은 더욱 없었다.


그러다 동양철학(주역이 아닙니다)의 매력에 흠뻑 빠지신 어머니께서 『맹자』 일독을 권하셨고, 몇 번을 거절하다가 끝내 펼쳐보게 됐다. 그리고 초반에는 괜히 읽었다는 생각까지 들었는데, “백성을 배부르게”, “군주는 인자하게” 같은, 좋은 말 대잔치로만 읽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괜히 ‘아성(亞聖)’으로 추앙받았던 게 아니었는지, 책장을 넘길수록 내 편견도 조금씩 누그러지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 같지가 않아서였다. 통치의 정당성,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한 실천을 구체적으로 나열한 모습에서 철학자나 사상가보다는 현실 지식인의 면모를 엿보았던 것이다. 다만, 책의 구성이 체계적이지는 않아서 해설서의 도움이 필요했고 그렇게 『맹자 교양강의』라는 책을 함께 펼쳤고, 해설서와 함께 『맹자』를 읽었으며 떠오른 몇 가지 생각들을 정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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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자, ‘축의 시대’의 당당한 주인공


두 책을 통해 거둔 가장 큰 수확은 공자가 창시하고 맹자가 확장한 유교 사상과 함께 동북아 지역 사람들이 ‘타인과의 공존’을 체계적으로 고민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맹자의 경우, 인간이라면 지녀야 할 마음, 나라를 바로 세우는 방법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는데, 현대적 관점에서도 타당한 대목이 많았다는 게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동서양 철학자들의 활동 시기가 큰 차이 없이 겹치는 것도 꽤나 흥미로웠다. 독일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는 동서양의 위대한 지성이 활동했던 약 기원전 900년~서기 200년 사이의 기간을 ‘축의 시대’로 지칭하는데, 종교적, 철학적 사고의 광범위한 전환이 이루어진 ‘위대한 시기’라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이다. 실증적 증거가 충분히 뒷받침되지 않은 가설 수준의 개념이지만, 이런 현상이 어쩌면 ‘호모 사피엔스’, 즉 ‘지혜로운 사람’이 따르게 될 역사적 경로 혹은 숙명은 아니었을지 궁금해진다. 혹시 이 가설이 타당하다면, 신경과학이나 심리학이 사상사에 개입할 여지가 발생하지 않을까? 딱히 정보값있는 의문은 아니지만 궁금해지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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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상공론의 유교? 이게 다 오해입니다!


책이 내게 남긴 또 다른 메시지는 우리가 유교를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조선의 망국이나 오랜 권위주의 문화 때문에 많은 이들이 유교를 ‘탁상공론’이나 ‘권위주의의 뿌리’ 정도로 여기고 있는데, 책을 읽으며 읽은 맹자의 말 가운데 이런 오해와 교집합을 이루는 그 어떤 언급도 찾을 수 없었다. 


마침 『서양철학사』를 함께 읽은 덕분에 두 철학을 비교할 기회가 있었는데, 두 사상을 비교해 보면 이런 오해는 더욱 근거를 잃게 된다. 두 철학을 비교해 보자. 그리스 철학의 목표는 불완전한 현실을 넘어선 ‘완전함’이었고, 그 완전함을 형이상학✳️의 형태로 발전시켰다. 그렇게 완전함이란 이상을 꿈꾸며 탄생한 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 개념은 각각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 등의 철학자에 의해 ‘유일신’으로 다시 탄생했고, 지금까지도 서양을 지배하는 주류 사상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유럽은 천년 넘는 세월을 신학 중심의 질서 가운데 유지되어 왔다.


반면 유교의 목표는 어땠을까? 맹자에게는 당대의 혼란을 바로잡을 ‘현실의 질서’가 필요했고, 그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을 체계화한 결과물이 유교였다. 『맹자』에서 인(仁)이나 의(義)와 같은 구체적인 윤리 개념을 발전시켰거나, 체계적인 토지 분배법, “백성에게 일정한 생업(항산)이 없으면, 굳건한 도덕심(항심)을 유지하기 어렵다(무항산 무항심, 無恒産 無恒心 – 양혜왕 상)” 같은 발언 등을 감안하면, 유교가 ‘현실의 사상’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유교가 고도로 사변화된 것은 송대 성리학 이후였다).


관련해서 시대 배경을 조금 더 살펴보자. 공자는 영토확장을 위한 전쟁이 끊이지 않는 춘추시대를, 맹자는 그보다 더 혼란스러운 전국시대를 살아갔다. 이 시기의 군주들은 더 큰 힘이 필요했고, 자연스럽게 착취가 이어졌다. 이 혼란을 바로잡기 위한 철학이 ‘탁상공론’이었다면, 오늘날 평화에 대한 모든 논의라고 다를 수 있을까?


조선시대 최고의 임금으로 손꼽히는 세종이나 정조의 정치 이상이 ‘요순시대’였던 걸 감안하면, 어떤 면에서 유교는 긍정적 유산을 남겼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의 남다른 역량과 열정에도 영향이 있었지만, 두 사람은 ‘민본’을 잊지 않았다는 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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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교와 망국, 그리고 권위주의


길게 글을 쓰는 김에 ‘조선의 망국’과 ‘권위주의’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자. 먼저 조선의 망국 이야기부터.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대런 애쓰모글루에 따르면 “권력집단이 종종 경제 발전과 번영의 원동력에 반대한다”고 말한다. 번영에 따르는 창조적 파괴로 인해 자”경제적 특혜가 사라질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p.133). 구한말 조선이라고 다를까? 당시 지배계급은 번영보다는 권력 유지에 몰두했고, 가뜩이나 열강 사이에서 시달리던 조선은 번영은 꿈조차 꿀 수도 없었다. 당시 지배계급의 행태는 맹자님 말씀과는 조선과 남아프리카공화국만큼이나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권위주의는 어떨까? 최근 학계에서는 권위주의의 기원으로 유교보다는 일제강점기 시절에 유입된 ‘군사문화’를 지적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권위주의적 통치 문화가 군사 독재 정권으로 이어지면서 권위주의 또한 자리를 잡게 됐다는 것이다(「권위주의와 학연주의의 제도적 고착화 과정에 관한 연구」, 김윤호, 2020 참고). 물론 유교의 계급주의 세계관에서 권위주의를 찾을 수 있겠지만, 역사학자 심용환은 “성리학의 나라였던 조선의 경우 다른 나라에 비해 계급제도가 느슨한 편이었으며, 하위 계급에 대한 지배력이 절대적이지도 않았다”고 이야기한다(https://www.youtube.com/watch?v=eoh7XDsVDRE&t=4777s 참고). 한 예로 정조 시대의 실학자 홍대용의 경우, 10살 연하의 선비와도 말을 놓으며 허물 없이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그는 당대의 주목받는 성리학자이기도 했다. 


여기까지 검토했음에도 유교가 망국과 권위주의의 기원으로 여긴다면, 맹자님도  꽤나 억울하지 않으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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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맹자와의 대화가 필요한 이유


유교에 대한 관심이 소금 한 꼬집만큼도 없었던 내가 책 두 권 읽고 열혈 유교 신도마냥 서평을 남기는 게 썩 못미덥겠지만, 내 소신(?)이 가벼워서 이러는 건 절대 아니고…. 


지금 현재 우리 시대상황을 돌아보자. 팔레스타인에서는 아우슈비츠를 연상시키는 학살이 일어나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이제 4년이 되어간다. 선도적 민주주의 국가였던 미국에서는 ‘가짜 미국인’을 상대로 자경단이 무력을 행사한다. 정치적 갈등 때문에 반으로 나뉜 한국인들은 서로에 대한 적개심을 키워만 간다. 지금의 시대가 공자, 맹자가 살았던 춘추전국시대가 다르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나는 자신 있게 ‘다르다’고 답할 수 없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윤리’라고 생각했고, 밀쳐두기만 했던 유교를 다시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혼돈의 시대를 끝내고 싶었던 맹자의 고민이 우리에게 의미 있는 단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고루하다는 이유로 유교를 외면한다면, 문제를 해결할 중요한 열쇠 하나를 잃어버리는 건 아닐까? 물론 맹자의 유산이 완벽한 해법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단점은 걷어내고 좋은 점을 취한다면, 중요한 해법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동료 시민들이 편견을 거두고 맹자와 대화를 나누길 바라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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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자교양강의』의 저자가 역사상 유교 국가가 존재한 적 없는 것으로 주장한 대목에서 나는 크게 실망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변방에 불과했을지 몰라도, 조선은 그 어떤 중국의 왕조보다 투철한 성리학 국가였으니까.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말이다.


 


✳️ 형이상학: 존재의 보편적 원리와 형식에 대한 철학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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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감각 - 읽지 않는 시대, 우리는 어떻게 책을 사랑하는가
정도성 지음 / 투래빗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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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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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적독 생활』 서평에도 썼지만, 읽은 책이 쌓이면 책짐이 되고, 책짐이 커지면서 읽기의 바깥에서 즐거움을 느끼게 됐다. 나는 여전히 ‘읽기’의 비중이 압도적이지만, 책이 주는 소소한 즐거움 덕분에 이제는 ‘소울메이트’가 되어가는 기분이 들 정도로. 만만치 않은 일정에도 『읽는 감각』 서평단 신청을 했던 것도 그래서였는데, ‘읽지 않는 시대, 우리는 어떻게 책을 사랑하는가’라는 부제를 보면서 다른 이들이 책을 사랑하는 방식이 몹시 궁금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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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읽는 감각』을 읽었는데, 아, 웬걸, 솔직히 조금 당황했다. 나와 저자의 책 사랑 방식이 점점 멀어지는 좌우파 정치 세력의 거리보다 더 먼 느낌을 받은 탓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러나 저러나 결국 ‘읽기’ 없는 책을 상상할 수 없고, 앞서 말한 소소한 즐거움은 읽기란 큰 줄기에서 뻗어나온 잔가지 정도에 불과했는데, 『읽는 감각』이 책을 다루는 방식은 그 자체로 독립된 소품에 가까웠다. ‘좋고 싫음’이 아닌 ‘낯설음’의 문제였지만, 어쨌든 당황한 건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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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의미 없는 독서였다는 건 아니니 오해는 말아주시길. 어렴풋하게만 알았던 읽기 바깥 세상을 둘러본 것만으로 충분히 의미 있었으니까. 정보를 담은 매체로서의 책이 아닌, 물건으로서의 책에서 느낄 수 있는 거의 모든 감각을 망라한 듯한 『읽는 감각』은 지구 탐험 안내서였다. 내가 이 책을 통해 만난 신세계란 이런 것이다. 가령 저자에게 서점, 특히 동네서점은 ‘체험의 공간’이다. “독자가 이 책을 어디서 어떻게 누구와 함께 읽기를 바라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공간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허허, 서점이 책을 사는 공간이 아니었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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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구현한 공간으로 세 개의 서점을 소개한다. 제일 먼저 소개된 일본 다이칸야마 츠타야 서점의 답은 ‘컨시어지’다. 이곳은 컨시어지가 먼저 깊이 읽고 책을 엄선해 독자에게 추천한다고 한다. 이런 경험은 독자에게 뜻밖의 책을 만날 기회인 동시에 함께 책을 찾는 경험을 안겨주게 된다고. 한편, 서울 연남동의 서점 리댁션(Readaction)은 ‘Read’와 ‘Action’을 붙여 만든 이름이라고 한다. “Lead Life, Read Action”, 즉 “삶을 리드하기 위해 (나 또는 책을) 읽고 실행하자”라는 슬로건 아래, 읽은 것을 실천하기 위한 (워크숍에 가까운) 독서모임 등을 정기적으로 운영한다. 한편, 저자가 직접 운영했던 서점 ‘서사’의 이야기도 있다.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나만의 서사를 찾아가는 공간”으로 정의한 저자는 공간 곳곳에 오래 머물 수 있는 디테일(의자와 테이블 높이 등)을 심어두었다. 지금은 여러 종류의 독서 모임이 진행되면서, 책으로 연결되는 체험을 제공한다고 한다(다른 건 몰라도, ‘연결 경험’은 정말 좋은 것 같다. 나도 책 수다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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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런 변화를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기는 했다. 가령 소셜 미디어의 책 계정을 보면, 저자가 언급한 종이, 무게, 디자인 등 책을 일상의 감각으로 들여오는 모습이 확연히 늘어난 게 체감될 정도다. 리커버 에디션을 출시하는 출판사, 이제는 없으면 아쉬울 온라인 서점의 굿즈 코너 등을 볼 때, 책은 이제 생산-유통-소비 모든 단계에서 매체인 동시에 소품이 되어가고 있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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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전 서평에서 독서 경험이라는 말을 자주 썼는데, 그 경험이란 책의 메시지를 따라가며 저자와 대화하는, 텍스트에 한정된 경험이었다. 책을 읽는 이유도 성장보다는 세계 탐구에 가까운 데다, 몰랐던 걸 알게 되었을 때 도파민이 뇌를 적시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경험이 다시 책을 읽게 하는 순환고리가 모 스포츠협회의 카르텔만큼이나 단단하다 보니, 『읽는 감각』이 펼쳐놓은 새로운 세계에 발을 담글 가능성이 그리 크진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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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이런 변화가 불만이냐면, 딱히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독서율은 하루가 다르게 낮아지는 와중에, 책 외에도 우리가 소비하는 거의 모든 제품이 감각 경험을 제공하는 시대에, 독자 나아가 출판사들이 변하는 걸 탓해봐야 변화를 거부하다 단두대에 오른 ‘왕당파’밖에 더 되겠나. 도리어 새로운 독자 덕분에 지금까지 좋은 책이 계속 출간되고 있으니, 그분들께 감사해하면서 내 방식대로 책을 즐기면 될 일이겠지. 아니, 책을 다르게 감각해주시는 분들이 더 늘어나서 출판 시장이 “단군 이래 최초로 전년 대비 성장 기록!” 이런 뉴스를 듣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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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의 바깥에서 책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분들이라면 『읽는 감각』은 내가 『적독 생활』에서 느꼈던 것과 흡사한 재미를 느끼실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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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아! 그러고 보니 『거의 모든 것의 역사 2.0』과 『유혹하는 글쓰기』 개정판은 사고 싶긴 했다. 구시대의 유물도 새 시대의 빛을 피할 수는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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