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의 미, 칠월의 솔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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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내 얘기를 잘 들어주니 고맙고, 마지막으로 잔소리를 한 마디하자면, 어쩌다 이런 구석까지 찾아왔대도 그게 둘이서 걸어온 길이라면 절대로 헛된 시간일 수 없는 것이라오."-28쪽

"그게 그렇더라구. 어릴 때만 해도 인생이란 나만의 것만 남을 때까지 시간을 체로 거르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서른이 되고 보니까 그게 아닌 것 같더라. 막상 서른이 되고 보니 남는 게 하나도 없어. 다 남의 것이야. 내 건 하나도 없어."-29~30쪽

"이 책에 이렇게 쓰여 있어. '이 시점에 이르러 부모는 대개 아이보다 하루라도 더 살 수 있기를 소망한다.' 아이가 자기보다 하루라도 먼저 죽기를 애타게 바라는 부모가 이 세상에 있으리라고는 한 번도 상상한 일이 없었어. 그런데 이제 내가 그런 아빠가 됐네. 우리에게 남은 희망이라고는 이게 전부네."
그리고 아빠는 비명을 지르듯 짧게 울었다.-44쪽

하지만 태호는 엄마의 말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말들은 참 외롭고 슬프다고 해야만 할 텐데, 그렇다면 그 말들을 하는 사람도 참 외롭고 슬퍼야만 할 텐데, 그 말들도 엄마도 외롭거나 슬프지 않았다.-45쪽

하지만 그런 귀가 있어 깊은 밤 우리가 저마다 혼자서 중얼거리는 말들은 외롭지도 슬프지도 않은 거야.-52쪽

언제부터인가 휘청휘청 넘어질 듯 흔들려야만 다른 사람의 손을 잡게 됐는데, 그래서인지 이제는 누군가 다른 사람 손만 잡아도 휘청휘청 넘어질 듯 어지러워지더라. 내 손을 잡고 걸어가던 엄마가 그런 말씀을 했다.-109~110쪽

그건 단순한 기상현상이 아니라 부유하는 상실의 덩어리와 같았다고 세진은 회상했다. 술집에서 친구가 들려준 위로의 말들은 헛되이 사라졌는데, 안개 속을 걸어가는 일만은 무엇보다 위안이 됐다고. 대기 속에서 순환하는 바람들과 물방울들과 따뜻하고 차가운 공기들이 그를 감싸고 '괜찮아, 다 괜찮아' 속삭이는 느낌이었다고.-111쪽

그 밤의 광경은 여전히 생생하다. 자정 너머 스멀스멀 기어나온 안개에 가려 흐릿해지던 반달이며 드문드문 창문에 불을 밝힌 아파트 건물의 육중한 몸피 같은 것들이.-133쪽

그리고 49일이 지난 뒤, 그 공원으로는 봄이 찾아왔다. 이렇게 말하면 안 되겠지만, 봄의 공원은 엄마가 세상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말하던 그 겨울의 풍경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예뻤다.-145쪽

삶을 이해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눈 귀 코 입만으로는 부족해요. 온몸을 모두 사용해야 합니다. 때로는 발이 어떤 상황을 더 잘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163쪽

나는 어이가 없어서, 하도 말이 안 되는 일이라서, 그 미성숙과 순진과 동심을 견딜 수가 없어서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197쪽

때로 우리가 누구인지 온전하게 말해주는 것은 각자 꾸게 되는 그 꿈속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저마다 하나씩 가진 꿈들. 그러나 꿈이라고 좋은 것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가 비몽사몽간에 보게 되는 그 코끼리처럼.-306쪽

어쩌면 모든 사람들의 내부에는 그의 코끼리와 같은 것들이 하나씩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혼자 산책하는 일을 두려워하는 것인지도 몰랐다.-3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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