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록흔.재련 5 - 개정증보판
한수영 지음 / 마루&마야 / 2007년 8월
구판절판


"숲과 비듬해지면 새 또한 자연 깃들 터."
"폐하께서 놓치신 새는 어찌됐습니까?"
"얼마 전에 찾았다."
"그래서, 숲이 되셨습니까?"
"아니, 새장 곁에서 맴돌기에 잡아채 버렸지."
선문답이라 운환은 두 벗을 이리저리 번갈아 보았다. 반면에 진과와 하신은 다른 속이 있어 그저 웃음빛이었다.
"고운 새로군요"
"그렇더군."-42쪽

서로를 위해 존재하니, 사랑하고 은애함은 뉘의 희생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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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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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항시 함께하자."
나머지 마흔아홉 단은 함께 올랐다. 평생을 사랑하고 의지가 되고픈, 그 마음이 손만큼 단단히 얽혔다. 바람에 둘의 옷자락이 함께 섭슬렸다.-69~70쪽

"얼굴은 보고 가야겠기에 들렀는데, 너 이런 양을 보니 바람이라도 쐬어 주지 않으면 병이 날 것 같다. 그렇지?"
"……."
"대신 약조해라."
벤 곳이 아린 건지, 가슴이 아린 건지, 호독호독 뛰는 맥이 어디에 놓였는지…… 록흔은 알지 못했다. 그녀는 일렁이는 눈을 높이 들었다. 작금, 심장에서 머리까지 우둔거리는 듯했다.
"말 그대로 따라가는 거다. 나서지도 말고, 다쳐서도 안 되고, 내 곁에만 있어."
"예……."
채 못한 말이 많았다. 그러나 록흔은 고갯짓으로 대신했다. 커다랗고 커다래 쉬이 터지지 않으므로.
"좋은가?"
혀 짧아 말 서툰 아이처럼 록흔은 고개만 끄덕였다. 그에 가랑가랑 걸린 눈물이 똑 떨어졌다.
"잘못 이식된 꽃은 말라죽기 마련, 허나 부러 모르는 척했다."
록흔의 손가락에서 지환은 주톳빛으로 함치르르했다.
"용감하고 정의로운 꽃, 너였는데."-227쪽

세상에 온갖 악행을 다 저지르고 아무렇지도 않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홍은처럼 제 살 깎아대며 아파하는 이도 있었다.-232쪽

"모수랑, 금방 불어 국숫발이랍니다."
"예, 폐하."
록흔이 맑지게 하는 말에 모라악은 황망하게 젓가락을 들었다. 가륜은 저러한 아내가 어여뻤다. 사람 배려할 줄 알고, 어디든 잘 섞여 동화되니……. 고움은 내면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276쪽

"어미란 봄이라고 했던가?"
일찍이 황룡의 대문장가 우순이 읊었던 듯, 가륜은 떠오르는 대로 록흔의 귓전에 속삭였다.
"항시 다스하여 훈김 가득하니, 애움 틔우는 봄이어라. 새끼가 곱든 밉든 현명하든 어리석든, 가림 없이 고루 품노니……. 록흔, 너와 같았을 거다."-319쪽

"태어나면 아들이든 딸이든."
"예, 폐하."
"율(燏)이라 짓자."
"가율……, 빛날 ‘율’자로군요."
"너처럼도 나처럼도 어린 시절 보내지 않도록."
그런즉슨 밝은 이름 주련다.-349쪽

"우는 것도 해본 사람이 할 수 있는 건가 보다."
눈은 항시 뜨거운데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독하게 강말라 뻑뻑하기만 했다. 가륜은 술잔을 갸울었다. 차라리 곯아떨어지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그것 또한 쉽잖았다.
"무진, 자신에게 정나미가 떨어지는 기분을 아는가?"
"예, 폐하. 끔찍하지요."
무진이 대답하매, 그 녹안이 짙었다.
"무뎌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요. 세월이 약이란 말, 늙은이들 헛소리는 아닐 겁니다."
진과가 서글프게 한 마디 보탰다. 그리고 빈 잔에 다시 술을 채워 넣었다.
"평생을 함께할 정인을 만나는 건 아무래도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폐하, 술 한 잔에 털고 술 두 잔에 잊고……. 그러다 보면 세상사 길지 않을 겁니다."
"길지 않다라, 좋은 말이로군."
가륜이 쓰게 웃으며 하는 말에 무진은 가슴이 무너졌다.
차륵.
탁.
술잔이 갸울어 밤은 이울었다. 누각 위의 인영은 시종일관 꼿꼿하여 치우침이 없었다. 꽃바람이 그 곁으로 스쳐 지났다. 달금한 화향 새로 침묵이 파르랗게 갈앉았다.-449쪽

"무진."
"예, 폐하. 말씀……."
"이놈의 심장, 떼다 버렸으면 좋겠다. 거추장스러워."-503쪽

"아앙."
율이 손을 바동대며 뻗었다. 가륜이 감싸 쥐니 아기 역시 제법 세게 그러잡았다.
"록흔, 봄이 늘었다."
"폐하……."
수국이 바람타고 휘늘어져, 화향이 그윽이 퍼졌다. 자운(紫雲)이 보드레하니 연빛 눈이 더 옅게 바래고, 검남빛 눈은 더 짙게 갈앉았다.
-561쪽

하늘에 별은 많지만 나처럼 생긴 애는 하나 없어요.
아기 달님은 너무나 외로워서 밤마다 울었다는데
별도 구름도 모른 체하고 밤새도 그냥 지나갔대요.

어둔 하늘에 혼자 떠 있으면 엄마가 보고 싶어요.
아기 달님은 부연 얼굴로 먼산바라기만 했다는데
산도 바다도 모른 체하고 생쥐도 그냥 지나갔대요.

별은 찰랑찰랑 구름은 몽실몽실 밤새는 부우부우
울지 않고 잘 견디어 내면 어른 달님이 된다는데
바람은 차고 구름은 짙어서 그냥 무섭기만 했대요.

칠흑처럼 어두운 밤에도 빗물 돋아 흐린 밤에도
엄마 달님 그리면서 입술 꾸욱 물고 참았다는데
산도 들도 뵈지 않고 논도 밭도 아슴아슴했대요.

초하룻달 아기는 눈물 삼켜 섬섬초월(纖纖初月)로
초승달 아기는 무서움 참아 반달음에 상현이 되고
반달 아기는 토실토실 실히 부풀어 환한 보름이니

별 총총한 밤하늘에 저처럼 생긴 애 하나 없어도
이울고 이울어 사위고 사위어 가늘게 여윌지라도
무섬일랑 그예 버리고 고독일랑 그예 이겼다지요.

갈고리달 그믐달이 되고 깜장달 합삭이 될지라도
여위어도 다시 살 오르고 살 올라도 다시 여위니
우리 아기도 아기 달님 닮아 어여삐 자랄 테지요.-6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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