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드걸 미미양의 모험
오현종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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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스파이, 코드 네임 007, 제임스 본드의 수많은 본드 걸은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궁금증에서 시작한다.

본드 걸은 하나의 상징이다. 그녀는 아름답고 섹시하며, 무엇보다 남자를 돋보이게 해 주는 인물이다. 또한, 하나의 에피소드로 수명이 끝나므로, 현실적이지 않고 일회적이기 때문에, 얽매지이 않고 연애(섹스)만 하고 싶은 남자들에겐 더할나위 없는 최고의 애인이다. 다시 말해 그녀는, 남성이 원하는 여성의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 그녀의 역할은, 본드 걸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남자의 매력을 돋보이게 하는데 있다.

그렇게 수없이 뒤바뀌는 본드 걸은, 제임스 본드가 다른 본드 걸 곁으로 떠났을 때 어떻게 되었을까.

소설속의 본드 걸 미미는, 자신이 일회용이고 더 이상 제임스 본드를 붙잡아 둘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한다. 무엇보다 제임스 본드의 "난 본드, 제임스 본드, 스파이야. 당신은 날 몰라 (p. 46)" 라는 말에 모욕감을 느낀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직접 스파이가 되기로 결심한다. 

미미라고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본드에게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을 쏟아부었던 건 아니다. 그녀는, 다른 모든 여자들이 사랑하는, 그리고 심지어는 남자들도 질투할 정도의 능력을 가진 남자, 부유하고 권력의 핵심에 닿아있는 남자를 획득했다는 사실에 기뻐한다. 결혼 시장에서 1등 신랑감으로 꼽힐 남자를 낚은 덕에 편하면서도 매력적인 생활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은, 그 동안 힘들게 모은 월급을 여행에 모두 쏟아부은 것도 본드를 만났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괜찮은 투자였다는 위안을 갖다준다. 

하지만 본드가 미미를 배신하고 다른 본드 걸을 만나자 미미는 자신이 꿈꾸었던 유한부인으로서의 삶이 박살났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배신감과 절망에 빠진 미미를 더욱 자극하는 것은, 본드가 배신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모르는 그의 삶이다. 남자들의 삶, 남자들의 세계, 남자들이 권력. 그것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그들은 수많은 본드 걸들을 양산하고 버리고 휘두르는가. 미미는 그 무한한 힘을 얻기 위해 남자들의 세계에 직접 뛰어든다. 

희망과 설렘, 동경을 안고 뛰어든 스파이의 세계. 하지만 그것은 미미의 예상과는 달리 미미 언니가 운영하는 고깃집처럼 누추하고 현실의 때가 묻어 있다. 어떤 이는 편하게 노후가 보장되는 공무원 생활을 위해 뛰어들었고, 어떤 이는 자신이 맡은 부서의 일이 자신의 꿈과 맞닿아 있다고 믿고 들어왔지만 자아실현은 고사하고 하루하루 주어지는 업무를 처리하는 것도 힘들다. 스파이의 세계 밖에서는 마냥 매력적이었던 제임스 본드도, 이곳에서는 상사의 명령에 이리저리 시달리는 고달픈 샐러리맨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이곳은 코드 네임의 세계이다. 미미는, 미미라는 이름을 버리고 코드 네임 013, 또는 작전에 주어진 이름인 오란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자신의 과거-사생활(언니, 형부, 친구 등)과 결별할 것을 강요받는다. 사(私)는 없고 공(公)만 있는 세계. 또는 사와 공이 어지럽게 뒤얽힌 세계. 모든 인간관계와 감정이 업무로만 이해되고, 때에 따라선 누구든 배신해야 하고, 그래서 누가 자신을 배신할 지 몰라 모두를 의심하며 지내야 하는 세계. 과정은 무시되고 결과만 보는, 남자들의 세계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세계와 너무나도 이질적인 이 곳에서, 미미는 미아가 된 듯한 어지럼증을 느낀다. 이곳에는 미미가 원했던 권력은 없었고, 권력의 이미지만 여기저기 흔적을 남기고 다녔다. 

소설에서 미미는 몇번이나 되풀이하며 "나는 여자가 아니라 훌륭한 스파이랍니다. 따라서 여자가 흔히 저지르는 감정 상의 실수를 범하진 않아요." 라고 강조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문제를 풀어나가는 미미의 방식은 대단히 여성적이다.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왜, 어떻게 이 자리에 있게 됐는지 혼란에 빠진 미미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적국의 스파이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쭉 들려준다. 미미는 "검은 방에 앉아 있는 적국의 플라이에게서 내 얼굴을 보았고, 그녀가 나의 잃어버린 쌍둥이, 짝패같다는 생각(p.186)을 하며, 그녀와의 공유점을 찾아가고, 적국의 스파이 역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며 교감을 형성한다. 이렇게 얻어낸 정보로 미미는 내부의 배신자가 누구인지 알아내지만, 그것을 처리하는 방식 역시 지극히 여성적이다. 미미는 그것을 상부에 알려 공로를 세우는 대신, 자신만의 비밀로 간직한다. 차가운 조직사회에서, 애정(사적인 감정)을 겉으로 드러낼 수 없었고, 질투까지 섞이면서 왜곡됐던 남자들의 애증은 미미 안에서 정화된다. 그녀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여자와 여자 사이의, 아버지와 딸 사이의 감정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내보내는 것이다. 

남자들의 세계를 여자들의 감성으로 살아나가는 것, 그것이 미미가 터득한 삶의 방식이다. 그래서 그녀는 여전히 제임스 본드를 사랑한다. 본드 걸로 만났을 때는 평생 뜯어먹고 살 수 있을 남편감으로 사랑했다면, 그래서 그의 남성적이고 마초적인 매력을 사랑했다면, 스파이가 된 지금은 아직 너무 어리고 여리고 작은 존재에 대한 연민으로 사랑한다. 그녀가 직접 들어가서 본 남자들의 세계는, 껍데기만 화려하고 속은 텅 빈, 발렌타인 데이 초콜렛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마지막 대사, "난 본드걸 미미. 013. 스파이야. 당신은 날 몰라."(p.208)은, 앞에서 제임스 본드가 했던 말과는 다른 울림을 준다.

너무나도 발랄한 제목과 표지 때문에 기대치가 너무 낮았던 탓인지, 오히려 재미있게 읽었다. 소설 내용은, 성정치학에 대한 이론으로 뒤덮힐 여지가 충분하지만, 오현종은 시종일관 캐릭터를 유지하고 그들의 스토리를 이어감으로써 그런 위험을 피해간다. (최근에는, 사회과학 서적을 읽으면 되지 이걸 왜 읽어 - 라는 소리가 나오게끔, 자신들의 지적 허영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쓴 게 아닌가 의심갈 정도로 이야기는 없고 이론만 가득한 소설들이 너무 많다. 농담이 아니고 그럴려면 차라리 사회과학 서적을 쓰시라고. 계몽하니? ) 다만 이야기가 너무 단순하고 허를 찌르는 깊이가 부족한데다, 뒷부분에선 급하게 이야기를 마무리한 흔적이 다소 아쉬움을 남긴다. 하지만 이게 겨우 두 번째 장편소설인 점을 감안한다면, 담백하고 세심한 캐릭터를 만들어낼 줄 아는 이 힘으로 새로운 이야기꾼이 태어나길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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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優勝 열패劣敗의 신화 - 사회진화론과 한국 민족주의 담론의 역사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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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린시절의 기억 한 자락이다. 내가 프랑스란 나라에 대해 가졌던 감정은 이중적이고 모순적이었다. 문제는, 내가 모순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내가 가장 좋아한 나라는 프랑스였다. 이유는 프랑스 혁명때문이었다. 화려한 궁중과 아름다운 귀족들, 한 편의 영화같은 사랑과 비극적인 운명. 그리고 단어만으로도 설레이는 자유와 평등, 박애의 기치를 높이 들고 봉기한 민중들. 그리고 자유와 평등을 쟁취하기 위해 붉은 피를 흩뿌려야 했던 그들의 의기. 하지만 프랑스 혁명이 무엇보다 낭만적으로, 그리고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혁명이 성공했다는 점일 게다. 유럽 국가 중에서(잘못된 상식으로는 세계적으로) 최초로 왕정을 뒤엎고 현대 민주주의 기초를 자력으로 이룬 나라, 그것도 모자라 자유, 평등, 박애라는 진리를 전 세계에 전파한 나라. 반대로 내 미움을 산 나라는 영국이었다. 역시 이유는 단 하나, 내가 좋아하는 프랑스와 앙숙이었기 때문이다. 이 놈의 영국이란 나라는 어쩌면 그렇게 프랑스와 맞붙었을 때마다 족족 이겼는지. 나는 언니들의 세계부도에서 영국와 프랑스의 식민지 수를 비교하면서 남몰래 가슴아파하곤 했었다.


자유와 평등, 박애의 나라이기 때문에 좋아했던 프랑스가, 식민지를 영국보다 적게 거느린 사실에 대해 슬퍼하다니?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도 않은 일이지만 그때 내 감정에는 아무런 거짓도 거리낌도 없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아무런 모순도 느끼지 못했던 내 감정과 사고방식, 정말 슬픈 일은 그것이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과 감정을 그렇게 오래도록 느낄 수 있었을까? 짐작도 못 하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우승열패의 신화’는 그 이유의 단초를 준다.


내가 약간 나이를 먹은 후-아마도 중학생이 된 뒤였든 듯 하다.- 제국주의에 대해 반감을 가지게 됐을 때는, 프랑스가 영국보다 나쁜 짓을 덜 했다는 사실에 약간의 위안을 얻었다. (좀 더 웃긴 사실을 고백하자면, 아마 프랑스가 일부러 식민지를 덜 거느렸을 거라고 생각했다.)한 마디로 나는, 프랑스가 영국보다 약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국 사회의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화두는 생존경쟁이다. 생존경쟁의 전제는 약육강식이다. 강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으며, 강한 것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뼛속깊이 박혀있다. 서구에서 발생한 약육강식 논리를 주로 삼고 있는 사회진화론과 함께 서구의 발달된 과학문명과 강대한 군사력을 접한 동양인들에게 서양은 강함-진화(개명, 인류가 궁극적으로 나아갈 길)로 인식된다. 따라서 서구의 자유 민권주의조차 민중이 무수한 피를 흩뿌리면서 쟁취한 것이라기보다는, 현재의 강대함을 갖추게 된 하나의 조건-발전단계로 다가오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어린 날 매력을 느꼈던 프랑스 혁명의 자유,평등,박애 사상은 그 이데올로기 자체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오늘날의 선진국 프랑스를 있게끔 한 동력으로 보였던 것이다.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던 나에게, 자유 평등 박애라는 대단히 종교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이데올로기와 전세계의 절반을 식민지로 거느릴 수 있는 강한 국력을 동급으로 생각하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박노자는 이 ‘우승열패의 신화’의 시초를 찾아 19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구 열강의 문화와 사상이 한국 사회에 유입되던 시점이다. 당시 서구에서는 사회진화론이 대세였다. 다윈의 진화론에서 약한 것은 자연 소멸되고 더 우열한 인자가 살아남는 것이 자연의 섭리라는 점을 사회에 접목시킨 사회진화론자들은, 사회 역시 강한 자가 살아남고 약한 자가 소멸하는 것이 당연하며 사회가 발전해나가는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방향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진리라기보다는 당시 왕조시대를 갈아엎고 세력을 키워나가는 부르주아 계층이 자신들의 기득권에 대한 정당성을 확립하기 위한 헤게모니 작업의 일종이었다.

이러한 사회진화론은 동양 사회에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일단 그들은 서구의 발달한 산업과 과학, 강력한 군대와 경제력 등에 찬탄하면서 그들의 이 새로운 이데올로기에 강한 인상을 받는다. 그런데 이러한 서구 문물을 접할 수 있는 계층은 어떤 성격을 띠고 있었는가. 일단 글줄을 읽을 줄 알았고 서양 사람들과 그들의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중산층 계층이되, 인맥과 집안세력에서 밀려, 한학만으로는 지배층 중심으로 파고 들어갈 수 없는 비주류 지식인들이었다. 서양의 부르주아들이 그랬듯이, 동양의 비주류 양반계층 역시 기존의 세력판도를 바꾸고 자신들이 새로운 지배계층으로 올라서기 위해서는 이 사회 진화론이 매력적인 것이었음에 틀럼없다. 따라서 이들은 사회진화론과 함께 민권주의를 받아들이되, 이때 민권은 우둔한 민중을 다스릴 수 있는 자신들의 민권이지, 진정한 의미의 모든 인민의 권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이들이 주장하는 애국의 실체는 자신들이 지배권을 잡고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국가로, 인민들이 중심이 된 국가는 아니었다. 따라서 이들은 서구의 자유, 민주, 개인주의 이데올로기를 국가주의로 변형해 포섭하게 된다. 이때 일본사회를 등장으로 함께 등장한 것이 아시아주의다. 일본의 신지식인층이 주창한 아시아주의는 세계의 패권을 황인종과 백인종의 대결로 이해해, 황인종이 대동단결하여 백인종의 침략을 물리쳐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게 된다.


사회진화론과 아시아주의의 공통점은, 삶은 생존경쟁이고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이보다 강해야 하고, 강해지는데 필요한 요소들은 선(善)이며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예전의 유교적 이념인 전통적인 충,효 개념도 역시 부강을 위해서만 필요한 것으로 인식된다. 애국해야 하는 이유는 애국해야 나라가 부강해지기 때문이고, 나라가 부강해져야 세계 경쟁 체제에서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주의가 통한 것도, 세계는 황인종과 백인종의 대결의 장이며, 싸워 이겨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단결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개인의 인권과 행복, 자유는 모두 무시된다.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 첫 번째 과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약육강식의 논리, 또한 국가주의는 오늘날까지 우리 사회에 오롯이 살아있다.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짓밟는 것이 당연하다 느끼는 이가, 그리고 황인종의 단결과 부강을 이끄는 것은 일단 개화와 개혁에 가장 먼저 성공한 일본이라 느끼는 이가 친일파롤 변절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여기서 최남선, 이광수 등 일제 강점 이전에 계몽운동을 비롯한 부강운동을 이끌던 이들이 친일파가 된 이유는 너무나 자명하게 나와서 그들의 심정이 이해가 될 정도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진화론의 대항 이데올로기가 조금씩 형성되지만 이들은 여전히 비주류였고, 또한 아마도 우리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이자 아직도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에 그 비극성이 더욱 커지는 6.25, 그리고 6.25로 인한 우편향적인 사회분위기에 의해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사회진화론의 기본 인식이 주류 이데올로기로 팽배해있다.


박노자의 이 책은 일단 한국 사회의 19세기 말 사상사-사회진화론의 유입과 영향력-를 주제로 한 역사책이다. 박노자가 보론에서 밝힌 것처럼, 반 사회진화론의 입장을 확실히 한 뒤, 역사적 사실을 전문적으로 참고해 사회진화론의 유입과 형성과정을 도출한 ‘전문적이고 대중적(이게 무슨 소린지 솔직히 말하자면, 역사책을 거의 안 읽은 관계로 잘 모르겠지만)으로’ 저술한 역사책이다. 개화기에 대해 무지한 것을 떠나, 중고등학교 시절 국사책으로만 접해 본 내게는 여러 가지 유익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이 책을 통해 신채호와 독립협회, 그리고 당시의 친일파에 대해 가지고 있던 혼란이 많이 정리될 수 있었다. 또한 최남선, 이광수 등에 대해 단지 자신의 이득을 챙기기 위해 여기저기 붙는 소인배라는 단순한 인식에서 벗어나 그들이 왜 친일파로 흐르는 것이 당연했는지 그들의 의식세계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는 점도 큰 수확이다.


한국 사회가 박노자라는 냉정한 눈과 뜨거운 가슴을 가진 역사학자를 얻은 것은 큰 수확이다. 그는 남북의 대립으로 인한 좌파 사상의 탄압과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형성된 피해의식에 찌들 수 밖에 없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냉정한 제 3자의 시각을 제공함으로써, 우리를 다시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의 의견에 동조하든 하지 않든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볼 기회를 얻는 다는 것은 행운이다.


하지만 재미있게 읽다가 마지막 후기 부분에서 제동이 걸렸다. 세계는 정반합의 과정을 거쳐 꾸준히 진화, 발전한다고 말하는 듯한 부분은, 내가 동의하기 힘든 점이다. (여기에 대해 확실한 내 주장이 있는 것은 아니고, 단지 어렴풋이 느끼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 달 뒤 나는 이 주장에 동의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악당이 슬쩍 살아나면서 후속편을 예고하는 영화처럼, 이 책 역시 후속편을 예고하고 있는 듯 하니, 20세기 초반 식민지 조선에서 대한민국 수립까지 이 ‘우승열패의 신화’는 어떻게 명맥을 지켜 오늘날까지 살아 숨쉬는지에 대한 심도있는 박노자의 후속작이 기대된다. (음? 안 써주려나?)

 

ps: 마지막 장에서는 한용운에 대한 애정이 구구절절이 묻어난다. 문득 저자가 불교신자라는 사실이 떠올라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박노자를 비롯한 몇몇 지식인이 진정 존경스러운 이유는, 언행일치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반성한다는 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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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립학교 아이들
커티스 시튼펠드 지음, 이진 옮김 / 김영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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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춘기를 흔히 질풍노도의 시기라고들 한다.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를 나름대로 파악하고, 그리고 자신을 그 안에 어떻게 위치지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시기. 물론 내 주변 사람들에게도 그에 맞는 역할을 하나씩 나눠주게 된다. 그런데 아직 경험이 적고 삶에 대해 아는 게 적은 이 나이에는 나도, 사회도 그리고 주변 사람들도 다분히 도식적으로 위치지우게 된다. 선과 악, 부와 빈, 정의와 불의. 이러한 도식적이고 유치한 구분은 당연히 부작용을 불러온다. 나와 사회의 다면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한 가지 면(보통의 경우 자신이 보고 싶은 면)에만 집중한다. 친구의 사소한 이기심에 심한 배신감을 느끼기도 하고, 자신의 나약함에 한없는 자기혐오를 느끼기도 한다. 또 다른 부작용은 사람들과 나를 위치짓는 방법이다. 서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적은 사람들이,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해나갈까. 대부분의 경우 사회가 부과하는 몇 가지 선택기준, 또는 내가 정한 몇 가지 준거기준에 의해 상하로 나눠지는 권력관계를 형성한다. 누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가- 돈이 많은가, 성적이 좋은가, 리더쉽이 있는가, 또는 외모가 출중한가. 사회가 부과하는 몇 가지 선택기준들에 따라 사람들은 서로를 평가하고 서열지어 구분한다. 또한 나만 그런 위계질서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 역시 나를 마찬가지의 기준으로 구분하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한 나의 평가와 나에 대한 상대방의 평가가 어긋날 때 미묘한 갈등이 발생한다. 미숙한 아이들이 만드는 권력질서, 그 속에 자신의 자리를 제대로 잡지 못한다는 것은 사춘기 아이들에게 영원한 숙제며 고민이다. 이 시기 고민의 대부분이 대인관계에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주인공 리 피오라의 갈등 역시 이 사이에서 발생한다. 학구심 넘치고 재기발랄한 소녀 리. 어느 날 한 명문 사립학교의 팜플렛을 보고 이곳이 자신이 있어야 할 곳, 또한 자신을 피어나게 할 곳으로 선택한다. 평화롭지만 작고 즐겁지만 사소한 자신의 고향은, 자의식 강하고 야심찬 소녀 리에게는 답답하고 뒤떨어진 곳으로만 느껴진다. 리가 원한 것은, 이 학교가 가지고 있는 '명문'이란 타이틀에서 나오는, 한층 더 높은 세계이다. 하지만 그곳에 가는 순간, 리는 자신이 그 곳에서 발휘할 수 있는 힘이 아무것도 없으며, 그나마 가지고 있던 힘도 보잘 것 없는 것이고, 그래서 이 곳에 영원히 속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돈, 외모, 인기 그런 것들이 얼마나 속물적이고 한시적인 것인지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이미 그런 것이 힘을 발휘하게끔 만들어놓은 사회에 리가 대항할수 있는 힘은 미약하다. 게다가 리가 원한 것 역시 그런 힘을 바탕에 깔고 어떤 카리스마를 발생하는 인간이 되는 것 아니었던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리는 가난하고 외모도 뛰어나지 않고 그냥그런 평범한 학생일 뿐이다. 물론 성인이 된 뒤에는 깨닫는다. 꼭 사람들의 선망이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모든 면에서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것. 따라서 최고의 자리라고 해서 최고의 자리만은 아니라는 것. 하지만 모든 것이 미숙하기만 한 사춘기 시절에는 그 당연한 진리가, 사람과 사회의 다면성이 통용되지 않는다.

여기서 리가 할 수 있는 몇 가지 선택이 있다. 하나는 같은 방을 쓰는 학우 디드처럼 중심에 있는 자들에게 접근해 그들의 권력을 나눠받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호밀밭의 파수꾼’에 나오는 콜든처럼 이 우스꽝스러운 권력관계를 비웃고 전복하는 것이다. 하지만 리는 두 가지 방법 다 택하지 않는다. 이 학교를 선택하고, 이 학교가 가지고 있는 권력을 탐한 것은 다름아닌 리 자신이기에 후자의 방법은 리에게 맞지 않는다. 하지만 전자의 방법 역시 자존심 강한 리에게는 굴욕이다. 리가 택하는 것은, 조용히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누군가의 주목을 받고 싶지만 주목받는 것이 두려운’마음을 계속 간직한 채, 원래의 자신을 망가뜨리지 않을 수 있도록 최대한 보호망속에 넣으며, 처음에 자신을 매혹했던 이 학교의 매력을 현실이 아닌 빛바랜 앨범속에서만 찾는 것. 그것이 리가 택한 방법이다. 덕분에 리는 졸업할 때쯤 신문기자에게 이 학교의 어떤 진실을 까발릴 정도로 자신을 잃지 않는 것은 성공하지만, 자신에게 열려 있었던 다른 가능성들을 놓치고 만다. 몇몇 선배와 나눌 수 있었던 인간적인 교류를 놓치고, 연대할 수 있었을 몇몇 친구들 역시 놓친다. 자신이 가질 수도 있었을 어떤 기회들이 눈앞에서 날아가버리지만, 자의식만 강하고 아직 세상 경험이 적은 리는 어떤 식으로 자신을 오픈해야 하는지 감을 잡지 못해 아쉬움이 가득한 눈으로 그것을 지켜볼 뿐이다. 그리고 아마도 자신이 원했던 이 학교의 정점-크리스-을 손에 넣었다고 생각한 순간, 그녀의 이발 작업이 그랬듯이 상대방에게 약간의 호기심과 편리만을 안겨주고 비참한 결말을 맞고 만다.

 

자의식이 강한 이들에게, 머릿속에 꿈꾸는 자신의 이상적인 모습과 그것을 방해하는 사회, 그리고 그만큼 따라주지 않는 자신 세 가지가 충돌하는 사춘기 시절은 끝없는 비참함과 우울함만을 안겨준다. 나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크기에 상황에 대처하는 적응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리처럼 상황이 급작스레 바뀌는 경우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좀 더 성인이 돼서 돌아보면, 사춘기 시절은 아쉬운 것 투성이다. 내 고집 때문에 또는 내 미숙함 때문에 놓친 것들은 얼마나 많은가. 그게 사람이든 꿈이든 어떤 기회였든 간에.

하지만 소설은 여기까지다. 한 자의식 강한 소녀의 사춘기를 다큐멘터리 식으로 그려낸 소설은, 주인공 리를 변호하지도 않고 포장하지도 않으면서, 그녀의 생활과 감정, 생각하고 있는 바를 날 것 그대로 생생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소설의 가장 마지막 부분, ‘성인’이 된 리를 볼 때, 고등학교 시절이 그녀에게 우울하고 다소 비참했던 기억외에 무엇을 남겨줬는지 알 길이 없다. 가장 친했던 친구 마사는 1년에 한 두 번 볼까말까하고, 남자친구이자 첫 사랑이었던 크리스와는 교류조차 없다. 성인이 된 리에게서 고등학교 시절의 흔적을 찾아보긴 힘들다. 그 일이 그녀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그녀의 성장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독자는, 그리고 아마 그녀 자신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단지 리가 앨범을 넘기듯 자신의 당시 이야기를 담담하게 해 나가는데 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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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나의 도시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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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현의 ‘달콤한 나의 도시’를 읽다.

 

20대 후반 그리고 30대 초반의 비혼 여성 이야기는 몇 년전부터 꾸준히 인기를 끌면서 이제는 거의 흥행보증 수표가 되어 버렸다. 시트콤의 고전 '섹스 & 더 시티'를 시작으로 '브리짓 존스의 일기'. '싱글즈'.'걸혼하고 싶은 여자','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여우야 뭐하니'까지.

 

결혼적령기를 이미 지났으나 여전히 결혼이 멀고 두렵게, 또는 어렵게 느껴지는 이들의 이야기는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면서 점점 큰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이들의 고민은 결혼에 집중되어 있는 것 같아 보이나, 사실은 꿈과 현실 사이에서 아직 방향을 정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여자의 신분(?!)으로 4년제 대학을 나와, 자기 한 몸 먹여살리기엔 나름대로 충분한 직장을 가지고 있는 여성들이 서른해를 살아오면서 어떤 꿈을 키워 왔으리라는 점은 당연하다. 그것이 멋진 영화 한 편을 찍겠다거나 소설가로 이름을 날리겠다는 식의 다분히 비사회적이고 낭만적인 꿈이건, 또는 성공가도를 달리는 커리어 우면이 되겠다는 현실적이고 속물적인 꿈이든 간에, 어쨌거나 4년제 대학에 진학할 때, 집에서 살림이나 하면서 그냥저냥 살겠노라 다짐한 여성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물이 어느 정도 들면서 어떤 꿈도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성공한 커리어 우먼은 커녕 오늘 당장 자리지키기에 급급하고, 낭만적인 꿈을 쫓자니 배곪는 것도 싫고 그만한 열정이나 천재성도 없다. 그리하여 아직 풋풋하고 꿈을 쫓고 있는 연하의 남자친구 윤태오는 사랑스럽고 가슴을 설레게 하지만 대신 막막하고 불안하며 때론 한심하기까지 한 미래이다. 

 

그 어떤 꿈도 현실화시키기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이 비혼 여성들은 '전업주부'로 도피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아등바등 직장생활하는 것도 지치고, 이제와서 딱히 다른 꿈을 꾸어보겠다는 열정도 없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생활이, 내가 꾸던 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사람은 한없이 피곤함을 느낀다. 그래서 현실에 안주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전업주부-결혼이란 현실 역시 만만한 것은 아니다. 결혼과정부터 답이 보이지 않는 갈등을 겪고, 심하게는 첫번째 결혼기념일을 맞기도 전에 이혼서류를 작성하게 된다. 또는 참고 산다해도, 자식들이 모두 자라 새 가정을 얻을 30년을 살을 섞고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에게 등을 돌리고 다른 삶을 꿈꾸게 된다. 주인공 오은수의 친구 재인처럼, 또는 은수의 어머니처럼. 따라서 설레임은 없지만 옆에 있으면 편안하고, 내 사정을 꼬치꼬치 캐묻지 않으면서도 내 갑작스런 결정들을 말없이 지켜보면서 힘이 되어주는 남편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다. 오은수가 결혼하기로 결심했던, 평범의 결정체같은 남자 김영수가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던 것처럼.

 

꿈을 쫓는다는 모험을 하기에는 꿈도 용기도 없고, 평범한 삶도 결국은 허상이란 것을 깨달은 뒤 은수가 가야할 길은, 그냥 삶을 생활 자체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물론 그것은 정답도 아니고 은수 자신은 물론 독자들을 만족시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산다는 것의 정체일게다. 정답도 아니고 만족스럽지도 않다. 아무리 두 팔 벌려 사랑하려 해도. 우리를 계속 속이고 배신하는 것이 삶이고, 노여움을 잊고 다시 한 번 지치지도 않고 삶에 구애하는 것, 그게 우리다.

 

소설은 결혼적령기를 넘긴 비혼 여성들의 불안함을 전형적으로 그려낸다. 소재와 주제가 전형적인 것 만큼이나 전형적인 등장인물들과 전형적인 사건들, 심지어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려 한 듯한 오은수의 독백마저 전형적이다. 이제 비혼 여성들의 결혼에 대한 갈등은 넘칠 정도로 이야기됐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가 될 때가 됐다는 깨달음을 주는 것이 이 소설의 역할인 듯 하다.

 

결론을 말하자면, 빨리 읽히되 새롭지 않고, 나름대로 재미있되 생각할 거리를 주진 않는다. 정이현은 뭐가 잘 팔리는지 만큼은 확실하게 알고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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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결혼했다 - 2006년 제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이당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박현욱의 '아내가 결혼했다'를 읽다.

주인공은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녀는 일대일로 이루어지는 배타적인 연애관계를 지양하는 인물. 주인공은 아내를 독점할 수 있는 방법으로 결혼을 택하고, 여자는 모든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전제하에 결혼을 수용한다. 하지만 결혼은 아내와의 안정된 관계를 만들어주기는 커녕 더 복잡한 상황으로 끌고 간다.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됐다는 아내는 중혼을 고집하고, 결국 아내를 잃는 것보단 절반이라도 얻는게 낫다고 판단한 주인공은 아내의 또 다른 결혼을 허용한다. 아내는, 아버지가 누군지 알 수 없는 딸아이를 출산하고, 주인공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아이의 존재와 함께 아내의 또 다른 남편에게도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된다.

소설은 일부일처제라는 상당히 굳건하게 뿌리내린 제도의 허위와 가식을, 주인공이 아내에 대한 사랑 때문에 아내의 일탈을 조금씩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폭로하고 있다. 가치의 전복자인 아내는, 단순한 바람둥이나 행실 나쁜 팜므파탈이 아니라, 다처다부제, 아니 결혼 제도를 넘어서 여러 명의 뜻맞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행복을 추구하는 집단이 가족이라는 나름대로의 철학을 실천적으로 옮기는 '의식있는 여성'으로 그려진다. 나름대로 진지한 사회과학적이고 인문학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매 장의 말미마다 이야기 줄거리와 연관되는(이라기보다는 억지로 연관시키는) 축구 이야기를 끌어들이면서 가독성을 높이고 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아내의 결혼'은 소설에 큰 구멍을 낳고 있다. 문제는 등장인물들의 갈등이 모두 '아내의 결혼'에만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결혼이란, 모두 알고 있듯이 집안과 집안의 결합이다. 사랑하는 두 남녀의 결합이라는 설명이, 결혼의 본질을 은폐하고 있는 환상이란 점은 대부분 알고 있는 사실이다. 여기서 특히 여성은 하나의 물건으로 취급된다. 식장에서 아버지가 딸의 손을 남편에게 건네주는 의식은 딸-여성의 위치와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순간 여성은 다른 집안의 일원이 되며, 다른 집안의 모든 가사 노동을 전담하는 역할을 맡는다. 유교적 규범이 자리잡기 전의 과거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현재 우리나라에서 여성이 결혼을 꺼리거나 달가워하지 않는 이유는, 사실 70% 이상이 '시댁'과 관련된다. 거역하기 힘든 상사가 줄줄이 있고, '내 방식'이라는 것이 허용되지 않으며 대신 다른 사람의 방식을 전면 수용해야 하고, 월급이나 직급이 나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고, 모든 잡일들을 다 떠맡아야 하는 회사에 고용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노동자를 얻기 위해 남자측은 결혼을 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이 모든 여성의 노동과 고통은 '가족'과 '사랑'이라는 몇 가지 지리멸렬한 단어들로 감추어진다. 일부일처제나 그런 식의 결혼 제도가 문제가 되는 진짜 이유는, 여러 사람을 동시 다발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막기 때문이 아니라, 여성(또는 다른 사회적 약자)의 희생을 강요하는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는 동시에 은폐하기 위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내가 결혼했다'의 인아는 어떤가. 인아는 단지 두 명의 남편을 거느리기를 원한다는 것을 제외하곤 전혀 전복적이지도 않고 반사회적이지도 않다. 인아는 낮에는 요조숙녀, 밤에는 요부라는, 남성들의 환타지를 완벽하게 채워준다. 그녀는 잠자리에서는 적극적인데다 환상적이고, 집안일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데다, 직장일까지 완벽하게 해내는 슈퍼우먼이다. 그녀에 대한 첫 설명을 보자. 외모가 50점에 불과한 그녀가 주인공에게 호감을 얻는 것은 사소하고 자질구레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 성격 때문이다. (직장내 대부분의 여성, 그리고 비정규직은 자잘하고 사소한 요구를 모두 들어줘야 하는 위치에 있다.) 인아와 주인공이 사귀게 됐을 때, 주인공은 자신은 정리를 모르고 사는 반면, 인아는 정리와 청소가 취미라고 말한다. 여성이 정리 정돈을 잘하고 깔끔한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남성들의 가장 큰 착각 중 하나다. 대부분의 여성이 어렸을 때부터 집안일을 자신의 역할로 강요받았고, 자신의 몸과 주변은 물론, 남자 형제의 방까지 치워줘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에 청소를 '잘' 할 뿐이지, 여성의 유전자에 정리정돈과 청소를 좋아하는 요소가 들어있을 확률은 남성 유전자에 있을 확률과 비슷하다. 주인공과 결혼을 한 인아는, 주중에 경주까지 내려가서 직장을 다님에도 불구하고 주말에는 반드시 서울까지 올라와 각종 청소와 요리를 하고 밑반찬도 만드는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두집 살림을 하게 됐을 때도, 여전히 집안살림을 완벽하게 하는 동시에, 명절 및 제사때가 되면 양쪽 시댁에 도착하자마자 부엌일을 하고 시댁 식구들에게는 싹싹하게 구는, 완벽한 며느리 역할을 해 낸다. 결혼제도가 여성에게 강요하는 모든 희생을, 희생이라든가 착취라는 의식조차 없는 이 아가씨가, 남편 둘 거느렸다해서 무슨 문제가 있겠나. 오히려 여자가 남자에 비해 현저히 모자라는 21세기가 요구하는 며느리 및 아내의 역할모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하다.

이 소설의 두번째 구멍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부딪칠 수 밖에 없는 여러가지 문제들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주인공은 인아가 다른 남자들도 사랑한다는 점 외에는 어떤 것에도 불만을 갖지 않는다. 자신의 생활 역시 회사에서 잘리는 것도 아니고 어머니 및 형제들이 경제적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 문제도 없다. 물론 일처일부제의 문제에만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갈등요소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일수도 있지만, 그 점 때문에 이 소설은 오히려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주인공이 사회적 규범을 어기면서까지 인아를 사랑하는 이유 역시, 인아가 밤일과 집안일 모두 잘하는 슈퍼우먼이라는 점 밖에 없으며, 인아 역시 모든 남자들의 이상형이라는 것 외에는 인격이 없어 보인다. 즉 모두가 사랑할만한 완벽한 여자와 그 여자에게 순정을 바치는 남자라는 도식적인 등장인물만이 나오기 때문에, 이 소설은 현실에 발붙이고 사는 인간들에게서 나오는 생명력을 얻지 못했다. 엄연히 현실에 존재하는 일처일부제라는 제도를 깨기 위한 소설이 현실적이지 못하다면 설득력은 당연히 떨어진다.

또한 소설 말미에 붙는 축구얘기들은 재미있다는 점은 확실하지만, 소설의 내용과 억지로 이어붙이고 있다는 느낌도 제법 준다. 때로는 나야말로 주인공처럼 '그래서 어쩌라고?'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아마도 가장 큰 문제는 이 소설이 문학작품 수상작이라는 점일 것이다. 소설 자체는 큰 문제는 없다. 가독성도 있고 주제를 풀어나가는데 설득력도 있다. 문체도 안정적이다. 하지만 결혼제도, 근대 들어와서 정상적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는 일부일처제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 것은 이미 10년도 더 지난 일이다. 그런데 여전히 그런 문제가 신선하고 전복적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기존 문단의 보수성과 경직성은 한심하게 느껴진다. 진정으로 전복적이고 신선한 소설은, 어쩌면 보수적인 문단에 의해 묻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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