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드걸 미미양의 모험
오현종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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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스파이, 코드 네임 007, 제임스 본드의 수많은 본드 걸은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궁금증에서 시작한다.

본드 걸은 하나의 상징이다. 그녀는 아름답고 섹시하며, 무엇보다 남자를 돋보이게 해 주는 인물이다. 또한, 하나의 에피소드로 수명이 끝나므로, 현실적이지 않고 일회적이기 때문에, 얽매지이 않고 연애(섹스)만 하고 싶은 남자들에겐 더할나위 없는 최고의 애인이다. 다시 말해 그녀는, 남성이 원하는 여성의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 그녀의 역할은, 본드 걸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남자의 매력을 돋보이게 하는데 있다.

그렇게 수없이 뒤바뀌는 본드 걸은, 제임스 본드가 다른 본드 걸 곁으로 떠났을 때 어떻게 되었을까.

소설속의 본드 걸 미미는, 자신이 일회용이고 더 이상 제임스 본드를 붙잡아 둘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한다. 무엇보다 제임스 본드의 "난 본드, 제임스 본드, 스파이야. 당신은 날 몰라 (p. 46)" 라는 말에 모욕감을 느낀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직접 스파이가 되기로 결심한다. 

미미라고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본드에게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을 쏟아부었던 건 아니다. 그녀는, 다른 모든 여자들이 사랑하는, 그리고 심지어는 남자들도 질투할 정도의 능력을 가진 남자, 부유하고 권력의 핵심에 닿아있는 남자를 획득했다는 사실에 기뻐한다. 결혼 시장에서 1등 신랑감으로 꼽힐 남자를 낚은 덕에 편하면서도 매력적인 생활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은, 그 동안 힘들게 모은 월급을 여행에 모두 쏟아부은 것도 본드를 만났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괜찮은 투자였다는 위안을 갖다준다. 

하지만 본드가 미미를 배신하고 다른 본드 걸을 만나자 미미는 자신이 꿈꾸었던 유한부인으로서의 삶이 박살났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배신감과 절망에 빠진 미미를 더욱 자극하는 것은, 본드가 배신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모르는 그의 삶이다. 남자들의 삶, 남자들의 세계, 남자들이 권력. 그것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그들은 수많은 본드 걸들을 양산하고 버리고 휘두르는가. 미미는 그 무한한 힘을 얻기 위해 남자들의 세계에 직접 뛰어든다. 

희망과 설렘, 동경을 안고 뛰어든 스파이의 세계. 하지만 그것은 미미의 예상과는 달리 미미 언니가 운영하는 고깃집처럼 누추하고 현실의 때가 묻어 있다. 어떤 이는 편하게 노후가 보장되는 공무원 생활을 위해 뛰어들었고, 어떤 이는 자신이 맡은 부서의 일이 자신의 꿈과 맞닿아 있다고 믿고 들어왔지만 자아실현은 고사하고 하루하루 주어지는 업무를 처리하는 것도 힘들다. 스파이의 세계 밖에서는 마냥 매력적이었던 제임스 본드도, 이곳에서는 상사의 명령에 이리저리 시달리는 고달픈 샐러리맨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이곳은 코드 네임의 세계이다. 미미는, 미미라는 이름을 버리고 코드 네임 013, 또는 작전에 주어진 이름인 오란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자신의 과거-사생활(언니, 형부, 친구 등)과 결별할 것을 강요받는다. 사(私)는 없고 공(公)만 있는 세계. 또는 사와 공이 어지럽게 뒤얽힌 세계. 모든 인간관계와 감정이 업무로만 이해되고, 때에 따라선 누구든 배신해야 하고, 그래서 누가 자신을 배신할 지 몰라 모두를 의심하며 지내야 하는 세계. 과정은 무시되고 결과만 보는, 남자들의 세계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세계와 너무나도 이질적인 이 곳에서, 미미는 미아가 된 듯한 어지럼증을 느낀다. 이곳에는 미미가 원했던 권력은 없었고, 권력의 이미지만 여기저기 흔적을 남기고 다녔다. 

소설에서 미미는 몇번이나 되풀이하며 "나는 여자가 아니라 훌륭한 스파이랍니다. 따라서 여자가 흔히 저지르는 감정 상의 실수를 범하진 않아요." 라고 강조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문제를 풀어나가는 미미의 방식은 대단히 여성적이다.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왜, 어떻게 이 자리에 있게 됐는지 혼란에 빠진 미미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적국의 스파이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쭉 들려준다. 미미는 "검은 방에 앉아 있는 적국의 플라이에게서 내 얼굴을 보았고, 그녀가 나의 잃어버린 쌍둥이, 짝패같다는 생각(p.186)을 하며, 그녀와의 공유점을 찾아가고, 적국의 스파이 역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며 교감을 형성한다. 이렇게 얻어낸 정보로 미미는 내부의 배신자가 누구인지 알아내지만, 그것을 처리하는 방식 역시 지극히 여성적이다. 미미는 그것을 상부에 알려 공로를 세우는 대신, 자신만의 비밀로 간직한다. 차가운 조직사회에서, 애정(사적인 감정)을 겉으로 드러낼 수 없었고, 질투까지 섞이면서 왜곡됐던 남자들의 애증은 미미 안에서 정화된다. 그녀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여자와 여자 사이의, 아버지와 딸 사이의 감정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내보내는 것이다. 

남자들의 세계를 여자들의 감성으로 살아나가는 것, 그것이 미미가 터득한 삶의 방식이다. 그래서 그녀는 여전히 제임스 본드를 사랑한다. 본드 걸로 만났을 때는 평생 뜯어먹고 살 수 있을 남편감으로 사랑했다면, 그래서 그의 남성적이고 마초적인 매력을 사랑했다면, 스파이가 된 지금은 아직 너무 어리고 여리고 작은 존재에 대한 연민으로 사랑한다. 그녀가 직접 들어가서 본 남자들의 세계는, 껍데기만 화려하고 속은 텅 빈, 발렌타인 데이 초콜렛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마지막 대사, "난 본드걸 미미. 013. 스파이야. 당신은 날 몰라."(p.208)은, 앞에서 제임스 본드가 했던 말과는 다른 울림을 준다.

너무나도 발랄한 제목과 표지 때문에 기대치가 너무 낮았던 탓인지, 오히려 재미있게 읽었다. 소설 내용은, 성정치학에 대한 이론으로 뒤덮힐 여지가 충분하지만, 오현종은 시종일관 캐릭터를 유지하고 그들의 스토리를 이어감으로써 그런 위험을 피해간다. (최근에는, 사회과학 서적을 읽으면 되지 이걸 왜 읽어 - 라는 소리가 나오게끔, 자신들의 지적 허영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쓴 게 아닌가 의심갈 정도로 이야기는 없고 이론만 가득한 소설들이 너무 많다. 농담이 아니고 그럴려면 차라리 사회과학 서적을 쓰시라고. 계몽하니? ) 다만 이야기가 너무 단순하고 허를 찌르는 깊이가 부족한데다, 뒷부분에선 급하게 이야기를 마무리한 흔적이 다소 아쉬움을 남긴다. 하지만 이게 겨우 두 번째 장편소설인 점을 감안한다면, 담백하고 세심한 캐릭터를 만들어낼 줄 아는 이 힘으로 새로운 이야기꾼이 태어나길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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