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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優勝 열패劣敗의 신화 - 사회진화론과 한국 민족주의 담론의 역사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5년 4월
평점 :
절판
어린시절의 기억 한 자락이다. 내가 프랑스란 나라에 대해 가졌던 감정은 이중적이고 모순적이었다. 문제는, 내가 모순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내가 가장 좋아한 나라는 프랑스였다. 이유는 프랑스 혁명때문이었다. 화려한 궁중과 아름다운 귀족들, 한 편의 영화같은 사랑과 비극적인 운명. 그리고 단어만으로도 설레이는 자유와 평등, 박애의 기치를 높이 들고 봉기한 민중들. 그리고 자유와 평등을 쟁취하기 위해 붉은 피를 흩뿌려야 했던 그들의 의기. 하지만 프랑스 혁명이 무엇보다 낭만적으로, 그리고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혁명이 성공했다는 점일 게다. 유럽 국가 중에서(잘못된 상식으로는 세계적으로) 최초로 왕정을 뒤엎고 현대 민주주의 기초를 자력으로 이룬 나라, 그것도 모자라 자유, 평등, 박애라는 진리를 전 세계에 전파한 나라. 반대로 내 미움을 산 나라는 영국이었다. 역시 이유는 단 하나, 내가 좋아하는 프랑스와 앙숙이었기 때문이다. 이 놈의 영국이란 나라는 어쩌면 그렇게 프랑스와 맞붙었을 때마다 족족 이겼는지. 나는 언니들의 세계부도에서 영국와 프랑스의 식민지 수를 비교하면서 남몰래 가슴아파하곤 했었다.
자유와 평등, 박애의 나라이기 때문에 좋아했던 프랑스가, 식민지를 영국보다 적게 거느린 사실에 대해 슬퍼하다니?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도 않은 일이지만 그때 내 감정에는 아무런 거짓도 거리낌도 없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아무런 모순도 느끼지 못했던 내 감정과 사고방식, 정말 슬픈 일은 그것이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과 감정을 그렇게 오래도록 느낄 수 있었을까? 짐작도 못 하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우승열패의 신화’는 그 이유의 단초를 준다.
내가 약간 나이를 먹은 후-아마도 중학생이 된 뒤였든 듯 하다.- 제국주의에 대해 반감을 가지게 됐을 때는, 프랑스가 영국보다 나쁜 짓을 덜 했다는 사실에 약간의 위안을 얻었다. (좀 더 웃긴 사실을 고백하자면, 아마 프랑스가 일부러 식민지를 덜 거느렸을 거라고 생각했다.)한 마디로 나는, 프랑스가 영국보다 약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국 사회의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화두는 생존경쟁이다. 생존경쟁의 전제는 약육강식이다. 강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으며, 강한 것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뼛속깊이 박혀있다. 서구에서 발생한 약육강식 논리를 주로 삼고 있는 사회진화론과 함께 서구의 발달된 과학문명과 강대한 군사력을 접한 동양인들에게 서양은 강함-진화(개명, 인류가 궁극적으로 나아갈 길)로 인식된다. 따라서 서구의 자유 민권주의조차 민중이 무수한 피를 흩뿌리면서 쟁취한 것이라기보다는, 현재의 강대함을 갖추게 된 하나의 조건-발전단계로 다가오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어린 날 매력을 느꼈던 프랑스 혁명의 자유,평등,박애 사상은 그 이데올로기 자체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오늘날의 선진국 프랑스를 있게끔 한 동력으로 보였던 것이다.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던 나에게, 자유 평등 박애라는 대단히 종교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이데올로기와 전세계의 절반을 식민지로 거느릴 수 있는 강한 국력을 동급으로 생각하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박노자는 이 ‘우승열패의 신화’의 시초를 찾아 19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구 열강의 문화와 사상이 한국 사회에 유입되던 시점이다. 당시 서구에서는 사회진화론이 대세였다. 다윈의 진화론에서 약한 것은 자연 소멸되고 더 우열한 인자가 살아남는 것이 자연의 섭리라는 점을 사회에 접목시킨 사회진화론자들은, 사회 역시 강한 자가 살아남고 약한 자가 소멸하는 것이 당연하며 사회가 발전해나가는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방향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진리라기보다는 당시 왕조시대를 갈아엎고 세력을 키워나가는 부르주아 계층이 자신들의 기득권에 대한 정당성을 확립하기 위한 헤게모니 작업의 일종이었다.
이러한 사회진화론은 동양 사회에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일단 그들은 서구의 발달한 산업과 과학, 강력한 군대와 경제력 등에 찬탄하면서 그들의 이 새로운 이데올로기에 강한 인상을 받는다. 그런데 이러한 서구 문물을 접할 수 있는 계층은 어떤 성격을 띠고 있었는가. 일단 글줄을 읽을 줄 알았고 서양 사람들과 그들의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중산층 계층이되, 인맥과 집안세력에서 밀려, 한학만으로는 지배층 중심으로 파고 들어갈 수 없는 비주류 지식인들이었다. 서양의 부르주아들이 그랬듯이, 동양의 비주류 양반계층 역시 기존의 세력판도를 바꾸고 자신들이 새로운 지배계층으로 올라서기 위해서는 이 사회 진화론이 매력적인 것이었음에 틀럼없다. 따라서 이들은 사회진화론과 함께 민권주의를 받아들이되, 이때 민권은 우둔한 민중을 다스릴 수 있는 자신들의 민권이지, 진정한 의미의 모든 인민의 권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이들이 주장하는 애국의 실체는 자신들이 지배권을 잡고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국가로, 인민들이 중심이 된 국가는 아니었다. 따라서 이들은 서구의 자유, 민주, 개인주의 이데올로기를 국가주의로 변형해 포섭하게 된다. 이때 일본사회를 등장으로 함께 등장한 것이 아시아주의다. 일본의 신지식인층이 주창한 아시아주의는 세계의 패권을 황인종과 백인종의 대결로 이해해, 황인종이 대동단결하여 백인종의 침략을 물리쳐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게 된다.
사회진화론과 아시아주의의 공통점은, 삶은 생존경쟁이고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이보다 강해야 하고, 강해지는데 필요한 요소들은 선(善)이며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예전의 유교적 이념인 전통적인 충,효 개념도 역시 부강을 위해서만 필요한 것으로 인식된다. 애국해야 하는 이유는 애국해야 나라가 부강해지기 때문이고, 나라가 부강해져야 세계 경쟁 체제에서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주의가 통한 것도, 세계는 황인종과 백인종의 대결의 장이며, 싸워 이겨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단결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개인의 인권과 행복, 자유는 모두 무시된다.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 첫 번째 과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약육강식의 논리, 또한 국가주의는 오늘날까지 우리 사회에 오롯이 살아있다.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짓밟는 것이 당연하다 느끼는 이가, 그리고 황인종의 단결과 부강을 이끄는 것은 일단 개화와 개혁에 가장 먼저 성공한 일본이라 느끼는 이가 친일파롤 변절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여기서 최남선, 이광수 등 일제 강점 이전에 계몽운동을 비롯한 부강운동을 이끌던 이들이 친일파가 된 이유는 너무나 자명하게 나와서 그들의 심정이 이해가 될 정도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진화론의 대항 이데올로기가 조금씩 형성되지만 이들은 여전히 비주류였고, 또한 아마도 우리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이자 아직도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에 그 비극성이 더욱 커지는 6.25, 그리고 6.25로 인한 우편향적인 사회분위기에 의해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사회진화론의 기본 인식이 주류 이데올로기로 팽배해있다.
박노자의 이 책은 일단 한국 사회의 19세기 말 사상사-사회진화론의 유입과 영향력-를 주제로 한 역사책이다. 박노자가 보론에서 밝힌 것처럼, 반 사회진화론의 입장을 확실히 한 뒤, 역사적 사실을 전문적으로 참고해 사회진화론의 유입과 형성과정을 도출한 ‘전문적이고 대중적(이게 무슨 소린지 솔직히 말하자면, 역사책을 거의 안 읽은 관계로 잘 모르겠지만)으로’ 저술한 역사책이다. 개화기에 대해 무지한 것을 떠나, 중고등학교 시절 국사책으로만 접해 본 내게는 여러 가지 유익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이 책을 통해 신채호와 독립협회, 그리고 당시의 친일파에 대해 가지고 있던 혼란이 많이 정리될 수 있었다. 또한 최남선, 이광수 등에 대해 단지 자신의 이득을 챙기기 위해 여기저기 붙는 소인배라는 단순한 인식에서 벗어나 그들이 왜 친일파로 흐르는 것이 당연했는지 그들의 의식세계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는 점도 큰 수확이다.
한국 사회가 박노자라는 냉정한 눈과 뜨거운 가슴을 가진 역사학자를 얻은 것은 큰 수확이다. 그는 남북의 대립으로 인한 좌파 사상의 탄압과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형성된 피해의식에 찌들 수 밖에 없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냉정한 제 3자의 시각을 제공함으로써, 우리를 다시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의 의견에 동조하든 하지 않든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볼 기회를 얻는 다는 것은 행운이다.
하지만 재미있게 읽다가 마지막 후기 부분에서 제동이 걸렸다. 세계는 정반합의 과정을 거쳐 꾸준히 진화, 발전한다고 말하는 듯한 부분은, 내가 동의하기 힘든 점이다. (여기에 대해 확실한 내 주장이 있는 것은 아니고, 단지 어렴풋이 느끼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 달 뒤 나는 이 주장에 동의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악당이 슬쩍 살아나면서 후속편을 예고하는 영화처럼, 이 책 역시 후속편을 예고하고 있는 듯 하니, 20세기 초반 식민지 조선에서 대한민국 수립까지 이 ‘우승열패의 신화’는 어떻게 명맥을 지켜 오늘날까지 살아 숨쉬는지에 대한 심도있는 박노자의 후속작이 기대된다. (음? 안 써주려나?)
ps: 마지막 장에서는 한용운에 대한 애정이 구구절절이 묻어난다. 문득 저자가 불교신자라는 사실이 떠올라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박노자를 비롯한 몇몇 지식인이 진정 존경스러운 이유는, 언행일치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반성한다는 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