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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어 1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9
샬럿 브론테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평점 :
그 여자의 처녓적 이름은 버사 메이슨이었다. 결혼한 뒤에는 버사 로체스터가 됐지만 아마도 그녀의 본명은 버사 에어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그런 남자를 신랑감으로 선택하게 된 것은 참 안쓰러운 일이었다.
버사는 칠흑처럼 검은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내려트린 미인이었고 대농장주를 아버지로 둔 부자였다. 열정적이고 활달한 성격 또한 그녀의 매력 중 하나였다. 반면 그녀의 남편감으로 지목된 남자는 추남이란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로 외양이 못난데다 돈 한 푼 없는 가난뱅이였다. 성격은 괴팍했고 영국의 흐린 잿빛 안개처럼 음울했다.
하지만 남자는 영국의 유서깊은 집안의 차남이었고, 바로 그 이유로 버사의 부모는 그녀를 팔아치우듯 그 남자에게 거액의 지참금과 버사를 떠넘겼다.
당연히 둘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다.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주의적인 성격의 남자는 자유롭고 개방적인 버사를 감당하지 못했다. 부부는 서로를 경멸하고 두려워했으며 부부 사이는 마치 대서양을 사이에 둔 것처럼 낯설고 멀기만 했다.
결혼하고 4년이 지난 어느 날, 남편은 그녀에게서 밝고 화창한 서인도제도의 태양마저 빼앗아버렸다. 영국으로 데려가 시골 마을의 저택에 가둬버린 것이다.
그 즈음 남편은 버사와 결혼하던 때보다 더 큰 부자가 되어 있었다. 그의 형이 급사하는 바람에 유산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남자는 버사의 재산이 필요하지 않았고, 버사는 더더욱 필요하지 않았다.
남편은 버사를 가두어버린 채, 진정한 사랑과 구원을 찾겠다며 유럽 구석구석을 누볐고, 버사는 돈과 젊음, 미래를 모두 잃어버린 채 침울한 저택에서 하루종일을 보내야 했다.
그 즈음 영국의 다른 곳에서는 한 소녀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있었다. 눈도 뜨기 전 부모를 잃고 외숙모 손에 자란 소녀는, 한 기숙학교에 입학해 자립할 수 있는 수단을 막 터득하기 시작한 터였다.
그 동안 버사의 저택은 점점 침울한 곳이 되어 갔다.
남자가 버사를 이곳에 부려놓은 것처럼 거추장스러운 '자신의 여자'들을 저택에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남편을 잃고 의지가지없게 된 노인을 가정부로 들였고, 정부가 떠맡긴 딸아이를 처박아 놓았다. 남자가 한때 자신의 편의나 쾌락을 위해 취했지만 이제는 부담스러운 존재가 된 여자들이, 마치 철지난 가구처럼 저택에 쌓였다.
처음으로 남자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여자 - 기숙학교에 다녔던 소녀가 이곳에 왔을 때 버사는 자신의 반쪽을 만난듯한 기쁨을 느꼈다. 소녀의 강단있는 태도와 독립적인 자세, 분별력과 판단력이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소녀는 겉으로는 퀘이커 교도처럼 절제되고 금욕적인 모습을 취하고 있었으나 안으로는 자유와 희락을 향한 열정을 불태우고 있었다.
소녀가 남자에게 끌렸을 때 버사는 조금 골이 났다. 소녀가 그보다는 더 나은 남자를 만났으면 했기 때문이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남자는 버사와 결혼했을 때보다는 조금 더 현명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저 끝간데 없는 잘난척과 자부심, 여자를 소유하고 보호하려는 마초적인 태도는 여전히 꼴같잖았다. 무엇보다 그가 소녀에게 '해 줄 수 있다'고 뻐기는 돈과 부는 남자 본인의 능력으로 얻은 것이 아닌 버사가 그에게 준 것이었다!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소녀가 남자의 곁을 떠났을 때 버사는 한편으로는 안심했지만 한편으로는 소녀의 눈물로 가슴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 버사는 소녀가 행복해지길 바랐기 때문이다.
소녀가 저택을 떠나 또 다른 모험을 만나며 자신과 싸우고 있는 동안, 버사는 소녀를 위해 무언가 해주기로 결심했다.
어느 밤 버사는 감금된 방을 떠나 아랫층으로 살금살금 내려왔다. 버사는 촛불을 들어, 이제는 낡고 때가 탔으며 유행이 지난 커튼에 불을 붙였다. 바람이 좋은 밤이었다. 커튼에 붙은 불은 기세좋게 다른 곳으로 옮겨 붙었고, 곧 그 붉은 혀를 발록처럼 날름거리며 저택 곳곳을 핥아내렸다. 버사를 가두고 있던 곳, 남자의 여자들이 꼼짝없이 남자의 비위를 맞추며 붙들려 있어야 했던 곳, 버사의 육체와 정신의 구속복이었던 저택이 밝고 환한 빛을 내며 검게 무너져내렸다.
불길은 남자의 두 눈과 한쪽 팔도 먹어버렸다. 하늘 높은 줄 몰랐던 자신감도 바쳐야 했다. 마치 자신만이 소녀의 유일한 구원이자 의지처인 것처럼 굴었던 오만함도 녹아 내렸다.
남자는 이제 예전처럼 우쭐거리진 못할 것이다. 타인을 함부로 시험하고 평가하고 재보는 장난질도 치지 못할 것이다. 남자는 자신이 버사와 그의 가정부, 정부였던 프랑스의 무희, 그 무희가 낳은 딸, 그리고 이곳을 떠난 소녀보다 더 잘나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이제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버사는 가뿐한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타오르는 불길과 나풀거리는 재속에 몸을 누였다.
그리고 겸손하고 양순해진 남자를 소녀의 품으로 돌려보냈다.
버사 역시 소녀의 품안에서 평안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