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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그림자 (합본 특별판) ㅣ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잊혀진 책들의 묘지' 시리즈의 첫 작품 '바람의 그림자'를 읽다.
어쩌다 보니, 내가 읽은 스페인 현대 문학은 대부분 카탈루냐를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당연히 스페인 내전이 주제이자 소재다. 어쩌면 바르셀로나는 물론, 유럽 등지에서 스페인 내전을 주목하기 때문에 그런 책들이 유명세를 얻어 내 손에까지 들어오는 건지도 모르겠다. (읽은 책이 몇 권 안 되기 때문일 이유가 가장 클 것 같고.)
그리고 내가 읽은 이 스페인 현대 문학들이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바로 기억과 화해다.
바르셀로나-카탈루냐를 스페인 내전과 떼어 놓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나라의 80년대를 광주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일 게다. 그런데 바르셀로나의 스페인 내전은 우리나라 80년대의 광주보다는 60년대 제주 4.3과 좀 더 정서가 비슷해 보인다.
광주가 맞서 싸워야 할 외부의 적이 좀 더 분명하고 모두 그 비극을 알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바르셀로나는 내전을 망각하려 한다. 그것은 프랑코 독재 정권의 서슬이 퍼렇기 때문이 가장 큰 이유지만, 그 외에도 그 전쟁 자체가 그들의 육체는 물론 마음에도 깊은 상처를 입혔기 때문으로 보인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스페인 내전은 온갖 사상의 전시장으로 불렸다고 한다. 외부인들은 스페인 내전을 각자의 이상과 정의를 지키기 위해 전 세계의 이상가들이 몰려들어 연대했던 전쟁으로 어떻게 보면 꽤나 낭만적으로 기억하지만, 카탈루냐 사람들에게는 그 사상 만큼이나 온갖 부조리가 섞여 있고 혼란스럽던 사회가 그들의 삶이었다. 해방 직후 우리나라에서 삼삼오오 잘 지내(는 걸로 보였)던 마을 사람들이 갑자기 계급과 빈부에 따라 좌와 우와 갈려 서로 총부리를 겨누며 싸웠던 것처럼, 카탈루냐도 상대방을 찌른 칼이 내 폐부를 꿰뚫는 비극을 겪은 듯 하다.
'바람의 그림자'를 보면, 먼저 무산계급(다니엘 셈페레-훌리안 카락스) - 유산계급 (베아트리스 아길라르-페넬로페 알다야)의 갈등이 있다. 그리고 공화파(페르민)와 프랑코파(푸메로)의 대립이 있다. 무신론자(페르민)과 유신론자(베르나르다)의 반목이 있으며, 동성애자(돈 페데리코) 등 소수자에 대한 박해가 있다. 또 가부장제(이삭-포르투니)와 여권주의자들(누리아)이 있으며, 책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무정부주의와 공산주의의 갈등, 중앙정부(마드리드)와 지방 분권(카탈루냐)의 긴장도 있었다. 각종 모순이 중첩돼 있는 카탈루냐에서는 각자가 하나 이상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며, 기회주의자들은 푸메로처럼 한 노선에서 다른 노선으로 갈아타기도 쉬웠겠지만 그만큼 약삭빠르지 않거나 뻔뻔하지 않은 자들은 자기 내부의 모순에 괴로워했을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어떤 것이 정의였고 이상이었는지 혼탁해지면서 자신이 두른 갑옷조차 자신을 조이는 고문 기계가 되었을 것이고, 전쟁에서 지면서 제대로 된 결산조차 불가능했다.
결국 사람들은 망각을 택했다.
살아남은 자들은 계속 살아가야 하는 노릇이고 살기 위해서는 고통과 부끄러움을 묻어야 할 필요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망각은 도피일 뿐이지 해결책은 아니다. 잊혀진다는 것은 사라진다는 것이고, 지워진 과거 위에 세워진 현재는 불안정하고 결핍되어 있다. 삭제된 기억이 안겨주는 것은 안정감과 평화가 아니라 공허함과 무기력, 그리고 방향을 잃은 분노다.
주인공 다니엘 셈페레가 훌리안 카락스에 대한 자취를 찾아다니는 것은, 결국 잊어야 했고 잊고 싶었고 잊으려 했던 내전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는 일이다. 괜한 과거를 파헤쳐 또 하나의 상처를 주지 말라고 경고하는 이들이 적극적으로 다니엘을 말리지 못하는 것도 결국은 그들 역시 과거를 복원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파괴와 증오가 아닌 화해와 창조로 다시 자리하길 바란다. 그것이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며 반목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바르셀로나는 느끼는 듯 하다. 과거의 고통을 달래주는 것도, 극복할 힘을 주는 것도 결국은 화해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야기는 다니엘이 훌리안의 이야기를 찾아 다니는 내용으로 약간의 추리 소설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훌리안의 과거와 훌리안의 최신 버전인 다니엘의 현재를 오가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어 몰입하기 좋다. 다만 대부분의 수수께끼와 진실이 후반부 한 단락에서 다 풀어져서, 속시원하긴 한데 약간 아쉬운 느낌도 든다.
이 시리즈가 총 네 편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첫 번째 작품인 이 책에서 어느 정도 하고 싶은 얘기는 다 한 듯 하여 다른 시리즈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 지 기대 반 우려 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