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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1
로렌 와이스버거 지음, 서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어, 결국 영화로까지 제작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읽다.
언제나 그렇듯이 스포일러 만땅의 리뷰. 원치 않는 분은 보지 마시기를.
읽을 때부터 어차피 가볍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원했으므로, 내용에 별 불만은 없다. 마지막 부분을 제외한다면 목적에 꽤나 부합하는 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미 영화화되면서 널리 알려진 내용대로, 주인공 앤드리아 삭스는 대학을 갓 졸업한 사회 초년생이다. 저널리스트를 꿈꾸는 그녀에게 갑자기 들이닥친 첫 일자리는 패션지 '런웨의'의 편집자 미란다 프리스틀리의 어시스턴트. 이곳에서 1년간 일하며 미란다에게 능력을 인정받는다면 원하는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에 앤드리아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참고 견딜 것을 결심한다. 하지만 일은 만만치 않다. 핸드폰은 24시간 내내 풀가동되어야 하며, 까다로운데다 변덕스럽고 배려의 'ㅂ'자도 모르는 미란다의 비위를 거슬려서는 안 된다. 거기다 미란다가 요구하는 것들은 발간되지도 않은 해리포터의 책을 구해오거나 폭풍우를 뚫고 달려올 비행기의 수배 등 미션 임파서블에 가까운 것들이다. 미란다의 완벽한 생활을 위해 자기 생활을 통째로 내다바쳐야 하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남자친구 알렉스와의 사이는 삐꺽거리고 알콜에 중독돼가는 친구 릴리를 돌볼 시간도 없다. 갖은 고난을 뚫고 1년이 다 되어가는 어느 날, 미란다는 앤드리아의 능력을 인정하며 원하는 일자리를 묻는다. 하지만 바로 같은 시간, 친구 릴리는 교통사고로 사경을 헤매고 있고, 가족과 남자친구는 앤드리아가 당장 달려오기를 바란다. 선택의 기로에 선 앤드리아는 결국 미란다에게 폭언을 퍼붓고 눈앞에 있는, 꿈꾸던 '뉴요커'의 기자 자리를 박차버린 뒤, 친구의 곁으로 달려온다. 당연히 실직. 그리고 이 부분이 문제다. 야망과 성공을 위해 친구와 가족을 저버리면 안된다는 개똥같은 교훈을 마음속에 고이 간직한 앤드리아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쓰고, 그 소설이 잡지에 실리면서 자유기고가로서의 미래를 열게 된다.
이런 식으로 말하고 싶진 않지만, '미국애들은 이래서 안돼'라고 말하고 싶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결국은 소설로서 글솜씨를 인정받아 다시 창창한 미래가 열린다니. 게다가 청년 실업자 100만명의 한국 사회를 살고 있는 나로서는 주인공 앤드리아가 겪는 고생이 별 고생일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1년 죽도록 고생하고 원하는 자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면 누구라도 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대부분의 직장인들, 저 정도 고생은 다 하고 살지 않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늘어놓는 상사, 갑자기 말을 바꾸는 상사, 일이 잘못된 책임을 나에게 넘겨버리는 상사는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아도 될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급은 쥐꼬리만하지, 비전도 없지, 보람도 없지. 뭐 투정은 이 정도로 해 두자. 다만 저 발랄한 상상력을 가득 담고 있는 소설의 주인공이, 결국 일자리도 못 찾고 잡지계엔 발을 들여놓지도 못해 몇 해째 백수로 또는 적은 월급에 비전없는 회사를 다니면서,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했다고 한숨쉬고, 가족과 친구들 역시 그때 말리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하는 그런 결말이 좀 더 현실적일 것이라는 점은 확실히 해 두고 싶다. 그리고 또한 작가의 치기도 코웃음 나오는 대목이다. 예를 들어 친구 릴리는 러시아 문학을 너무 사랑한다거나, 남자친구 알렉스는 빈민지역의 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려는 사회개혁가라는 것들이 그렇다. 작가는 '의식있는 젊은이' 앤드리아가, 자본주의의 꽃과 같은 패션계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접하게 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불합리함과 허영, 속물기질같은 것들을 빈정대고 싶었던 모양인데, 그러한 시도에 대해서는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가 찢어지는 법이니, 관두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이 소설은 리얼리즘을 표방하고 있지도 않거니와, 달콤함과는 거리가 먼 인생과 삶을 그리려는 소설도 아니므로, 이런 것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작가에게는 부당한 일일 게다. 소설은 나름대로 유쾌하고 재밌고 위트있다. 가독성은 말할 것도 없다. 다만 소설 내용의 2/3가 앤드리아가 미란다의 미션을 수행하는 것들로 반복되고 있어 다소 지루한 감이 있다. 이 소설이 인기를 끈 이유는 두 가지로 보인다. 하나는 회사일에 지친 직장인들이 앤드리아의 산전 수전 공중전을 보면서 위안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직장 상사는 저것보단 나아, 그래도 내 팔자가 차라리 낫네-식으로, 아침 주부 대상 프로그램을 보면서 위로를 받는 가정주부의 심정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대리만족이다. 앤드리아가 다니는 회사는 패션과 부, 그리고 명성의 상징이다. 미란다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휘감고 다니며, 크리스마스마다 세계 각지의 명사들에게 선물을 받는다. 회사에는 베르사체, 프라다, 안나 수이, 구찌 등 화려한 물건들로 도배가 돼 있고, 회사 관계 파티에 가면 이름만 듣던 헐리우드의 유명 배우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화려한 직장에서 일하는 앤드리아는 그 주변 환경만으로도 일단 부러움의 대상이다. 독자들은, 앤드리아를 통해 말만 들었던 패션계의 화려함을 자기 눈으로 보듯 읽을 수 있다. 또한 앤드리아 역시 화려한 명품으로 치감고 다닌다. 파리의 패션쇼에 가기 위해 화장하고 차려입는 앤드리아는, 어느 날 갑자기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예쁜 아가씨로 변신하는 신데렐라를 연상시킨다. 신데렐라의 꿈은, 모든 여성들에게 유전자처럼 각인돼 있다는 점에서(크고 작고의 차이는 있겠지만), 앤드리아의 색다른 경험은 흥미있게 다가온다. 게다가 앤드리아는 자신의 의지로 화려한 파티장을 박차고 나오는 21세기 여성형의 당당함까지 가지고 있으니, 21세기 신데렐라 판타지로 이해해도 큰 무리는 없겠다. 따라서 굳이 별점을 매긴다면 2개까지 줄 수 있을 듯. 마지막 소설로 성공하는 부분만 없었다면 세 개까지도 줬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