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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립학교 아이들
커티스 시튼펠드 지음, 이진 옮김 / 김영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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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를 흔히 질풍노도의 시기라고들 한다.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를 나름대로 파악하고, 그리고 자신을 그 안에 어떻게 위치지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시기. 물론 내 주변 사람들에게도 그에 맞는 역할을 하나씩 나눠주게 된다. 그런데 아직 경험이 적고 삶에 대해 아는 게 적은 이 나이에는 나도, 사회도 그리고 주변 사람들도 다분히 도식적으로 위치지우게 된다. 선과 악, 부와 빈, 정의와 불의. 이러한 도식적이고 유치한 구분은 당연히 부작용을 불러온다. 나와 사회의 다면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한 가지 면(보통의 경우 자신이 보고 싶은 면)에만 집중한다. 친구의 사소한 이기심에 심한 배신감을 느끼기도 하고, 자신의 나약함에 한없는 자기혐오를 느끼기도 한다. 또 다른 부작용은 사람들과 나를 위치짓는 방법이다. 서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적은 사람들이,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해나갈까. 대부분의 경우 사회가 부과하는 몇 가지 선택기준, 또는 내가 정한 몇 가지 준거기준에 의해 상하로 나눠지는 권력관계를 형성한다. 누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가- 돈이 많은가, 성적이 좋은가, 리더쉽이 있는가, 또는 외모가 출중한가. 사회가 부과하는 몇 가지 선택기준들에 따라 사람들은 서로를 평가하고 서열지어 구분한다. 또한 나만 그런 위계질서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 역시 나를 마찬가지의 기준으로 구분하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한 나의 평가와 나에 대한 상대방의 평가가 어긋날 때 미묘한 갈등이 발생한다. 미숙한 아이들이 만드는 권력질서, 그 속에 자신의 자리를 제대로 잡지 못한다는 것은 사춘기 아이들에게 영원한 숙제며 고민이다. 이 시기 고민의 대부분이 대인관계에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주인공 리 피오라의 갈등 역시 이 사이에서 발생한다. 학구심 넘치고 재기발랄한 소녀 리. 어느 날 한 명문 사립학교의 팜플렛을 보고 이곳이 자신이 있어야 할 곳, 또한 자신을 피어나게 할 곳으로 선택한다. 평화롭지만 작고 즐겁지만 사소한 자신의 고향은, 자의식 강하고 야심찬 소녀 리에게는 답답하고 뒤떨어진 곳으로만 느껴진다. 리가 원한 것은, 이 학교가 가지고 있는 '명문'이란 타이틀에서 나오는, 한층 더 높은 세계이다. 하지만 그곳에 가는 순간, 리는 자신이 그 곳에서 발휘할 수 있는 힘이 아무것도 없으며, 그나마 가지고 있던 힘도 보잘 것 없는 것이고, 그래서 이 곳에 영원히 속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돈, 외모, 인기 그런 것들이 얼마나 속물적이고 한시적인 것인지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이미 그런 것이 힘을 발휘하게끔 만들어놓은 사회에 리가 대항할수 있는 힘은 미약하다. 게다가 리가 원한 것 역시 그런 힘을 바탕에 깔고 어떤 카리스마를 발생하는 인간이 되는 것 아니었던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리는 가난하고 외모도 뛰어나지 않고 그냥그런 평범한 학생일 뿐이다. 물론 성인이 된 뒤에는 깨닫는다. 꼭 사람들의 선망이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모든 면에서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것. 따라서 최고의 자리라고 해서 최고의 자리만은 아니라는 것. 하지만 모든 것이 미숙하기만 한 사춘기 시절에는 그 당연한 진리가, 사람과 사회의 다면성이 통용되지 않는다.

여기서 리가 할 수 있는 몇 가지 선택이 있다. 하나는 같은 방을 쓰는 학우 디드처럼 중심에 있는 자들에게 접근해 그들의 권력을 나눠받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호밀밭의 파수꾼’에 나오는 콜든처럼 이 우스꽝스러운 권력관계를 비웃고 전복하는 것이다. 하지만 리는 두 가지 방법 다 택하지 않는다. 이 학교를 선택하고, 이 학교가 가지고 있는 권력을 탐한 것은 다름아닌 리 자신이기에 후자의 방법은 리에게 맞지 않는다. 하지만 전자의 방법 역시 자존심 강한 리에게는 굴욕이다. 리가 택하는 것은, 조용히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누군가의 주목을 받고 싶지만 주목받는 것이 두려운’마음을 계속 간직한 채, 원래의 자신을 망가뜨리지 않을 수 있도록 최대한 보호망속에 넣으며, 처음에 자신을 매혹했던 이 학교의 매력을 현실이 아닌 빛바랜 앨범속에서만 찾는 것. 그것이 리가 택한 방법이다. 덕분에 리는 졸업할 때쯤 신문기자에게 이 학교의 어떤 진실을 까발릴 정도로 자신을 잃지 않는 것은 성공하지만, 자신에게 열려 있었던 다른 가능성들을 놓치고 만다. 몇몇 선배와 나눌 수 있었던 인간적인 교류를 놓치고, 연대할 수 있었을 몇몇 친구들 역시 놓친다. 자신이 가질 수도 있었을 어떤 기회들이 눈앞에서 날아가버리지만, 자의식만 강하고 아직 세상 경험이 적은 리는 어떤 식으로 자신을 오픈해야 하는지 감을 잡지 못해 아쉬움이 가득한 눈으로 그것을 지켜볼 뿐이다. 그리고 아마도 자신이 원했던 이 학교의 정점-크리스-을 손에 넣었다고 생각한 순간, 그녀의 이발 작업이 그랬듯이 상대방에게 약간의 호기심과 편리만을 안겨주고 비참한 결말을 맞고 만다.

 

자의식이 강한 이들에게, 머릿속에 꿈꾸는 자신의 이상적인 모습과 그것을 방해하는 사회, 그리고 그만큼 따라주지 않는 자신 세 가지가 충돌하는 사춘기 시절은 끝없는 비참함과 우울함만을 안겨준다. 나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크기에 상황에 대처하는 적응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리처럼 상황이 급작스레 바뀌는 경우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좀 더 성인이 돼서 돌아보면, 사춘기 시절은 아쉬운 것 투성이다. 내 고집 때문에 또는 내 미숙함 때문에 놓친 것들은 얼마나 많은가. 그게 사람이든 꿈이든 어떤 기회였든 간에.

하지만 소설은 여기까지다. 한 자의식 강한 소녀의 사춘기를 다큐멘터리 식으로 그려낸 소설은, 주인공 리를 변호하지도 않고 포장하지도 않으면서, 그녀의 생활과 감정, 생각하고 있는 바를 날 것 그대로 생생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소설의 가장 마지막 부분, ‘성인’이 된 리를 볼 때, 고등학교 시절이 그녀에게 우울하고 다소 비참했던 기억외에 무엇을 남겨줬는지 알 길이 없다. 가장 친했던 친구 마사는 1년에 한 두 번 볼까말까하고, 남자친구이자 첫 사랑이었던 크리스와는 교류조차 없다. 성인이 된 리에게서 고등학교 시절의 흔적을 찾아보긴 힘들다. 그 일이 그녀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그녀의 성장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독자는, 그리고 아마 그녀 자신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단지 리가 앨범을 넘기듯 자신의 당시 이야기를 담담하게 해 나가는데 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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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나의 도시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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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현의 ‘달콤한 나의 도시’를 읽다.

 

20대 후반 그리고 30대 초반의 비혼 여성 이야기는 몇 년전부터 꾸준히 인기를 끌면서 이제는 거의 흥행보증 수표가 되어 버렸다. 시트콤의 고전 '섹스 & 더 시티'를 시작으로 '브리짓 존스의 일기'. '싱글즈'.'걸혼하고 싶은 여자','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여우야 뭐하니'까지.

 

결혼적령기를 이미 지났으나 여전히 결혼이 멀고 두렵게, 또는 어렵게 느껴지는 이들의 이야기는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면서 점점 큰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이들의 고민은 결혼에 집중되어 있는 것 같아 보이나, 사실은 꿈과 현실 사이에서 아직 방향을 정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여자의 신분(?!)으로 4년제 대학을 나와, 자기 한 몸 먹여살리기엔 나름대로 충분한 직장을 가지고 있는 여성들이 서른해를 살아오면서 어떤 꿈을 키워 왔으리라는 점은 당연하다. 그것이 멋진 영화 한 편을 찍겠다거나 소설가로 이름을 날리겠다는 식의 다분히 비사회적이고 낭만적인 꿈이건, 또는 성공가도를 달리는 커리어 우면이 되겠다는 현실적이고 속물적인 꿈이든 간에, 어쨌거나 4년제 대학에 진학할 때, 집에서 살림이나 하면서 그냥저냥 살겠노라 다짐한 여성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물이 어느 정도 들면서 어떤 꿈도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성공한 커리어 우먼은 커녕 오늘 당장 자리지키기에 급급하고, 낭만적인 꿈을 쫓자니 배곪는 것도 싫고 그만한 열정이나 천재성도 없다. 그리하여 아직 풋풋하고 꿈을 쫓고 있는 연하의 남자친구 윤태오는 사랑스럽고 가슴을 설레게 하지만 대신 막막하고 불안하며 때론 한심하기까지 한 미래이다. 

 

그 어떤 꿈도 현실화시키기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이 비혼 여성들은 '전업주부'로 도피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아등바등 직장생활하는 것도 지치고, 이제와서 딱히 다른 꿈을 꾸어보겠다는 열정도 없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생활이, 내가 꾸던 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사람은 한없이 피곤함을 느낀다. 그래서 현실에 안주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전업주부-결혼이란 현실 역시 만만한 것은 아니다. 결혼과정부터 답이 보이지 않는 갈등을 겪고, 심하게는 첫번째 결혼기념일을 맞기도 전에 이혼서류를 작성하게 된다. 또는 참고 산다해도, 자식들이 모두 자라 새 가정을 얻을 30년을 살을 섞고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에게 등을 돌리고 다른 삶을 꿈꾸게 된다. 주인공 오은수의 친구 재인처럼, 또는 은수의 어머니처럼. 따라서 설레임은 없지만 옆에 있으면 편안하고, 내 사정을 꼬치꼬치 캐묻지 않으면서도 내 갑작스런 결정들을 말없이 지켜보면서 힘이 되어주는 남편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다. 오은수가 결혼하기로 결심했던, 평범의 결정체같은 남자 김영수가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던 것처럼.

 

꿈을 쫓는다는 모험을 하기에는 꿈도 용기도 없고, 평범한 삶도 결국은 허상이란 것을 깨달은 뒤 은수가 가야할 길은, 그냥 삶을 생활 자체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물론 그것은 정답도 아니고 은수 자신은 물론 독자들을 만족시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산다는 것의 정체일게다. 정답도 아니고 만족스럽지도 않다. 아무리 두 팔 벌려 사랑하려 해도. 우리를 계속 속이고 배신하는 것이 삶이고, 노여움을 잊고 다시 한 번 지치지도 않고 삶에 구애하는 것, 그게 우리다.

 

소설은 결혼적령기를 넘긴 비혼 여성들의 불안함을 전형적으로 그려낸다. 소재와 주제가 전형적인 것 만큼이나 전형적인 등장인물들과 전형적인 사건들, 심지어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려 한 듯한 오은수의 독백마저 전형적이다. 이제 비혼 여성들의 결혼에 대한 갈등은 넘칠 정도로 이야기됐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가 될 때가 됐다는 깨달음을 주는 것이 이 소설의 역할인 듯 하다.

 

결론을 말하자면, 빨리 읽히되 새롭지 않고, 나름대로 재미있되 생각할 거리를 주진 않는다. 정이현은 뭐가 잘 팔리는지 만큼은 확실하게 알고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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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결혼했다 - 2006년 제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이당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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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욱의 '아내가 결혼했다'를 읽다.

주인공은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녀는 일대일로 이루어지는 배타적인 연애관계를 지양하는 인물. 주인공은 아내를 독점할 수 있는 방법으로 결혼을 택하고, 여자는 모든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전제하에 결혼을 수용한다. 하지만 결혼은 아내와의 안정된 관계를 만들어주기는 커녕 더 복잡한 상황으로 끌고 간다.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됐다는 아내는 중혼을 고집하고, 결국 아내를 잃는 것보단 절반이라도 얻는게 낫다고 판단한 주인공은 아내의 또 다른 결혼을 허용한다. 아내는, 아버지가 누군지 알 수 없는 딸아이를 출산하고, 주인공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아이의 존재와 함께 아내의 또 다른 남편에게도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된다.

소설은 일부일처제라는 상당히 굳건하게 뿌리내린 제도의 허위와 가식을, 주인공이 아내에 대한 사랑 때문에 아내의 일탈을 조금씩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폭로하고 있다. 가치의 전복자인 아내는, 단순한 바람둥이나 행실 나쁜 팜므파탈이 아니라, 다처다부제, 아니 결혼 제도를 넘어서 여러 명의 뜻맞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행복을 추구하는 집단이 가족이라는 나름대로의 철학을 실천적으로 옮기는 '의식있는 여성'으로 그려진다. 나름대로 진지한 사회과학적이고 인문학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매 장의 말미마다 이야기 줄거리와 연관되는(이라기보다는 억지로 연관시키는) 축구 이야기를 끌어들이면서 가독성을 높이고 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아내의 결혼'은 소설에 큰 구멍을 낳고 있다. 문제는 등장인물들의 갈등이 모두 '아내의 결혼'에만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결혼이란, 모두 알고 있듯이 집안과 집안의 결합이다. 사랑하는 두 남녀의 결합이라는 설명이, 결혼의 본질을 은폐하고 있는 환상이란 점은 대부분 알고 있는 사실이다. 여기서 특히 여성은 하나의 물건으로 취급된다. 식장에서 아버지가 딸의 손을 남편에게 건네주는 의식은 딸-여성의 위치와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순간 여성은 다른 집안의 일원이 되며, 다른 집안의 모든 가사 노동을 전담하는 역할을 맡는다. 유교적 규범이 자리잡기 전의 과거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현재 우리나라에서 여성이 결혼을 꺼리거나 달가워하지 않는 이유는, 사실 70% 이상이 '시댁'과 관련된다. 거역하기 힘든 상사가 줄줄이 있고, '내 방식'이라는 것이 허용되지 않으며 대신 다른 사람의 방식을 전면 수용해야 하고, 월급이나 직급이 나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고, 모든 잡일들을 다 떠맡아야 하는 회사에 고용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노동자를 얻기 위해 남자측은 결혼을 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이 모든 여성의 노동과 고통은 '가족'과 '사랑'이라는 몇 가지 지리멸렬한 단어들로 감추어진다. 일부일처제나 그런 식의 결혼 제도가 문제가 되는 진짜 이유는, 여러 사람을 동시 다발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막기 때문이 아니라, 여성(또는 다른 사회적 약자)의 희생을 강요하는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는 동시에 은폐하기 위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내가 결혼했다'의 인아는 어떤가. 인아는 단지 두 명의 남편을 거느리기를 원한다는 것을 제외하곤 전혀 전복적이지도 않고 반사회적이지도 않다. 인아는 낮에는 요조숙녀, 밤에는 요부라는, 남성들의 환타지를 완벽하게 채워준다. 그녀는 잠자리에서는 적극적인데다 환상적이고, 집안일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데다, 직장일까지 완벽하게 해내는 슈퍼우먼이다. 그녀에 대한 첫 설명을 보자. 외모가 50점에 불과한 그녀가 주인공에게 호감을 얻는 것은 사소하고 자질구레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 성격 때문이다. (직장내 대부분의 여성, 그리고 비정규직은 자잘하고 사소한 요구를 모두 들어줘야 하는 위치에 있다.) 인아와 주인공이 사귀게 됐을 때, 주인공은 자신은 정리를 모르고 사는 반면, 인아는 정리와 청소가 취미라고 말한다. 여성이 정리 정돈을 잘하고 깔끔한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남성들의 가장 큰 착각 중 하나다. 대부분의 여성이 어렸을 때부터 집안일을 자신의 역할로 강요받았고, 자신의 몸과 주변은 물론, 남자 형제의 방까지 치워줘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에 청소를 '잘' 할 뿐이지, 여성의 유전자에 정리정돈과 청소를 좋아하는 요소가 들어있을 확률은 남성 유전자에 있을 확률과 비슷하다. 주인공과 결혼을 한 인아는, 주중에 경주까지 내려가서 직장을 다님에도 불구하고 주말에는 반드시 서울까지 올라와 각종 청소와 요리를 하고 밑반찬도 만드는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두집 살림을 하게 됐을 때도, 여전히 집안살림을 완벽하게 하는 동시에, 명절 및 제사때가 되면 양쪽 시댁에 도착하자마자 부엌일을 하고 시댁 식구들에게는 싹싹하게 구는, 완벽한 며느리 역할을 해 낸다. 결혼제도가 여성에게 강요하는 모든 희생을, 희생이라든가 착취라는 의식조차 없는 이 아가씨가, 남편 둘 거느렸다해서 무슨 문제가 있겠나. 오히려 여자가 남자에 비해 현저히 모자라는 21세기가 요구하는 며느리 및 아내의 역할모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하다.

이 소설의 두번째 구멍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부딪칠 수 밖에 없는 여러가지 문제들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주인공은 인아가 다른 남자들도 사랑한다는 점 외에는 어떤 것에도 불만을 갖지 않는다. 자신의 생활 역시 회사에서 잘리는 것도 아니고 어머니 및 형제들이 경제적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 문제도 없다. 물론 일처일부제의 문제에만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갈등요소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일수도 있지만, 그 점 때문에 이 소설은 오히려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주인공이 사회적 규범을 어기면서까지 인아를 사랑하는 이유 역시, 인아가 밤일과 집안일 모두 잘하는 슈퍼우먼이라는 점 밖에 없으며, 인아 역시 모든 남자들의 이상형이라는 것 외에는 인격이 없어 보인다. 즉 모두가 사랑할만한 완벽한 여자와 그 여자에게 순정을 바치는 남자라는 도식적인 등장인물만이 나오기 때문에, 이 소설은 현실에 발붙이고 사는 인간들에게서 나오는 생명력을 얻지 못했다. 엄연히 현실에 존재하는 일처일부제라는 제도를 깨기 위한 소설이 현실적이지 못하다면 설득력은 당연히 떨어진다.

또한 소설 말미에 붙는 축구얘기들은 재미있다는 점은 확실하지만, 소설의 내용과 억지로 이어붙이고 있다는 느낌도 제법 준다. 때로는 나야말로 주인공처럼 '그래서 어쩌라고?'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아마도 가장 큰 문제는 이 소설이 문학작품 수상작이라는 점일 것이다. 소설 자체는 큰 문제는 없다. 가독성도 있고 주제를 풀어나가는데 설득력도 있다. 문체도 안정적이다. 하지만 결혼제도, 근대 들어와서 정상적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는 일부일처제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 것은 이미 10년도 더 지난 일이다. 그런데 여전히 그런 문제가 신선하고 전복적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기존 문단의 보수성과 경직성은 한심하게 느껴진다. 진정으로 전복적이고 신선한 소설은, 어쩌면 보수적인 문단에 의해 묻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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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1
로렌 와이스버거 지음, 서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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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어, 결국 영화로까지 제작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읽다.

언제나 그렇듯이 스포일러 만땅의 리뷰. 원치 않는 분은 보지 마시기를.

읽을 때부터 어차피 가볍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원했으므로, 내용에 별 불만은 없다. 마지막 부분을 제외한다면 목적에 꽤나 부합하는 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미 영화화되면서 널리 알려진 내용대로, 주인공 앤드리아 삭스는 대학을 갓 졸업한 사회 초년생이다. 저널리스트를 꿈꾸는 그녀에게 갑자기 들이닥친 첫 일자리는 패션지 '런웨의'의 편집자 미란다 프리스틀리의 어시스턴트. 이곳에서 1년간 일하며 미란다에게 능력을 인정받는다면 원하는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에 앤드리아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참고 견딜 것을 결심한다. 하지만 일은 만만치 않다. 핸드폰은 24시간 내내 풀가동되어야 하며, 까다로운데다 변덕스럽고 배려의 'ㅂ'자도 모르는 미란다의 비위를 거슬려서는 안 된다. 거기다 미란다가 요구하는 것들은 발간되지도 않은 해리포터의 책을 구해오거나 폭풍우를 뚫고 달려올 비행기의 수배 등 미션 임파서블에 가까운 것들이다. 미란다의 완벽한 생활을 위해 자기 생활을 통째로 내다바쳐야 하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남자친구 알렉스와의 사이는 삐꺽거리고 알콜에 중독돼가는 친구 릴리를 돌볼 시간도 없다. 갖은 고난을 뚫고 1년이 다 되어가는 어느 날, 미란다는 앤드리아의 능력을 인정하며 원하는 일자리를 묻는다. 하지만 바로 같은 시간, 친구 릴리는 교통사고로 사경을 헤매고 있고, 가족과 남자친구는 앤드리아가 당장 달려오기를 바란다. 선택의 기로에 선 앤드리아는 결국 미란다에게 폭언을 퍼붓고 눈앞에 있는, 꿈꾸던 '뉴요커'의 기자 자리를 박차버린 뒤, 친구의 곁으로 달려온다. 당연히 실직. 그리고 이 부분이 문제다. 야망과 성공을 위해 친구와 가족을 저버리면 안된다는 개똥같은 교훈을 마음속에 고이 간직한 앤드리아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쓰고, 그 소설이 잡지에 실리면서 자유기고가로서의 미래를 열게 된다.

이런 식으로 말하고 싶진 않지만, '미국애들은 이래서 안돼'라고 말하고 싶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결국은 소설로서 글솜씨를 인정받아 다시 창창한 미래가 열린다니. 게다가 청년 실업자 100만명의 한국 사회를 살고 있는 나로서는 주인공 앤드리아가 겪는 고생이 별 고생일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1년 죽도록 고생하고 원하는 자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면 누구라도 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대부분의 직장인들, 저 정도 고생은 다 하고 살지 않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늘어놓는 상사, 갑자기 말을 바꾸는 상사, 일이 잘못된 책임을 나에게 넘겨버리는 상사는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아도 될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급은 쥐꼬리만하지, 비전도 없지, 보람도 없지. 뭐 투정은 이 정도로 해 두자. 다만 저 발랄한 상상력을 가득 담고 있는 소설의 주인공이, 결국 일자리도 못 찾고 잡지계엔 발을 들여놓지도 못해 몇 해째 백수로 또는 적은 월급에 비전없는 회사를 다니면서,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했다고 한숨쉬고, 가족과 친구들 역시 그때 말리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하는 그런 결말이 좀 더 현실적일 것이라는 점은 확실히 해 두고 싶다. 그리고 또한 작가의 치기도 코웃음 나오는 대목이다. 예를 들어 친구 릴리는 러시아 문학을 너무 사랑한다거나, 남자친구 알렉스는 빈민지역의 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려는 사회개혁가라는 것들이 그렇다. 작가는 '의식있는 젊은이' 앤드리아가, 자본주의의 꽃과 같은 패션계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접하게 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불합리함과 허영, 속물기질같은 것들을 빈정대고 싶었던 모양인데, 그러한 시도에 대해서는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가 찢어지는 법이니, 관두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이 소설은 리얼리즘을 표방하고 있지도 않거니와, 달콤함과는 거리가 먼 인생과 삶을 그리려는 소설도 아니므로, 이런 것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작가에게는 부당한 일일 게다. 소설은 나름대로 유쾌하고 재밌고 위트있다. 가독성은 말할 것도 없다. 다만 소설 내용의 2/3가 앤드리아가 미란다의 미션을 수행하는 것들로 반복되고 있어 다소 지루한 감이 있다. 이 소설이 인기를 끈 이유는 두 가지로 보인다. 하나는 회사일에 지친 직장인들이 앤드리아의 산전 수전 공중전을 보면서 위안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직장 상사는 저것보단 나아, 그래도 내 팔자가 차라리 낫네-식으로, 아침 주부 대상 프로그램을 보면서 위로를 받는 가정주부의 심정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대리만족이다. 앤드리아가 다니는 회사는 패션과 부, 그리고 명성의 상징이다. 미란다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휘감고 다니며, 크리스마스마다 세계 각지의 명사들에게 선물을 받는다. 회사에는 베르사체, 프라다, 안나 수이, 구찌 등 화려한 물건들로 도배가 돼 있고, 회사 관계 파티에 가면 이름만 듣던 헐리우드의 유명 배우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화려한 직장에서 일하는 앤드리아는 그 주변 환경만으로도 일단 부러움의 대상이다. 독자들은, 앤드리아를 통해 말만 들었던 패션계의 화려함을 자기 눈으로 보듯 읽을 수 있다. 또한 앤드리아 역시 화려한 명품으로 치감고 다닌다. 파리의 패션쇼에 가기 위해 화장하고 차려입는 앤드리아는, 어느 날 갑자기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예쁜 아가씨로 변신하는 신데렐라를 연상시킨다. 신데렐라의 꿈은, 모든 여성들에게 유전자처럼 각인돼 있다는 점에서(크고 작고의 차이는 있겠지만), 앤드리아의 색다른 경험은 흥미있게 다가온다. 게다가 앤드리아는 자신의 의지로 화려한 파티장을 박차고 나오는 21세기 여성형의 당당함까지 가지고 있으니, 21세기 신데렐라 판타지로 이해해도 큰 무리는 없겠다. 따라서 굳이 별점을 매긴다면 2개까지 줄 수 있을 듯. 마지막 소설로 성공하는 부분만 없었다면 세 개까지도 줬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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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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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의 첫 소설집 "카스테라"를 읽다.

2003년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으로 한겨레 문학상을, "지구영웅전설"로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한 "기대받는 유망주" 박민규의 첫 단편집에는 표제작 "카스테라"를 포함하여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갑을고시원 체류기"등 박민규의 재치발랄한 유머와 기발한 상상력을 엿볼 수 있는 10편의 단편들이 실려있다.

박민규의 소설은 기존 소설과 몇 가지 점에서 차이점이 있다.  먼저, 10편의 소설은 전부 "나"라는 화자가 이야기하는 1인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몇개의 문장마다 단락이 구분되어지며, 때로는 문장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단락이 구분되거나 행이 바뀐다. 이야기 자체도 짜임새 있는 줄거리를 가진다기 보다는 화자의 생각이나 느낌, 근래 있었던 일상을 읊조리는 편이며, 등장인물은 입체적인 캐릭터를 보여준다기 보다는, 말 그대로 화자의 주변인물로 화자와의 접촉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소설 한 편을 읽는다기보다는 재미있는 블로그를 읽어내려가는 느낌을 주며(엔터키의 사용은 이야기의 분위기를 바꿀때는 물론, 읽는 이에게 감정의 호흡을 조절할 필요가 있을 때 등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통신체이다.) 따라서 박민규의 소설은 인터넷에 익숙한 요즘 독자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며 화자의 이야기에 좀 더 쉽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게 한다. 사실 이런 식의 글쓰기는 하루키 이후 낯선 것은 아니지만, 박민규의 경우 엔터키를 사용한 통신체로 이러한 글쓰기를 좀 더 발전시켰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박민규의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형식적인 것보다는 그 내용에 있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 보여줬던 일류가 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은 이 소설집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박민규는 이 무한경쟁 사회에서 패배한 자들에 대한 연민을 쏟아낸다.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 즐거움을 등지고 험한 사회에 첫발을 내딛은 사회 초년생에게도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최저임금제에도 못 미치는 시간당 페이를 받으며 하루하루를 간신히 넘기는 알바생에게도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처음 본 타인에게 갑자기 헤드락을 걸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하고 비겁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 당한 폭력을 똑같이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행하는 한 월급쟁이에게도(헤드락), 자신의 신체를 억압하면서까지 한치 발뻗을 공간을 지켜내야만 했던 고학생에게도(갑을고시원 체류기), 박민규의 시선은 따뜻하기 그지없다. 그것은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고 약속한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사기극에 휘말려버린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며 애정이다. 내가 못나서 이것밖에 못산다고 한탄하는 자에게도, 이 개같은 사회가 문제라고 악을 쓰는 자에게도, 박민규는 당신들이 잘못돼서 그런게 아니라고, 당신들이 나쁘거나 못난게 아니라고 감싸안아준다. 현 사회구조속에서 우리는 아무리 애를 써도 패배할 수 밖에 없게 되어 있고, 당장의 생계를 위해서 꿈을 그리고 진정한 즐거움과 신념을 포기할 수 밖에 없게 되어 있다고. 이것이 우리가 갇혀버린 세계이며 우리가 넘어야 할 세계인 것이다.

성공하기 위한 8가지 습관을 몸에 익히고, 아침형 인간이 되라고 강요받는 현대인들에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무한경쟁의 사회에서 언제나 패배하는 사람들에게 박민규의 위로는 한없이 고맙다. 어린 시절 꿈꾸었던 대왕오징어에 대한 로망을 잊고 죄없는 상대방에게 헤드락을 걸어대며 살기위해 발버둥쳤음에도 불구하고 하루 일당 얼마 하루 밥값 얼마 등 가난한 산수밖에 못하다가 결국 오리배를 타고 좁고 낡은 갑을고시원에 돌아온 소시민들을, 박민규는 카스테라를 음미하듯 따뜻한 입속에 품어준다. 소설속에서처럼 뒤를 돌아보며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라고 말하고 싶어지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단지 그뿐이라는 점에서, 그 지점에서 멈추고 더 이상은 나기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박민규의 미덕이자 한계라고 할 수 있다.

박민규가 등단한 것이 겨우 2003년이니, 앞으로 그의 한 발 더 나아간 모습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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