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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립학교 아이들
커티스 시튼펠드 지음, 이진 옮김 / 김영사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사춘기를 흔히 질풍노도의 시기라고들 한다.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를 나름대로 파악하고, 그리고 자신을 그 안에 어떻게 위치지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시기. 물론 내 주변 사람들에게도 그에 맞는 역할을 하나씩 나눠주게 된다. 그런데 아직 경험이 적고 삶에 대해 아는 게 적은 이 나이에는 나도, 사회도 그리고 주변 사람들도 다분히 도식적으로 위치지우게 된다. 선과 악, 부와 빈, 정의와 불의. 이러한 도식적이고 유치한 구분은 당연히 부작용을 불러온다. 나와 사회의 다면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한 가지 면(보통의 경우 자신이 보고 싶은 면)에만 집중한다. 친구의 사소한 이기심에 심한 배신감을 느끼기도 하고, 자신의 나약함에 한없는 자기혐오를 느끼기도 한다. 또 다른 부작용은 사람들과 나를 위치짓는 방법이다. 서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적은 사람들이,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해나갈까. 대부분의 경우 사회가 부과하는 몇 가지 선택기준, 또는 내가 정한 몇 가지 준거기준에 의해 상하로 나눠지는 권력관계를 형성한다. 누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가- 돈이 많은가, 성적이 좋은가, 리더쉽이 있는가, 또는 외모가 출중한가. 사회가 부과하는 몇 가지 선택기준들에 따라 사람들은 서로를 평가하고 서열지어 구분한다. 또한 나만 그런 위계질서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 역시 나를 마찬가지의 기준으로 구분하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한 나의 평가와 나에 대한 상대방의 평가가 어긋날 때 미묘한 갈등이 발생한다. 미숙한 아이들이 만드는 권력질서, 그 속에 자신의 자리를 제대로 잡지 못한다는 것은 사춘기 아이들에게 영원한 숙제며 고민이다. 이 시기 고민의 대부분이 대인관계에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주인공 리 피오라의 갈등 역시 이 사이에서 발생한다. 학구심 넘치고 재기발랄한 소녀 리. 어느 날 한 명문 사립학교의 팜플렛을 보고 이곳이 자신이 있어야 할 곳, 또한 자신을 피어나게 할 곳으로 선택한다. 평화롭지만 작고 즐겁지만 사소한 자신의 고향은, 자의식 강하고 야심찬 소녀 리에게는 답답하고 뒤떨어진 곳으로만 느껴진다. 리가 원한 것은, 이 학교가 가지고 있는 '명문'이란 타이틀에서 나오는, 한층 더 높은 세계이다. 하지만 그곳에 가는 순간, 리는 자신이 그 곳에서 발휘할 수 있는 힘이 아무것도 없으며, 그나마 가지고 있던 힘도 보잘 것 없는 것이고, 그래서 이 곳에 영원히 속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돈, 외모, 인기 그런 것들이 얼마나 속물적이고 한시적인 것인지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이미 그런 것이 힘을 발휘하게끔 만들어놓은 사회에 리가 대항할수 있는 힘은 미약하다. 게다가 리가 원한 것 역시 그런 힘을 바탕에 깔고 어떤 카리스마를 발생하는 인간이 되는 것 아니었던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리는 가난하고 외모도 뛰어나지 않고 그냥그런 평범한 학생일 뿐이다. 물론 성인이 된 뒤에는 깨닫는다. 꼭 사람들의 선망이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모든 면에서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것. 따라서 최고의 자리라고 해서 최고의 자리만은 아니라는 것. 하지만 모든 것이 미숙하기만 한 사춘기 시절에는 그 당연한 진리가, 사람과 사회의 다면성이 통용되지 않는다.
여기서 리가 할 수 있는 몇 가지 선택이 있다. 하나는 같은 방을 쓰는 학우 디드처럼 중심에 있는 자들에게 접근해 그들의 권력을 나눠받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호밀밭의 파수꾼’에 나오는 콜든처럼 이 우스꽝스러운 권력관계를 비웃고 전복하는 것이다. 하지만 리는 두 가지 방법 다 택하지 않는다. 이 학교를 선택하고, 이 학교가 가지고 있는 권력을 탐한 것은 다름아닌 리 자신이기에 후자의 방법은 리에게 맞지 않는다. 하지만 전자의 방법 역시 자존심 강한 리에게는 굴욕이다. 리가 택하는 것은, 조용히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누군가의 주목을 받고 싶지만 주목받는 것이 두려운’마음을 계속 간직한 채, 원래의 자신을 망가뜨리지 않을 수 있도록 최대한 보호망속에 넣으며, 처음에 자신을 매혹했던 이 학교의 매력을 현실이 아닌 빛바랜 앨범속에서만 찾는 것. 그것이 리가 택한 방법이다. 덕분에 리는 졸업할 때쯤 신문기자에게 이 학교의 어떤 진실을 까발릴 정도로 자신을 잃지 않는 것은 성공하지만, 자신에게 열려 있었던 다른 가능성들을 놓치고 만다. 몇몇 선배와 나눌 수 있었던 인간적인 교류를 놓치고, 연대할 수 있었을 몇몇 친구들 역시 놓친다. 자신이 가질 수도 있었을 어떤 기회들이 눈앞에서 날아가버리지만, 자의식만 강하고 아직 세상 경험이 적은 리는 어떤 식으로 자신을 오픈해야 하는지 감을 잡지 못해 아쉬움이 가득한 눈으로 그것을 지켜볼 뿐이다. 그리고 아마도 자신이 원했던 이 학교의 정점-크리스-을 손에 넣었다고 생각한 순간, 그녀의 이발 작업이 그랬듯이 상대방에게 약간의 호기심과 편리만을 안겨주고 비참한 결말을 맞고 만다.
자의식이 강한 이들에게, 머릿속에 꿈꾸는 자신의 이상적인 모습과 그것을 방해하는 사회, 그리고 그만큼 따라주지 않는 자신 세 가지가 충돌하는 사춘기 시절은 끝없는 비참함과 우울함만을 안겨준다. 나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크기에 상황에 대처하는 적응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리처럼 상황이 급작스레 바뀌는 경우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좀 더 성인이 돼서 돌아보면, 사춘기 시절은 아쉬운 것 투성이다. 내 고집 때문에 또는 내 미숙함 때문에 놓친 것들은 얼마나 많은가. 그게 사람이든 꿈이든 어떤 기회였든 간에.
하지만 소설은 여기까지다. 한 자의식 강한 소녀의 사춘기를 다큐멘터리 식으로 그려낸 소설은, 주인공 리를 변호하지도 않고 포장하지도 않으면서, 그녀의 생활과 감정, 생각하고 있는 바를 날 것 그대로 생생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소설의 가장 마지막 부분, ‘성인’이 된 리를 볼 때, 고등학교 시절이 그녀에게 우울하고 다소 비참했던 기억외에 무엇을 남겨줬는지 알 길이 없다. 가장 친했던 친구 마사는 1년에 한 두 번 볼까말까하고, 남자친구이자 첫 사랑이었던 크리스와는 교류조차 없다. 성인이 된 리에게서 고등학교 시절의 흔적을 찾아보긴 힘들다. 그 일이 그녀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그녀의 성장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독자는, 그리고 아마 그녀 자신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단지 리가 앨범을 넘기듯 자신의 당시 이야기를 담담하게 해 나가는데 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