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36주차 글 이어쓰기
- 이전에 자신이 썼던 글을 이어써도 좋습니다.
권장과제
필사
합평 방식
분량은 자유고 합평방식은 자유롭게 댓글에 달아주시면 좋겠습니다.
맞춤법 검사기
http://speller.cs.pusan.ac.kr/
합평 받고 싶은 부분
하고싶은 말
http://cafe.naver.com/peaceofredtea/552 <= 후속편입니다.
본문
---------------------------------------------------------------------------------------------------------------------
The air conditioner
데이 타임 마감이 사십분이나 지났지만, 민은 좀처럼 퇴근 준비를 할 수가 없었다. 카페 일이라는 것은 일과 중 바쁜 시간대와 한가한 시간대가 예측 가능한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분의 손놈이 가게를 마비시킬 수 있는 가능성도 무궁무진하다. 하필이면 생리통과 몸살감기가 겹친 이날, 로또처럼 개손놈이 등장했다. 그것도 데이가 퇴근하고 이브가 출근하는 그 회색 시간대에.
민은 에스프레소를 시키는 손님을 싫어한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남에게 잘 보이려 에스프레소를 주문하는 손놈을 싫어한다. 국내 입점한 굵직한 프렌차이즈만 해도 예닐곱개는 될 것이다. 또한 주인의 개성을 살린 소형 카페도 골목 꼭짓점 마다 하나씩 앉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렇게 커피향이 도시를 가득 채워 대중화를 꾀했어도, 타인의 눈을 의식하며 허세로 끼얹기 위해 굳이 에스프레소 요금을 지불하는 멍청이는 있단다.
이브 타임 알바생이 문자 한통 없이 30분째 나타나질 않아, 카운터엔 신경질이 영수증 사이에 스며드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분칠을 하지 않아 볼이 발갛게 오른 여학생 두명과 입이 귀에 걸린 남학생 한명이 유리문을 밀고 들어왔다. 구석 테이블에 가방을 내려놓고 주문을 하는데, 그 모양새가 민의 레이더를 찔렀다. 아 이 손놈은 에스프레소다.
아니나 다를까. 청바지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찌른 남학생은 귀에 걸렸던 입을 풀고 여학생을 힐끔거리며 에스프레소 투샷을 불렀다. 분홍색 볼을 가진 여학생은 아이스 바닐라 라떼를 주문했다. 그 옆에 선 볼이 타오르듯 빨간 여학생은 메뉴판을 한참 보고 있었다. 호주머니에 여전히 두 손을 찔러넣은 채로 남학생은
“오빠는 에스프레소 좋아해. 여기 올때마다 에스프레소를 한잔씩 꺾어줘야 뇌가 돌아가는 느낌이 든다니깐. 우리 지현이는 커피 처음 마셔보는 거야? 오빠가 추천해줄까? 커피 말고 우리 지현이만큼 상큼한 자몽에이드 어때?”
찡긋거리는 남학생을 응시하다 입꼬리에 경련이 일 것 같았다. 그러나 민은 베테랑이다. 대학 입학 후 곧장 카페 알바로 시작해서 지금은 타임 매니저로 승진할 만큼 경력도 실력도 접객 미소도 만점이다. 하지만 오빠 운운하는 손놈은 귀납추리의 맹점을 벗어날 것이란 감이 왔다. 민은 더 빨간 여학생에게 아이스 민트 초코를 추천해줬다. 쭈볏거리던 학생은 남학생을 스르륵 피하면서 민에게 학생증 카드를 내밀었다.
음료 세 잔을 재확인하고 카드를 긁고 영수증과 차임벨을 건내줬다. 40분을 꽉 채우고 이브 타임 알바가 나타났다. 민은 묵묵히 에스프레소를 내렸다. 민트 초코에 휘핑 크림을 올리고 초록색 민트시럽을 둘렀다. 오븐에서 꺼낸 따뜻한 에스프레소 잔에 샷포트를 기울이고 벨 번호를 눌렀다.
민은 앞 섶에 단 이름표를 떼며 직원룸으로 들어서자마자 앞치마를 목 위로 벗었다. 가방 안에서 윙윙 울리는 핸드폰 발신자명을 확인하고는 도로 넣었다. 자몽색 틴트를 입술 위에 가지런히 뭉개고 가방을 어깨에 걸치는 순간, 지각 알바가 다급하게 민을 불렀다.
“누나. 에스프레소 손님이…”
바람 잘 날 없는 나날이다. 라디오에선 연신 이상고온이다 폭염경보다 열병을 조심해라 주문을 왼다. 그렇게 덥다는데 누진세가 무서워 매장 주인은 에어컨을 틀지 마라고 한다. 손님이 몰려드는 정해진 시간 대에만 약냉방을 한시간씩 트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호주머니 손놈은 에스프레소가 쓰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카운터에 주먹을 쾅쾅 내리치고 있단다.
민은,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나라도 이 대학 등록금도 이 고시원 사글세도 민이 선택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물론 대학과 고시원 이름을 고를 수는 있다. 나라도 떠나면 된다. 그런데 숫자는 민이 정한 것이 아니잖아. 최저임금은 고작 60원 올리면서, 접대비 상한선으로 경제가 죽는단 곡소리를 내는 것도. 학교 예산에 구멍이 뻥뻥 뚫려 설명을 요구하면, 다음 학기 등록금 앞자리 수가 바뀌는 것도. 아둥바둥 허우적 대는 데 잡은 지푸라기 조차 없는 검은 늪에서 자꾸만 밑으로 가라앉는 것 같다.
민은 에스프레소가 쓰다며 사기꾼년 나오라고 춤을 추는 손놈을 무시하고 매장 가운데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손놈은 민의 무시를 참을 수 없다는 듯 팔을 휘젓으며 뒤따랐다. 민은 뒤통수에 꽂히는 욕설을 흘려버리며 엑스칼리버처럼 에어컨 리모콘을 눌렀다. 파워냉방은 이름에 걸맞는 위잉 소리를 내며 천장에서 얼음바람을 내리 쏟아냈다.
“매번 꺾으셔서 잘 아시겠지만, 에스프레소는 혀가 타들어가듯 씁니다. 손님”
남학생의 눈은 방울처럼 커지고 입은 꽉 닫혔다. 언듯 그 뒤로 빨간 볼 네개가 미소를 지은 것도 같다. 나무토막처럼 서 있는 그를 두고 가게 문을 열고 나갔다. 아스팔트에서 솟아오른 더운 열기가 양 볼을 훅 스쳤다. 그대로 멈춰 서서 민은 부서지는 햇살에 익숙해지려고 눈꺼풀을 깜빡였다. 스마트 폰에서 눈을 떼지 않는 남녀가 궁시렁 거리면서 민을 부딪히고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