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_ 선정자 : 마스터충달
좀비

[조건]
1. 분량 자유
2. 형식은 소설

*작성자의 말
정 글이 안 써진다 싶으신 분들은 좀비 영화 보시고 영화속 장면을 글로 옮기거나 하셔도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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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8144208144번 면회다. 변호인 접객실 H호로가면 된다."

 

코크람이 철창을 깡깡 내리치면서 내 번호를 불렀다. 눈을 찔끔감고 무릎을 세워 벽에 다리를 올려놓았다. 두 손을 가슴 바로 밑에 포개놓고는 들숨에 흉곽을 벌리고날숨에 흉곽을 조였다. 그런 나를 어이없다는 듯 내려보던 간수는,우리방 문을 활짝 열고 번떡거리는 구두를 문지방 위에 올려놓았다. 열린 문 사이로 흘러들어온 재촉거림이 코 끝을 간질였다. 그 가닥을 붙잡아 흉곽으로 밀어넣었다가 다시 내뱉으면서 벌떡 일어났다.

 

제우스비츠가 넣어준 보급품 운동화를 꿰어신고 터덜거리면 계단을 내려갔다.로제타 수용소는 Z-제노사이드 기간 동안, 그러니까 그전과 중간에서 후까지, 그 사이의 불분명한 기간 동안 Z-제노사이드와 직간접적으로관련된 모든 인간 여성을 감금하기 위해 만든 감옥이다. 당시 책임자의 작명센스가 하도 기이해서, 2016 929일임무를 달리한 인공위성 로제타의 이름을 따서 이 콘크리트 간판을 만들었다고 한다. 물론 이 책임자의두살배기 아들의 생모 이름이 로제타였던 것도 야사급 스토리가 되겠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야설은 입방아만내리찧을 뿐 실제 문건에 기록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변호인 접갤실은 항상 해초 냄새가 난다. 복도를 따라 걸으며혀로 날름 공기를 핥아보니 미끈거리고 조금 짭짤했다. 코크람은 문을 열고 타이머를 정확히 60분 맞췄다. 또각거리는 시계가 박자를 따닥 맞추면서 7평짜리 접객실을 울려대는 데, 나는 좀처럼 문지방을 넘어갈 수가 없다. 이 쪽과 저 쪽의 경계선을 가운데 두고, 문 쪽을 등지고 앉은 커다란감색 수트를 보고 섰다. 코크람은 오른쪽 가슴 주머니에서 연필을 꺼내어 타이머를 두어번 쳤다. 면회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60. 알아서 배분하라는 뜻이리라. 나는 흉곽 끄트머리에 숨겨뒀던 방공기를 남기없이 끄집어 올려 날숨에 뱉어내고 문지방을 넘었다.

 


2.

케이크라가 패소했습니다. 예상했던 바이지만, 지도부에선 가차없이 철퇴를 찍을 셈인가 봅니다.”

 

항소 기회는 쓸 수 없나요?”

 

.항소권을 특칙에 의거해 말소한답니다. 삼심제라는 귀한 제도를 허락하는 것이 인류에 대한, 아니 법원에 대한 모독이라고 하더군요. 이 문장은 판사 발언에서그대로 따온 겁니다. 다들.. 미쳤어요.”

 

제가 굳이 재판에 참석할 필요도 없을것 같은데요. 아마 똑같이 나오겠죠. 기소장이 곧 판결문이었어요. 다 부질없네요.”

 

다만, 우리 쪽에서는 공동변호를 요청하려고 해요. 지도부의 특칙 역시 긴급상황에서이례적으로 발생한 상황에 대한 적용이니 같은 논리로 항변해보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직 포기는 일러요.”

 

글쎄요. 전 모르겠습니다. 이런 취급. 이런대우. 차라리 이 수용소 보일러실에서 타고 있을 좀비 시체가 되고 싶을 지경이예요.”

 

그런 말씀은하지 마세요. 누가 뭐래도, 당신은그리고 케이크라는 최선의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것을 무관자인 지도부가 천편일률적으로 선을 그을 수는없습니다. 이건 인간의 기본권을 물론이고 존엄을 훼손하는 일입니다.”

 

변호사님은 아직도 인류를, 이 세상을 믿으시나요?”

 

저는 제 몸 하나 편하려고 변호사가되었어요. 제노사이드가 한창이었을 때는 법전이 무소용이었죠. 많은것이 무너지고,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시는인간이 인두껍을 쓰지 못하리라 여겼어요. 그 점에선 저는 물론이고 그 어떤 누구도 떳떳할 수 없어요. 때문의 지금 이 악법을 더더욱 막아야만 합니다. 누군가는 우리를정의를 외면하고, 자기 주장만 종용하는 정치꾼이라고 부르더군요. 어쩌면케이크라와 그리고 로제타 당신을 앞세워서 지도부의 독재를 막으려는 정치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미안합니다. 이건 잘못되었어요. 아무리생각해봐도 갖은 수단을 써서라도 막아햐 합니다.”

 

지겹습니다. 무죄로 풀려난들, 제 자식을 제손으로 죽인 비정한 애미 꼬리표는영영 붙어다닐 겁니다. 사회에선 우리를 화냥년이라 부른다더군요. 무식한인간들. 화냥년은 그런 의미가 아닌데. 어쨌든, 다시금 그 상황이 와도 저는 같은 선택을 할 것입니다. 케이크라역시 그럴 겁니다. 그 날 그 병원에서 있었던 수술을 누군가 요청한다면 또 할 겁니다. 인륜을 내던진 살육자, 인간 쓰레기 소리를 들어도 똑같이 할 겁니다. 변론에 그대로 쓰셔도 되요. 다시금 세상을 나간다 한들, 이미 이전과 같지 않을 텐데요. 어떤 쪽이든 그 특칙 3조항은 인류 재건을 위해 가임기 여성에겐의무임신제를 적용하니, 수용소 안에서든 밖에서든 제 신체는 제 것이 아닙니다.”

 

그 부분은.. 어제 케이크라 판결문과 함께 1차 의무임신제 적용 대상자가 공표되었습니다. 명단에 든 사람들은 신분증을 지참하고 보건소로 가라고 하더군요. 다들미쳤습니다. 이건 정말이지, 제노사이드 보다 더 끔찍한 지옥입니다.”

 

현실은 언제나 공상을 뛰어넘는다죠. 현실의 주체인 인간들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것을 현실화하면서 정당화하겠죠. 그런데 케이크라는 어떻게 견디고 있나요?”

 

그 분은판결문 낭독이 끝나자 마자 혀를 깨물고 자살기도를 하셨습니다. 하지만실패했죠. 아직 가임기라곧 여기 로제타 보건소로 호송될 것입니다. 언제 시술이 될 지 몰라요. 그러니까 더더욱 로제타 당신의 재판을이겨야 합니다.”

 

그 판결문 혹시 가지고 오셨나요?”

 

..여기 있습니다.”

 

 

 

 

 


3.
피고 케이크라는Z-제노사이드 기간 동안 어머니인 여성과 부부인 부모의 요청에 따라 그들의 자녀인 태아를 임신중절시술하였고 유아, 어린이에게 석시닐콜린을 주사한 혐의로 이 재판정에 기소되었습니다. 피고는 그간 재판 일정동안 피고 자신이 스스로 저지른 범죄가 지금까지 인류에게 있어 기록된역사 위에서 가장 큰 범죄라는 것을 인정했고, 또 피고가 거기서 한 역할을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피고는 자신이 결코 사악한 동기에서 행동한 것이 아니고, 누구를죽일 어떠한 의도도 결코 갖지 않았으며, 결코 인간을 증오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그와는 다르게 행동할 수는 없었으며, 또한 죄책감을 느끼지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믿기가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동기와 양심의 문제에서 합당한 의심을 넘어선 것으로 입증될 수 있는 당신에 대한 증거는 비록 많지는않지만 일부 존재합니다. 피고는 또한 최종 해결책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은 우연적인 것이었으며, 대체로 어느 누구라도 자신의 역할을 떠맡았을 수 있으며, 따라서잠재적으로는 거의 모든 인간들이 똑같이 유죄라고 말했습니다. 피고가 말하려는 의도는 모든 사람, 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유죄인 곳에서는 아무도 유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로 상당히 일반적인 결론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피고에 대해 기꺼이 내주고 싶은 결론은 아닙니다. 그리고 만일 피고가 우리의 거절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성서에 나오는 두 이웃하는 도시인 소돔과 고모라의이야기에 주목해 볼 것을 권합니다. 이 두 도시는 거기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죄가 있었기 때문에하늘로부터 내려온 불로 인해 파괴되었습니다. 이것은 말하자면집단적죄라는 최신식 개념과는 무관합니다. 이 개념에 따르면 그들자신이 행하지 않았더라도 그들의 이름으로 행해진 일에 대해서는 유죄로 추정한다는 것, 또는 죄책감을느낀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법 앞에서의 유죄와 무죄는 객관적인 본질의 것이지만, 그러나 비록 그 날 그 병원에 머물렀던 십수명의 사람들이 피고처럼 행동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피고에 대한 변명이될 수 없을 것입니다.

운 좋게도 우리는 그만큼 멀리 나갈 필요는 없습니다. 피고 자신은 전대미문의 범죄를 저지르는것이 주된 생존적 목적이 된 시대에서 산 모든 사람의 편에 서서 그 죄가 현실적으로가 아니라 오직 잠재적으로만 유죄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내적이고 외적인 어떠한 우연적 상황을 통해 피고가 범죄인이 되는 길로 내몰렸는지 간에, 피고가 행한 일의 현실성과 다른 사람들이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는 잠재성 사이에는 협곡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오직 피고가 한 일에만 관여할 뿐, 피고의 내적 삶과피고의 동기에서 가능한 비범죄적 본성 또는 피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범죄적 가능성에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피고는 피고의 이야기를 불운에 찬 이야기로 만들어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을알고 있는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는 만일 상황이 보다 유리했더라면 피고는 우리 앞이나 또는 다른 인권재판소로 나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상당히 있다는점도 당신에게 인정해 줄 용의가 있습니다. 논증을 위해서 피고가 유아살해와 태아살해의 조직체에서 기꺼이움직인 하나의 도구가 되었던 것은 단지 불운이었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피고가 자의적 판단에 따라 피고자신의 재량을 이용하여 자기 의지를 피력할 수 없는 작고 여린 생명을 학살하는 행위를 수행했고, 따라서그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구를 새로 태어나는 생명과 지금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다른 생명과 함께 공유하기를 원하지 않는 행위를 피고가 지지하고 수행한 것과 마찬가지로, 어느누구도, 즉 현재 지금 이 시점의 인류 구성원 가운데 어느 누구도 피고와 이 지구를 공유하기를 바란다고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Z-제노사이드라는긴급한 상황에서 살인을 한 것에 유죄가 되는 이유, 유일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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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_ 선정자 : 얼그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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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수조건
1. 소설
2. 전지적 작가 시점 혹은 3인칭 관점으로 전개 (1인칭/2인칭 안됨)

*선택 조건 (필수 아님)
1. 자신이 한번도 이름을 들어본 적 없는 국내/해외 지역을 배경으로 작성해주세요.
2. 국적이 다른 사람을 한명 등장시키세요.
3. 노래의 가사나 제목을 활용한 문장을 하나 이상 써주세요. 글 전체의 모티브가 되어도 괜찮습니다.
4. 극중에서 날씨/기후/계절 중 한가지가 드러나도록 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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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의 인생을 정리한다면 몇 개의 상자가 필요할까.


제인에게는 딱 한개의 트렁크면 충분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사나흘 여행용으로 안성맞춤인 트렁크 하나면 그녀의 삶은 정돈되는 것이다.


처음 존의 집에 들어올 때도 제인은 예의 낡은 회색 트렁크 하나만 가지고 왔다. 그 단촐함에 집주인은 '정말로 서랍장 한 칸이면 충분했군'하며 섭섭해했다. 그리고 짐짓, 제인과의 앞 날을 예상했을 것이다.


존은 제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이런 직업을 가지고 있다보면 자기 이름을 기억하는 것도 고통이 된다. 때문에 어떤 이는 술을, 섹스를, 마약을 제각기의 망각을 위해 쾌락을 탐하곤 했다. 내일은 없는 것처럼 탐닉하다보면 어느새 눈은 총기를 잃고 귀는 어두워진다. 그리고 신체의 늙음을 한탄하기도 전에, 직업의 업보로 인해 길바닥에서 비명횡사하고 만다. 그러나 다행히도 존은 속세의 쾌락에 어두워 개미처럼 돈을 모았다. 달력에 은퇴날짜를 동그라미 치고 한달을 일년을 십년을 빗금치며 악착같이 빠져나왔다. 그런 그가 세상 끝으로 도망쳐 밤도 낮도 하얗게 밝은 곳에 하숙집을 차렸다. 또 다른 세상의 끝에서 존의 후배들이 안식을 찾으러 왔다. 존은 그런 그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방열쇠를 빌려주곤 했던 것이다.


존은 비록 은퇴를 했지만, 아직도 성성한 무릎과 어깨를 가진 투박한 남자였다. 사람 좋은 너털웃음을 몇시간이고 거울 앞에서 연습했기에, 본인의 표정조차 감정을 담지 못한다는 점이 유일한 아쉬움이었지만. 부족할 것 없는 말년을 보낸다고 스스로 만족하고 있었다. 그런 그도 일주일에 한번은 시가지 펍에 가서 맥주를 마시며 시끄러운 소란을 구경하곤 했다. 술에 취해 희노애락을 거리낌없이 드러내는 가운데 앉아있으면 자신도 그들의 일행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 말의 술을 들이부어도 정신은 더욱 또록해지면서 일행감에 취해 트럭을 몰고 하숙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일상의 행복이라면 행복이겠지.


제인은 바로 그 펍에서 만났다. 동족은 동족을 한 눈에 알아보는 법이지. 회색 트렁크를 호기롭게 탁자 위에 올려놓고, 식어가는 맥주잔에 몽글한 물방울을 손가락으로 쓰다듬는 여자 제인. 여름의 열기와 습기가 펍 안을 채웠다. 짜증지수가 솟구치는 공간에서 알코올 기운을 못 이긴 한 얼간이가 여자 엉덩이에 사타구니를 문지르자, 그녀의 일행이 얼간이의 코를 부러뜨렸다. 피와 부러진 이빨이 허공을 가로질러 맥주잔 안으로 퐁당 들어가는 데도, 그 여자는 표정 없이 앉아 있었다. 악다구니와 아드레날린이 폭력을 부추긴 밤에, 시큰거리는 땀과 체취가 펍 안을 가득 채우는 그 밤에, 존과 제인은 어느 한 세상에도 속하지 못하는 서로의 영혼을 알아보았다. 제인은 트렁크를 움켜쥐고 일어나서 피떡이 되도록 얻어맞고 있는 남자와 그 남자를 후드려 패는 남자들을 무심하게 지나쳐서 존과 함께 주차장으로 나갔다.


트럭을 몰고 울퉁불퉁한 비포장 도로를 달리면서, 존은 제인에게 특별히 원하는 방이 있냐고 물었다. 제인은 잠깐 고민을 하더니 '서랍장 한 칸만 필요하다'고 답했다. 존은 제인의 무릎 위에 놓인 회색 트렁크를 힐끔 거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 날 밤, 그 비포장 도로 위에서 존과 제인은 자기 자신의 미래를 정확히 예측했을 것이다.


존은 제인에게 옥탑방 열쇠를 건내줬다. 제인이 삐걱거리는 계단을 타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는데도, 계단 아래에서 그 시커먼 계단 위를 한참을 바라보다가 방으로 들어갔다. 세상 끝에 어울리지 않는 무더운 여름. 손바닥을 펼치면 한움큼씩 솟아나는 땀. 공기 중의 습기는 워낙 축축해서 물고기가 헤어칠 정도다. 그 여름의 밤에, 좀처럼 잠이 들지 않는다. 베갯잎을 손가락 끝으로 더듬으며 존은 가슴 속에 솟아나는 불안감을 지우려 애썼다. 더워서, 습해서, 열대야라서, 피곤해서 그런거라고.


일상은 느리면서도 톱니바퀴처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과를 가져왔다. 존은 3층 화장실 변기를 뚫었다. 오후에는 바다에 나가 청어를 낚았다. 저녁 식탁에 청어 구이를 올렸다. 털털 거리는 냉동고에서 초콜렛 아이스크림을 꺼내 흑백영화가 나오는 테레비 앞에 앉아 한 통을 다 먹었다. 그의 하숙집 각 층에 머무르는 사람들 역시 그들의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에 서로 마주치지 않도록 극도로 배려하면서 여름을 보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여름이 물러가는 것이 느껴졌다. 계절의 변화는 예고를 하면서도 모르는 사이, 예컨데 아침에 일어나 침대 끝에 앉으면서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오는 것을 알게 된다. 존은 털복숭이 다리를 침대 밖에 꺼내놓고 왼쪽 어깨를 돌리다가, 런닝 셔츠가 땀에 젖지 않았다는 사소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오늘 그는 트럭을 몰고 시가지로 나가 하얀 린넨 침대보를 사올 것이다.


존이 3층 복도에 번진 곰팡이를 가리기 위해 벽지를 바르고 있을때, 그 뒤로 제인이 나타났다. 그 날이 존과 제인이 두번째로 마주친 날이었다. 제인의 망설임을 감지한 존은 그대로 벽지를 바르면서 오후에 시내로 침대보를 사러갈 것인데 같이 나가서 당신 침대보도 사자고 했다.


제인과 존은 트럭을 타고 시가지로 나가 상점가를 뺑뺑 돌았다. 여느 평범한 사람들과 달리 그들은 어떤 상점이 더 좋은지 구분할 수 있는 눈이 없었다. 그저 상점가를 뱅글뱅글 돌다가 모퉁이 끝에 자리잡은, 하늘색 커텐을 단 가게로 골랐다. 가게 구석구석에 놓인 침대보와 베개피를 보면서 존은 세상에는 왜 이렇게 고를 수 있는 물건이 많은 건지 어지러웠다. 단 하나의 결정에도 이렇게 많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매번 그 순간순간 마다 그 선택에 대해서 옳은 건지 그른건지를 사람들은 어떻게 감당하며 사는 걸까. 존이 가게 안을 역시 빙글빙글 돌면서 도통 고르질 못하자, 제인은 주인에게 가장 평범하고 때가 덜 타는 튼튼한 침대보와 베개피, 이불 두 채를 골라달라고 했다. 사람 좋아보이는 가게 주인은 아빠와 딸이 간절기 감기를 피하고 백야로 뜬눈 지새지 않게 포근한 제품으로 주겠다고 답했다. 순식간에 부녀가 된 그들은 포근한 이불짐을 트럭 짐칸에 올려놓고는, 카페로 향했다.


휘핑크림을 잔뜩 올린 초코렛 음료 두잔을 사이에 두고 말 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아마도 존은 제인이 왜 이 곳에 왔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제인 역시 존이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배제하고 숨기고 흉내내며 조용하게 살아왔던 두 사람은, 그들의 직업적 운명이 보통의 경우 어떤 결말을 띄는지 알고 있다. 때문에 문자로 설명하지 않아도 알게 된다.


존은 하숙집으로 돌아오자 마자 책상에 앉아 램프를 켰다. 자물쇠를 풀고 서랍장 구석에 뒀던 종이를 꺼냈다. 침대 매트리스 밑에서 붉은색 여권도 찾았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존은 조금 머뭇거리다 방문을 열었다. 오간 이 없는 텅 빈 복도를 뒤로 하고 문 밑에 하얀 봉투가 놓여 있었다. 그 봉투 안에는 초록색 여권이 있었다. 존은 두개의 여권과 한장의 종이를 책상 위에 나란히 펼쳐놓고는 램프의 밝기를 한단계 올렸다. 그리고 만연필을 꺼내 여권의 이름 두개를 종이 위에 옮겨 적었다. 잠깐 숨을 고르고 창 밖을 응시하다가, 다시 작은 한숨을 내뱉고는 옷장 문을 열고 갈색 트렁크를 꺼냈다. 바닥에 트렁크를 열고 그의 낡은 옷가지와 몇가지 잡동사니를 넣었다. 5평 남짓한 방 안을 서너번을 둘러보아도 그의 소유가 할 수 있는 온전히 그의 것인 물건이 없었다. 처음 올 때와 같이 여러 해를 살았어도 그의 인생은 트렁크 하나면 충분하다. 그는 트렁크를 닫아 침대 밑에 넣었다. 새로 산 포근한 침구를 침대 위에 풀어놓고 새 배갯잎을 입힌 베개의 주름을 손바닥으로 펴서 모양새를 잡았다. 그리고 그는 책상으로 돌아와 종이 끄트머리에 그의 이름을, 존 도우를 휘갈겨 썼다.





<부고>

세상의 끝 하숙집 주인 존 도우 사망

파란 하늘과 선선한 바람이 맞이하는 가을 날 아침 조용히 우리 곁 떠나

그의 집과 토지 등의 부동산은 외동딸 제인 도우에게 상속

제인은 부친의 일을 계속 이어가기로 결정

존 도우의 장례미사는 금주 일요일 정오 스미스 신부 주제로 치뤄질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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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_ 선정자 : 재구스

38주차 주제: 나쁜 생각을 담은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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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평 받고 싶은 부분


하고싶은 말
글 앞뒤로 브금(BGM)을 넣었습니다. 즐감~!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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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옵션이 마음에 안들더라도 어쨌거나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있어. 지금이 그때야."

 

운차는 비상탈출 캡슐을 닫았다. 막상 캡슐을 탔다고 해서 탈출 버튼을 누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수십 번을 이 좌석에 앉았고, 그때마다 버튼을 누르지 못해 다시금 복귀하곤 했다. 그 이전에는 캡슐 문을 열고 좌석을 뭉그렇게 쳐다보다 다시 문을 닫고 돌아서는 것도 수십 번이나 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기필코 버튼을 눌러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이 이후의 미래는 있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버튼을 누른다는 간단한 동작을 행하는 것만이 이 결심의 대단원이었다. 그래야만 한다.

 

1000일의 비행 동안 운차는 많이 참았다. 케베로와 디플로마의 비밀회담에도 참석했고, 그들과 문제의식을 공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를 푸는 방법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때문에 케베로가 결정을 윽박질렀을 때도,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었다. 그 이후로의 상황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고, 함장의 결정에 동의하는 횟수도 급격히 줄었다. 함장과 빈번히 대립했고 대들기도 했지만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이렇게 될 바에는 그 옵션이 마음에 들지 않았더라도 차악의 선택을 했어야 했나 후회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차악도 보코챠이 호도 모든 것이 귀찮아졌다. 모두 운차 자신과 무관한 다른 세계의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시도 이 곳에 속하고 싶지 않았기에 박차고 나가고 싶을 뿐이었다.

 

자정을 넘겨 함장의 메시지가 팜릿에 수신된 것을 보고는 팜릿을 벗어서 던져버렸다. 이제 참을 만큼 참았다. 더 이상은 헛된 기대를 스스로에게 최면 걸면서 나아질 것이라고, 발전할 것이라고,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고 이 상황을 납득시키고 싶지 않았다.

 

운차는 생체 GPS가 부착된 이어 커프를 뺐다. 책상 위에 놓인 탭패드를 열어 임무 기록을 열람했다. 1000일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지 않다. 그간 운차가 했던 모든 임무와 활동과 메모가 그대로 저장된 하나의 역사책을 보고 있다. 이를 모두 말소하고 싶다는 욕망이 들끓었지만, 가까스로 눌러 담았다. 이것이 대단한 기록은 아닐지라도 탐사선의 대원들이 앞으로의 임무를 계획하고 진행하는 데 아주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 때문에 더 말소하고 싶었지만, 그대로 두고 떠나기로 했다. 두 번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니. 모성으로 귀환한 후에도 이 탐사선과 탐사선의 대원들과 특히 함장과는 결코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유니폼과 부츠를 벗어 화기통에 넣었다. 소각 버튼을 누르면 0.4초라는 짧은 시간 안에 통 안의 모든 것을 태워버린다. 그리고 재는 한 달에 한번 슬러지 통에 모아 큐브화해 우주로 내보낸다. 얼마 없는 소지품을 모두 소각시키고 책상 위에 놓아뒀던 명찰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왼손에 쥐고 방을 나섰다. 그대로 W구역까지 성큼성큼 걸어갔다.

 

W구역에는 비상탈출 캡슐이 50대가 있다. 정확히는 50대의 캡슐 지지대가 있다. 현재는 38대만 남아있다. 비상용 10기를 제외하고 모든 대원은 그들의 이름이 표기된 캡슐을 가지고 있다. 운차는 본인의 이름이 음각으로 적힌 캡슐 앞에 서서, 캡슐의 창에 비친 얼굴을 내려봤다. 피곤에 찌든 얼굴. 입꼬리에도 남아있지 않은 희망들. 운차는 음각된 이름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다 오픈 버튼을 눌렀다.

 

캡슐 시트에 앉아 클로즈 버튼을 누르고 벨트를 맺다. 명치를 압박하는 벨트의 탄탄한 강도에 지금 이 상황이 어떤 것인지 재확인되었다. 이제 탈출 버튼만 누르면 운차는 보코챠이 호를 떠날 수 있다. 이대로 우주 유영을 하며 모성 미네르바로 날아갈 것이다. 바다에 착륙해서 연합군 사령본부로 가면 된다. 보고하는 것도 싫으면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도 된다. 아마 그럴 것이다.

 

"옵션이 마음에 안들더라도 어쨌거나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있어. 지금이 그때야."

 

케베로와 디플로마가 내놨던 옵션들이 어떤 것인지 이제 기억나지도 않는다. 비밀회담 책상 밑으로 운차가 가지고 갔던 옵션은 "비상캡슐"이었다. 이미 명분도 임무도 퇴색한 탐사선을 계속해서 타고 있을 이유는 없다. 디플로마처럼 새로운 명령체계로 다시 정상화을 꿰하는 것도, 케베로처럼 함장에게 성명서를 전달하는 것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광활한 우주에서 탐사선이라는 닫힌 세계가 구성한 근본이라는 놈을 바꾼다는 것이 가능하긴 하겠는가. 운차가 회담장을 떠난 뒤, 디플로마는 함장과 갈등을 일으키다 직위을 박탈당하고 비상캡슐을 탔다. 케베로는 G구역에서 나오질 않는다. 다른 대원들은, 다른 팀장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탐사선 외부 피막을 수리하고, 실험실에서 데이터를 갱신하고, 엔진 엔지니어를 구하고, 설계도를 새로 업로드하고, 대원들 간의 업무를 조정하고 그리고 끝이 없는 자질구레한 일들 까지. 어디서부터 운차가 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 어디까지 운차가 커버를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함장에게 개인 메시지로 인원 조정과 업무 재분배, 체계 조정까지 수차례 요구했지만 어떤 개선도 이뤄지지 않았다. 아니 어떤 시도는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운차는 성운에 갇혀 빛도 없이 암흑 속에서 영원히 부유하는 꿈을 자꾸만 꾼다. 이 이상은 성운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없다.

 

운차는 왼손에 쥐었던 명찰을 탈출 버튼 위에 올렸다. 흠이 잔뜩 난 명찰에 원래 새겨져 있던 이름을 또박또박 읽었다.

 

WoonCha S. Zuriche

 

그대로 명찰을 꾹 눌렀다. 캡슐의 가속 엔진이 점화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3초를 넘기지 않는다. 캡슐 탈출로의 문이 열리고 통로를 빠져나가면서 광활한 우주의 하늘로 나갔다. 모니터에 뜬 선로는 미네르바로 향하는 최단 경로이다. 고개를 돌려 보코챠이 호가 점점 더 작아지는 순간을 감상했다. 반으로 부서진 명찰이 캡슐 안을 천천히 떠다니다 시선 밖 보코챠이 호를 모두 가리게 되자, 운차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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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air conditioner

 

 

 

 

 


 

 

데이 타임 마감이 사십분이나 지났지만, 민은 좀처럼 퇴근 준비를 할 수가 없었다. 카페 일이라는 것은 일과 중 바쁜 시간대와 한가한 시간대가 예측 가능한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분의 손놈이 가게를 마비시킬 수 있는 가능성도 무궁무진하다. 하필이면 생리통과 몸살감기가 겹친 이날, 로또처럼 개손놈이 등장했다. 그것도 데이가 퇴근하고 이브가 출근하는 그 회색 시간대에.

 

 

민은 에스프레소를 시키는 손님을 싫어한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남에게 잘 보이려 에스프레소를 주문하는 손놈을 싫어한다. 국내 입점한 굵직한 프렌차이즈만 해도 예닐곱개는 될 것이다. 또한 주인의 개성을 살린 소형 카페도 골목 꼭짓점 마다 하나씩 앉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렇게 커피향이 도시를 가득 채워 대중화를 꾀했어도, 타인의 눈을 의식하며 허세로 끼얹기 위해 굳이 에스프레소 요금을 지불하는 멍청이는 있단다.

 

 

이브 타임 알바생이 문자 한통 없이 30분째 나타나질 않아, 카운터엔 신경질이 영수증 사이에 스며드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분칠을 하지 않아 볼이 발갛게 오른 여학생 두명과 입이 귀에 걸린 남학생 한명이 유리문을 밀고 들어왔다. 구석 테이블에 가방을 내려놓고 주문을 하는데, 그 모양새가 민의 레이더를 찔렀다. 아 이 손놈은 에스프레소다.

 

 

아니나 다를까. 청바지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찌른 남학생은 귀에 걸렸던 입을 풀고 여학생을 힐끔거리며 에스프레소 투샷을 불렀다. 분홍색 볼을 가진 여학생은 아이스 바닐라 라떼를 주문했다. 그 옆에 선 볼이 타오르듯 빨간 여학생은 메뉴판을 한참 보고 있었다. 호주머니에 여전히 두 손을 찔러넣은 채로 남학생은

 


오빠는 에스프레소 좋아해. 여기 올때마다 에스프레소를 한잔씩 꺾어줘야 뇌가 돌아가는 느낌이 든다니깐. 우리 지현이는 커피 처음 마셔보는 거야? 오빠가 추천해줄까? 커피 말고 우리 지현이만큼 상큼한 자몽에이드 어때?”

 

 

찡긋거리는 남학생을 응시하다 입꼬리에 경련이 일 것 같았다. 그러나 민은 베테랑이다. 대학 입학 후 곧장 카페 알바로 시작해서 지금은 타임 매니저로 승진할 만큼 경력도 실력도 접객 미소도 만점이다. 하지만 오빠 운운하는 손놈은 귀납추리의 맹점을 벗어날 것이란 감이 왔다. 민은 더 빨간 여학생에게 아이스 민트 초코를 추천해줬다. 쭈볏거리던 학생은 남학생을 스르륵 피하면서 민에게 학생증 카드를 내밀었다.

 

 

음료 세 잔을 재확인하고 카드를 긁고 영수증과 차임벨을 건내줬다. 40분을 꽉 채우고 이브 타임 알바가 나타났다. 민은 묵묵히 에스프레소를 내렸다. 민트 초코에 휘핑 크림을 올리고 초록색 민트시럽을 둘렀다. 오븐에서 꺼낸 따뜻한 에스프레소 잔에 샷포트를 기울이고 벨 번호를 눌렀다.

 

 

민은 앞 섶에 단 이름표를 떼며 직원룸으로 들어서자마자 앞치마를 목 위로 벗었다. 가방 안에서 윙윙 울리는 핸드폰 발신자명을 확인하고는 도로 넣었다. 자몽색 틴트를 입술 위에 가지런히 뭉개고 가방을 어깨에 걸치는 순간, 지각 알바가 다급하게 민을 불렀다.

 

 

누나. 에스프레소 손님이

 

 

바람 잘 날 없는 나날이다. 라디오에선 연신 이상고온이다 폭염경보다 열병을 조심해라 주문을 왼다. 그렇게 덥다는데 누진세가 무서워 매장 주인은 에어컨을 틀지 마라고 한다. 손님이 몰려드는 정해진 시간 대에만 약냉방을 한시간씩 트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호주머니 손놈은 에스프레소가 쓰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카운터에 주먹을 쾅쾅 내리치고 있단다.

 

 

민은,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나라도 이 대학 등록금도 이 고시원 사글세도 민이 선택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물론 대학과 고시원 이름을 고를 수는 있다. 나라도 떠나면 된다. 그런데 숫자는 민이 정한 것이 아니잖아. 최저임금은 고작 60원 올리면서, 접대비 상한선으로 경제가 죽는단 곡소리를 내는 것도. 학교 예산에 구멍이 뻥뻥 뚫려 설명을 요구하면, 다음 학기 등록금 앞자리 수가 바뀌는 것도. 아둥바둥 허우적 대는 데 잡은 지푸라기 조차 없는 검은 늪에서 자꾸만 밑으로 가라앉는 것 같다.

 

 

민은 에스프레소가 쓰다며 사기꾼년 나오라고 춤을 추는 손놈을 무시하고 매장 가운데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손놈은 민의 무시를 참을 수 없다는 듯 팔을 휘젓으며 뒤따랐다. 민은 뒤통수에 꽂히는 욕설을 흘려버리며 엑스칼리버처럼 에어컨 리모콘을 눌렀다. 파워냉방은 이름에 걸맞는 위잉 소리를 내며 천장에서 얼음바람을 내리 쏟아냈다.

 

 

매번 꺾으셔서 잘 아시겠지만, 에스프레소는 혀가 타들어가듯 씁니다. 손님

 

 

남학생의 눈은 방울처럼 커지고 입은 꽉 닫혔다. 언듯 그 뒤로 빨간 볼 네개가 미소를 지은 것도 같다. 나무토막처럼 서 있는 그를 두고 가게 문을 열고 나갔다. 아스팔트에서 솟아오른 더운 열기가 양 볼을 훅 스쳤다. 그대로 멈춰 서서 민은 부서지는 햇살에 익숙해지려고 눈꺼풀을 깜빡였다. 스마트 폰에서 눈을 떼지 않는 남녀가 궁시렁 거리면서 민을 부딪히고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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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der the air conditioner (원제 : 자몽에이드 인생)





그날도 현과 혜는 농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세상엔 바보가 과포화 상태라며 혀를 차고는, 현대 인간들은 스스로 만들어낸 진보라는 신화에 너무 심취하여 단지 염색체 개수가 동일하다는 조건 하나만 충족하면 죄다 평등한 인간 등급을 준다고 불평해댔다. 그런데 어떻게 평등한 집합체 안에 바보편차가 이렇게나 클 수 있냐며 각 개인의 가격을 비교하는 헛소리를 꺼냈다. 아마도 동아시아 어느 반도 최저임금은 염색체 실타래 한 짝 가격을 131원으로 놓고 국제 표준법이 인증한 시간 단위 1아워 갈굼질에 6030원을 지급한다고 속삭였다. 너도 나도 염색체 내용물은 다양성으로 포장하고 모로 가도 숫자만 맞으면 결론은 너나 나나 똑같이 6030원이라며 그래도 쟤보다는 내가 더 비싸야 되지 않겠냐고 자조했다.


현은 4월 말일을 기점으로 백수가 되었다. 실업급여 통장에 찍힌 숫자 중 3800원이 차감되었다는 문자를 보면서 씁쓸하게 운을 더했다. 휴양도 피서도 오포세대에겐 연애보다 더 비현실적인 단어일 뿐이라고. 에어컨 바람 빵빵하게 맞으며 목구멍 축이는 음료 나오는 카페에서 두시간이고 세시간이고 썰 풀며 시간을 죽이는 게 우리 세대에게 걸맞는 vacation이라고 평했다.


혜는 휴가라는 한글을 두고 굳이 혀 끝에 걸리는 영국 악센트를 고수하는 현이 재수없다고 여겼지만 또 걸고 넘어지진 않았다. 영재원 친구로 만나 동네 외고 석차 한자릿수라는 자존심도 이해할 수 있고, 용어는 그 정의와 어원을 분명히 밝혀야 소모전을 피한다는 현의 지론에 마지못해 동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혜 역시 과고 자존심을 버리지 못해 메일과 카톡으로 줄기차게 알림을 찍는 청첩장근황을 애써 무시 중이었다.


입 옆이 부르튼 알바생이 건낸 차임벨을 들고 에어컨 바람이 일직선으로 쏟아져 내리는 테이블에 앉았다. 현은 진보는 워낙 속이 좁아서 다양성을 추구하면서도 보수의 다양성을 말살시키는 편협한 인간들이라고 툴툴거렸다. 혜는 그런 현을 못 참고 요가나 명상을 해보라고 대꾸했다.


덜덜 거리면서 울부짖는 차임벨을 돌려주고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자몽에이드를 접시에 받쳐왔다. 혜는 빨대로 자몽시럽과 사이다 혼합물을 쪽쪽 빨았다. 이내 131원짜리 염색체 수개가 만들어낸 엄지손가락 두개를 바삐 움직이며 자몽에이드가 4500원이라고 짜증을 냈다. 자몽은 염색체가 대체 몇개나 되기에 나보다 고작 1530원 저렴할 뿐이냐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존심은 허리를 못 굽히게 만들고 학벌은 과거의 영광으로 눈을 멀게 만든다.


현은 역시 262원 어치의 손가락을 눌러 문장을 완성시켰다. 그리고 마주 앉아서 트위터 스크롤만 내리는 혜를 힐끔 쳐다보고는 마저 문장을 만들었다.


6030*2hr=12060hr

에어컨 가동 전기료를 직접적으로 포함하지 않은 요금으로 피서를 즐기기에는 카페만큼 적절한 곳은 없다.


120분에서 100분이 부족한 지점에서 둘은 일어섰다. 두 명분의 호주머니에서 끌어모은 동전과 지폐로 부족해서, 결국 현의 실업급여 통장에서 얼마간의 현금을 인출했다. ATM기가 바로 옆에 있어서 개이득이라고 키득거리며 6030원보다 값진 1시간을 맛보자고 모텔로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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