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옵션이 마음에 안들더라도 어쨌거나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있어. 지금이 그때야."
운차는 비상탈출 캡슐을 닫았다. 막상 캡슐을 탔다고 해서 탈출 버튼을 누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수십 번을 이 좌석에 앉았고, 그때마다 버튼을 누르지 못해 다시금 복귀하곤 했다. 그 이전에는 캡슐 문을 열고 좌석을 뭉그렇게 쳐다보다 다시 문을 닫고 돌아서는 것도 수십 번이나 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기필코 버튼을 눌러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이 이후의 미래는 있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버튼을 누른다는 간단한 동작을 행하는 것만이 이 결심의 대단원이었다. 그래야만 한다.
1000일의 비행 동안 운차는 많이 참았다. 케베로와 디플로마의 비밀회담에도 참석했고, 그들과 문제의식을 공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를 푸는 방법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때문에 케베로가 결정을 윽박질렀을 때도,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었다. 그 이후로의 상황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고, 함장의 결정에 동의하는 횟수도 급격히 줄었다. 함장과 빈번히 대립했고 대들기도 했지만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이렇게 될 바에는 그 옵션이 마음에 들지 않았더라도 차악의 선택을 했어야 했나 후회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차악도 보코챠이 호도 모든 것이 귀찮아졌다. 모두 운차 자신과 무관한 다른 세계의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시도 이 곳에 속하고 싶지 않았기에 박차고 나가고 싶을 뿐이었다.
자정을 넘겨 함장의 메시지가 팜릿에 수신된 것을 보고는 팜릿을 벗어서 던져버렸다. 이제 참을 만큼 참았다. 더 이상은 헛된 기대를 스스로에게 최면 걸면서 나아질 것이라고, 발전할 것이라고,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고 이 상황을 납득시키고 싶지 않았다.
운차는 생체 GPS가 부착된 이어 커프를 뺐다. 책상 위에 놓인 탭패드를 열어 임무 기록을 열람했다. 1000일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지 않다. 그간 운차가 했던 모든 임무와 활동과 메모가 그대로 저장된 하나의 역사책을 보고 있다. 이를 모두 말소하고 싶다는 욕망이 들끓었지만, 가까스로 눌러 담았다. 이것이 대단한 기록은 아닐지라도 탐사선의 대원들이 앞으로의 임무를 계획하고 진행하는 데 아주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 때문에 더 말소하고 싶었지만, 그대로 두고 떠나기로 했다. 두 번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니. 모성으로 귀환한 후에도 이 탐사선과 탐사선의 대원들과 특히 함장과는 결코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유니폼과 부츠를 벗어 화기통에 넣었다. 소각 버튼을 누르면 0.4초라는 짧은 시간 안에 통 안의 모든 것을 태워버린다. 그리고 재는 한 달에 한번 슬러지 통에 모아 큐브화해 우주로 내보낸다. 얼마 없는 소지품을 모두 소각시키고 책상 위에 놓아뒀던 명찰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왼손에 쥐고 방을 나섰다. 그대로 W구역까지 성큼성큼 걸어갔다.
W구역에는 비상탈출 캡슐이 50대가 있다. 정확히는 50대의 캡슐 지지대가 있다. 현재는 38대만 남아있다. 비상용 10기를 제외하고 모든 대원은 그들의 이름이 표기된 캡슐을 가지고 있다. 운차는 본인의 이름이 음각으로 적힌 캡슐 앞에 서서, 캡슐의 창에 비친 얼굴을 내려봤다. 피곤에 찌든 얼굴. 입꼬리에도 남아있지 않은 희망들. 운차는 음각된 이름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다 오픈 버튼을 눌렀다.
캡슐 시트에 앉아 클로즈 버튼을 누르고 벨트를 맺다. 명치를 압박하는 벨트의 탄탄한 강도에 지금 이 상황이 어떤 것인지 재확인되었다. 이제 탈출 버튼만 누르면 운차는 보코챠이 호를 떠날 수 있다. 이대로 우주 유영을 하며 모성 미네르바로 날아갈 것이다. 바다에 착륙해서 연합군 사령본부로 가면 된다. 보고하는 것도 싫으면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도 된다. 아마 그럴 것이다.
"옵션이 마음에 안들더라도 어쨌거나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있어. 지금이 그때야."
케베로와 디플로마가 내놨던 옵션들이 어떤 것인지 이제 기억나지도 않는다. 비밀회담 책상 밑으로 운차가 가지고 갔던 옵션은 "비상캡슐"이었다. 이미 명분도 임무도 퇴색한 탐사선을 계속해서 타고 있을 이유는 없다. 디플로마처럼 새로운 명령체계로 다시 정상화을 꿰하는 것도, 케베로처럼 함장에게 성명서를 전달하는 것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광활한 우주에서 탐사선이라는 닫힌 세계가 구성한 근본이라는 놈을 바꾼다는 것이 가능하긴 하겠는가. 운차가 회담장을 떠난 뒤, 디플로마는 함장과 갈등을 일으키다 직위을 박탈당하고 비상캡슐을 탔다. 케베로는 G구역에서 나오질 않는다. 다른 대원들은, 다른 팀장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탐사선 외부 피막을 수리하고, 실험실에서 데이터를 갱신하고, 엔진 엔지니어를 구하고, 설계도를 새로 업로드하고, 대원들 간의 업무를 조정하고 그리고 끝이 없는 자질구레한 일들 까지. 어디서부터 운차가 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 어디까지 운차가 커버를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함장에게 개인 메시지로 인원 조정과 업무 재분배, 체계 조정까지 수차례 요구했지만 어떤 개선도 이뤄지지 않았다. 아니 어떤 시도는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운차는 성운에 갇혀 빛도 없이 암흑 속에서 영원히 부유하는 꿈을 자꾸만 꾼다. 이 이상은 성운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없다.
운차는 왼손에 쥐었던 명찰을 탈출 버튼 위에 올렸다. 흠이 잔뜩 난 명찰에 원래 새겨져 있던 이름을 또박또박 읽었다.
WoonCha S. Zuriche
그대로 명찰을 꾹 눌렀다. 캡슐의 가속 엔진이 점화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3초를 넘기지 않는다. 캡슐 탈출로의 문이 열리고 통로를 빠져나가면서 광활한 우주의 하늘로 나갔다. 모니터에 뜬 선로는 미네르바로 향하는 최단 경로이다. 고개를 돌려 보코챠이 호가 점점 더 작아지는 순간을 감상했다. 반으로 부서진 명찰이 캡슐 안을 천천히 떠다니다 시선 밖 보코챠이 호를 모두 가리게 되자, 운차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