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_ 선정자 : 얼그레이
'은밀'을 주제/모티브로 글을 써주세요.
(19금 이상도 가능합니다,)

*필수조건
1. 소설
2. 전지적 작가 시점 혹은 3인칭 관점으로 전개 (1인칭/2인칭 안됨)

*선택 조건 (필수 아님)
1. 자신이 한번도 이름을 들어본 적 없는 국내/해외 지역을 배경으로 작성해주세요.
2. 국적이 다른 사람을 한명 등장시키세요.
3. 노래의 가사나 제목을 활용한 문장을 하나 이상 써주세요. 글 전체의 모티브가 되어도 괜찮습니다.
4. 극중에서 날씨/기후/계절 중 한가지가 드러나도록 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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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의 인생을 정리한다면 몇 개의 상자가 필요할까.


제인에게는 딱 한개의 트렁크면 충분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사나흘 여행용으로 안성맞춤인 트렁크 하나면 그녀의 삶은 정돈되는 것이다.


처음 존의 집에 들어올 때도 제인은 예의 낡은 회색 트렁크 하나만 가지고 왔다. 그 단촐함에 집주인은 '정말로 서랍장 한 칸이면 충분했군'하며 섭섭해했다. 그리고 짐짓, 제인과의 앞 날을 예상했을 것이다.


존은 제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이런 직업을 가지고 있다보면 자기 이름을 기억하는 것도 고통이 된다. 때문에 어떤 이는 술을, 섹스를, 마약을 제각기의 망각을 위해 쾌락을 탐하곤 했다. 내일은 없는 것처럼 탐닉하다보면 어느새 눈은 총기를 잃고 귀는 어두워진다. 그리고 신체의 늙음을 한탄하기도 전에, 직업의 업보로 인해 길바닥에서 비명횡사하고 만다. 그러나 다행히도 존은 속세의 쾌락에 어두워 개미처럼 돈을 모았다. 달력에 은퇴날짜를 동그라미 치고 한달을 일년을 십년을 빗금치며 악착같이 빠져나왔다. 그런 그가 세상 끝으로 도망쳐 밤도 낮도 하얗게 밝은 곳에 하숙집을 차렸다. 또 다른 세상의 끝에서 존의 후배들이 안식을 찾으러 왔다. 존은 그런 그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방열쇠를 빌려주곤 했던 것이다.


존은 비록 은퇴를 했지만, 아직도 성성한 무릎과 어깨를 가진 투박한 남자였다. 사람 좋은 너털웃음을 몇시간이고 거울 앞에서 연습했기에, 본인의 표정조차 감정을 담지 못한다는 점이 유일한 아쉬움이었지만. 부족할 것 없는 말년을 보낸다고 스스로 만족하고 있었다. 그런 그도 일주일에 한번은 시가지 펍에 가서 맥주를 마시며 시끄러운 소란을 구경하곤 했다. 술에 취해 희노애락을 거리낌없이 드러내는 가운데 앉아있으면 자신도 그들의 일행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 말의 술을 들이부어도 정신은 더욱 또록해지면서 일행감에 취해 트럭을 몰고 하숙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일상의 행복이라면 행복이겠지.


제인은 바로 그 펍에서 만났다. 동족은 동족을 한 눈에 알아보는 법이지. 회색 트렁크를 호기롭게 탁자 위에 올려놓고, 식어가는 맥주잔에 몽글한 물방울을 손가락으로 쓰다듬는 여자 제인. 여름의 열기와 습기가 펍 안을 채웠다. 짜증지수가 솟구치는 공간에서 알코올 기운을 못 이긴 한 얼간이가 여자 엉덩이에 사타구니를 문지르자, 그녀의 일행이 얼간이의 코를 부러뜨렸다. 피와 부러진 이빨이 허공을 가로질러 맥주잔 안으로 퐁당 들어가는 데도, 그 여자는 표정 없이 앉아 있었다. 악다구니와 아드레날린이 폭력을 부추긴 밤에, 시큰거리는 땀과 체취가 펍 안을 가득 채우는 그 밤에, 존과 제인은 어느 한 세상에도 속하지 못하는 서로의 영혼을 알아보았다. 제인은 트렁크를 움켜쥐고 일어나서 피떡이 되도록 얻어맞고 있는 남자와 그 남자를 후드려 패는 남자들을 무심하게 지나쳐서 존과 함께 주차장으로 나갔다.


트럭을 몰고 울퉁불퉁한 비포장 도로를 달리면서, 존은 제인에게 특별히 원하는 방이 있냐고 물었다. 제인은 잠깐 고민을 하더니 '서랍장 한 칸만 필요하다'고 답했다. 존은 제인의 무릎 위에 놓인 회색 트렁크를 힐끔 거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 날 밤, 그 비포장 도로 위에서 존과 제인은 자기 자신의 미래를 정확히 예측했을 것이다.


존은 제인에게 옥탑방 열쇠를 건내줬다. 제인이 삐걱거리는 계단을 타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는데도, 계단 아래에서 그 시커먼 계단 위를 한참을 바라보다가 방으로 들어갔다. 세상 끝에 어울리지 않는 무더운 여름. 손바닥을 펼치면 한움큼씩 솟아나는 땀. 공기 중의 습기는 워낙 축축해서 물고기가 헤어칠 정도다. 그 여름의 밤에, 좀처럼 잠이 들지 않는다. 베갯잎을 손가락 끝으로 더듬으며 존은 가슴 속에 솟아나는 불안감을 지우려 애썼다. 더워서, 습해서, 열대야라서, 피곤해서 그런거라고.


일상은 느리면서도 톱니바퀴처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과를 가져왔다. 존은 3층 화장실 변기를 뚫었다. 오후에는 바다에 나가 청어를 낚았다. 저녁 식탁에 청어 구이를 올렸다. 털털 거리는 냉동고에서 초콜렛 아이스크림을 꺼내 흑백영화가 나오는 테레비 앞에 앉아 한 통을 다 먹었다. 그의 하숙집 각 층에 머무르는 사람들 역시 그들의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에 서로 마주치지 않도록 극도로 배려하면서 여름을 보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여름이 물러가는 것이 느껴졌다. 계절의 변화는 예고를 하면서도 모르는 사이, 예컨데 아침에 일어나 침대 끝에 앉으면서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오는 것을 알게 된다. 존은 털복숭이 다리를 침대 밖에 꺼내놓고 왼쪽 어깨를 돌리다가, 런닝 셔츠가 땀에 젖지 않았다는 사소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오늘 그는 트럭을 몰고 시가지로 나가 하얀 린넨 침대보를 사올 것이다.


존이 3층 복도에 번진 곰팡이를 가리기 위해 벽지를 바르고 있을때, 그 뒤로 제인이 나타났다. 그 날이 존과 제인이 두번째로 마주친 날이었다. 제인의 망설임을 감지한 존은 그대로 벽지를 바르면서 오후에 시내로 침대보를 사러갈 것인데 같이 나가서 당신 침대보도 사자고 했다.


제인과 존은 트럭을 타고 시가지로 나가 상점가를 뺑뺑 돌았다. 여느 평범한 사람들과 달리 그들은 어떤 상점이 더 좋은지 구분할 수 있는 눈이 없었다. 그저 상점가를 뱅글뱅글 돌다가 모퉁이 끝에 자리잡은, 하늘색 커텐을 단 가게로 골랐다. 가게 구석구석에 놓인 침대보와 베개피를 보면서 존은 세상에는 왜 이렇게 고를 수 있는 물건이 많은 건지 어지러웠다. 단 하나의 결정에도 이렇게 많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매번 그 순간순간 마다 그 선택에 대해서 옳은 건지 그른건지를 사람들은 어떻게 감당하며 사는 걸까. 존이 가게 안을 역시 빙글빙글 돌면서 도통 고르질 못하자, 제인은 주인에게 가장 평범하고 때가 덜 타는 튼튼한 침대보와 베개피, 이불 두 채를 골라달라고 했다. 사람 좋아보이는 가게 주인은 아빠와 딸이 간절기 감기를 피하고 백야로 뜬눈 지새지 않게 포근한 제품으로 주겠다고 답했다. 순식간에 부녀가 된 그들은 포근한 이불짐을 트럭 짐칸에 올려놓고는, 카페로 향했다.


휘핑크림을 잔뜩 올린 초코렛 음료 두잔을 사이에 두고 말 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아마도 존은 제인이 왜 이 곳에 왔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제인 역시 존이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배제하고 숨기고 흉내내며 조용하게 살아왔던 두 사람은, 그들의 직업적 운명이 보통의 경우 어떤 결말을 띄는지 알고 있다. 때문에 문자로 설명하지 않아도 알게 된다.


존은 하숙집으로 돌아오자 마자 책상에 앉아 램프를 켰다. 자물쇠를 풀고 서랍장 구석에 뒀던 종이를 꺼냈다. 침대 매트리스 밑에서 붉은색 여권도 찾았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존은 조금 머뭇거리다 방문을 열었다. 오간 이 없는 텅 빈 복도를 뒤로 하고 문 밑에 하얀 봉투가 놓여 있었다. 그 봉투 안에는 초록색 여권이 있었다. 존은 두개의 여권과 한장의 종이를 책상 위에 나란히 펼쳐놓고는 램프의 밝기를 한단계 올렸다. 그리고 만연필을 꺼내 여권의 이름 두개를 종이 위에 옮겨 적었다. 잠깐 숨을 고르고 창 밖을 응시하다가, 다시 작은 한숨을 내뱉고는 옷장 문을 열고 갈색 트렁크를 꺼냈다. 바닥에 트렁크를 열고 그의 낡은 옷가지와 몇가지 잡동사니를 넣었다. 5평 남짓한 방 안을 서너번을 둘러보아도 그의 소유가 할 수 있는 온전히 그의 것인 물건이 없었다. 처음 올 때와 같이 여러 해를 살았어도 그의 인생은 트렁크 하나면 충분하다. 그는 트렁크를 닫아 침대 밑에 넣었다. 새로 산 포근한 침구를 침대 위에 풀어놓고 새 배갯잎을 입힌 베개의 주름을 손바닥으로 펴서 모양새를 잡았다. 그리고 그는 책상으로 돌아와 종이 끄트머리에 그의 이름을, 존 도우를 휘갈겨 썼다.





<부고>

세상의 끝 하숙집 주인 존 도우 사망

파란 하늘과 선선한 바람이 맞이하는 가을 날 아침 조용히 우리 곁 떠나

그의 집과 토지 등의 부동산은 외동딸 제인 도우에게 상속

제인은 부친의 일을 계속 이어가기로 결정

존 도우의 장례미사는 금주 일요일 정오 스미스 신부 주제로 치뤄질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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